[그때 그 인터뷰] 은하수의 영원한 등대지기 동요작가 윤극영
[그때 그 인터뷰] 은하수의 영원한 등대지기 동요작가 윤극영
  • 김두호
  • 승인 2009.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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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동심으로 산 반달 할아버지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한글과 노랫말을 처음 배우면서 마주치는 동요 <반달>과 <설날>을 비롯해 1백여 편이 넘는 동요를 남긴 윤극영 선생은 소파 방정환 선생과 함께 색동회를 만들어 일제 암흑기부터 어린이의 꿈을 찾아나선 어린이 문화의 선각자였다. 서울 우이동 산자락에 있는 동네에서 꽃을 가꾸며 살던 1970년대까지 만년의 모습은 언제나 해맑고 순수해 수줍은 아이 같았다.


어린이를 생각하며 살았고 어린이의 꿈을 노랫말에 담아내는 동요작가로 일생은 보낸 그의 이야기는 현대 어린이문화의 100여년 뿌리를 상기시켜주면서 우리 동요사의 내력을 소상하게 전해주고 있다.

인터뷰는 1979년 윤극영 선생의 연세 76세 되던 해에 이루어졌다.



어린 시절 얘기부터 들려주시지요.

나는 1903년 9월 6일 서울 소격동에서 출생했어요. 할아버지 윤정구(尹政求) 어른은 한말(韓末)에 승지 벼슬을 지냈고 아버지 윤직선(尹稷善) 어른은 윤치호 선생이 원산감사 시절에 비서로 일해 양반 집안이라고는 했으나 나라를 왜놈들이 점령해 어린 시절은 꿈을 잃어버린 시대였지요. 4살 때부터 회초리를 맞아가며 할아버지한테 천자문을 배우다가 8살 때 교동 보통학교(초등학교)에 들어 갔어요.


그 무렵 보통학교에서 배우는 과목은 어떤 것들이었습니까?

일본말 국어, 산술, 국한문, 체조, 창가(음악) 정도였지요. 졸업하고 경성고등보통학교(경기중고교)에 진학했는데 입학생 2백20명 중 절반은 도지사 추천의 무시험 입학생이었어요. 나도 집안이 좋아 당연히 무시험 추천을 받을 수 있었지만 담임선생이 공부를 잘하니 다른 학생에게 양보하고 시험을 치도록 권해요. 10대 1이 넘는 경쟁을 뚫고 합격했는데 그게 자만심을 키워 공부를 게을리 해 1학기 때 43명 중 42등을 했어요. 집으로 온 성적표를 보신 아버지께 호되게 야단을 맞고 2학기부터 제대로 공부를 해 성적을 올렸지요. 대수와 기하, 창가 과목은 특출하게 잘했어요.

<상록수>의 소설가인 심훈은 내게 외사촌이 되는데 같은 반에서 공부했지요. 그는 나와 반대로 지리와 역사 과목은 잘하고 대수 기하 성적은 엉망이었지요.


심훈 선생과 친척이면서 함께 공부하셨다면 일화도 많겠군요.

4학년으로 진급한 해 3월 1일 아침이었어요. 학교 운동장에서 심훈이 다가와 귀엣말로 “신발끈하고 허리띠 단단히 매고 준비하고 있어. 무슨 일이 일어날거야”라고 말해 무슨 소리냐고 캐물었더니 “독립이 됐어”라고 말해 깜짝 놀랐지요. 교실에 들어서자 이미 학생들이 술렁거리고 있었고 이어서 함성을 지르며 학생들이 교문을 나가 파고다공원까지 갔어요. 그곳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몰려든 인파가 독립만세를 외치며 남대문쪽으로 행진하고 우리는 이화학당 학생들을 만나 손을 잡고 시내로 들어 갔어요.

심훈은 그 때 체포되어 1년 만에 가출옥한 뒤 상해로 건너가 그곳 지강대학을 다녔지요.

1923년 일본 천황 암살계획을 세웠다가 발각되어 체포됐던 박열열사도 나와 한 반이었는데 퇴학을 맞고 일본에 건너가 저항단체를 만들어 활동했어요.


학교를 떠난 후 박열열사를 다시 만날 기회는 없었습니까?

우리는 동경에서도 친분을 나누었어요. 1922년 동경의 하숙집 부근에서 우연히 박열을 만나 나는 반가움에 뛰어가 끌어안으려고 했는데 그가 냉정하게 외면을 하고 돌아서 배신감을 느꼈어요. 그런데 늦은 밤에 누군가 내 방을 두드리는데 열어보니 박열이었어요. 알고보니 자신의 뒤를 미행하는 사람이 있어서 일부러 모른 척했다며 사과를 해요. 결국 그날도 그가 다녀간 후 일경이 찾아와 나와 어떤 관계인지 캐묻더군요.


일본 유학을 가신 것은 경성고보 졸업직후였습니까?

음악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집안에서 반대해 경성법전에 들어갔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2학기 때 그만 두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어요. 기차로 부산까지 가 여객선을 타고 시모노세키를 거쳐 동경에 도착해 친척 아저씨 댁인 하숙집에서 동경음악학교에 다니는 홍난파를 만났지요. 나는 동양음악학교에 들어가 바이올린을 배우려 했는데 사와사키 선생의 권유로 성악을 전공했어요.



동요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1923년 어느 날 이었어요. 동경 하숙집에서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체격이 건장한 젊은이가 언덕을 올라오고 있어요. 나는 무심코 그가 나를 찾아오는 손님 같다는 막연한 짐작을 했는데 생각이 맞아떨어졌어요. 그가 소파 방정환이었어요. 우리는 처음만나 피아노를 치며 ‘날저무는 하늘에 별이 삼형제 / 반짝반짝 정답게 비치더니 / 웬일인지 별 하나 보이지 않고 / 남은 별이 둘이서 눈물집니다’를 부르며 어린이들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소파는 3.1운동 때 33인 대표인 손병희 선생의 사위로 월간지 <신여성>과 <어린이> 잡지를 만들고 있었지요.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어요. “윤극영, 당신이 어린이들이 부를 노래를 만들어라, 자신만을 위해 음악공부해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장차 나라를 이끌어 갈 우리 어린이들이 즐겨 부를 노래가 없다”고 했을 때 나는 무조건 찬동했어요.


색동회가 만들어진 동기가 된 것이군요.

그렇지요. 그해 5월1일 방정환 진장섭 조재호 손진태 정병기 정순철과 내가 색동회를 발족시켰어요. 서울에서는 그날을 어린이날로 정해 행사도 하고. 뒤이어 마해송 이헌구도 멤버로 참여했는데 색동회는 우리 어린이들에게 순 우리말과 노래로 우리 고유의 아름다운 마음씨를 일깨워주려는 운동이었지요.


<반달>은 나라 없는 슬픔과 희망을 담은 우리 동요의 대표곡으로 지금까지 애창되고 있습니다. 창작에 따른 일화가 많을 것 같습니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우리 동포들이 무차별 학살 당하는 살벌한 일본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어서 귀국을 했어요. 아버님은 내가 귀가하자 뒤뜰에 음악을 할 수 있는 조그마한 별채를 지어주고 일성당(一聲堂)이라는 이름까지 지어주셨어요. 그곳에서 우리집에 모여드는 어린이들을 모아 <달리아회>라는 합창단을 만들고 1924년 여름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 곱고 고운 댕기도 내가 들이고 / 새로 사온 신발도 내가 신어요’라는 <설날> 노래를 만들었어요.

<반달>은 그해 9월 가평으로 출가한 맏누이가 별세해 집안이 슬픔에 쌓여 있을 때 하늘을 보니 대낮인데도 반달이 떠 있었어요. 낮에 뜬 외로운 반달이 죽은 우리 누이의 슬픔에 우리 민족이 처한 슬픔까지 떠올려 주더군요.

‘푸른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나라로 /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나라로 / 구름나라 지나선 어디로 가나 / 멀리서 반짝 반짝 비추이는 건 / 샛별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노랫말을 지으며 가장 고심한 것은 2절 끝의 ‘샛별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였어요.


당시 우리말 동요를 부르지 못하게 했다는데 어떻게 퍼져 나갔는지요?

나는 등사판을 구해 내가 지은 노래를 몰래 찍어 학교 선생님들에게 보냈어요. <설날> <반달>과 함께 뒤에 나온 <할미꽃> <따오기> <고드름> <소금쟁이> 등을 비밀리에 보급했는데 삽시간에 전국으로 번져나가자 총독부도 해제령을 내리고 부르도록 했어요.


젊은 시절의 드라마틱한 로맨스 이야기도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16살에 부모가 정해준 사람과 결혼을 하고 딸까지 두었지요. 그런데 1925년에 달리아회에서 내가 작곡한 창가극 <파랑새를 찾아서>를 공연할 때 피아노 반주를 한 지금의 아내(오인경)를 만났어요. 서울 공연을 하고 개성에서 공연할 때 서로 사랑을 느끼게 되어 서울로 돌아와 아버님께 고백을 하고 그녀와 간도로 떠나면서 우여곡절이 많았지요.


사랑의 도피라고 볼 수 있군요.

첫 아내에게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런 셈이었지요. 추운 겨울 두만강을 건너 만주에 들어갔을 때 어디서 들려오는 내가 만든 <반달> 노래소리에 두사람이 끌어안고 울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곳에서 동흥중학교와 광명중학교 음악교사도 하고 예술단을 만들기도 했지요.


언제쯤 서울로 돌아오셨습니까?

간도에서 해방을 맞아 돌아오는 길에 공산당에게 잡혀 3년간 감옥에 살다가 처형직전에 제자들의 도움으로 탈출했어요. 3.8선을 넘어오다가 연천에서 또 한번 붙잡혔지만 아기를 업은 젊은 엄마의 기지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지요. 10여 년만에 서울 와서 은행친구에게 돈을 융자해 포목점을 차려 안정을 되찾은 뒤 다시 동요 작곡에 매달렸지요.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로 시작되는 윤석중 노랫말 <어린이날 노래>를 작곡하면서 2년여 동안 1백곡을 만들었어요.




그후 윤극영 선생은 색동회를 다시 만들고 소파 방정환 선생의 동상 건립을 추진했으며 1974년부터는 무궁화 보급운동을 펼치며 여생을 어린이를 위한 사업과 애국운동에 바쳤다.

1988년 11월 85세를 일기로 어린이들 곁을 떠났지만 일생을 동심 속에서 살다간 반달 할아버지의 넋은 은하수의 영원한 등대지기로 남아 노래와 함께 반짝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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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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