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에 나타난 ‘용한 한의사’ 동국대 김길훤 교수
산골에 나타난 ‘용한 한의사’ 동국대 김길훤 교수
  • 김두호
  • 승인 2009.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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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 앞두고 봉화 산골로 이주해 사는 까닭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기자는 최근 경북 봉화 산골에 사는 귀농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어디 아픈 곳이 있으면 아주 용한 침구사가 있으니 치료를 받아보라는 제보였다. 친구는 자신과 가족이 모두 무릎과 허리 치료를 받아 완쾌를 했다는데, 치료비를 받지 않는 특이한 분으로 소개했다. 만나보니 그는 동국대 한의과대에서 중풍치료를 비롯한 침구관련 경락연구로 권위를 쌓은 한의학계의 중진 김길훤 교수(63)였다.


이름난 한의사 가문의 3대이면서 한의학 석박사 1세대인 김 교수는 두해 남짓 남은 정년을 앞두고 퇴임 후 보낼 곳을 찾다가 자연과 인심이 때묻지 않은 봉화를 돌아갈 고향으로 정했다. 그는 그곳에 집을 마련하고 방학이나 대학 강의가 없을 때는 산골 주민들의 무료 진료활동을 하고 있다. 병을 고치는 의술을 배운 후, 가르치며 사는 임무를 다했으니 마지막 남은 일은 누구에게나 베풀어주는 의술이라고 생각하며 산촌의 동네의사가 된 김 교수를 찾아 나섰다.


그를 만나던 날은 경북 봉화군 물야면 두문1리 언덕 위에 있는 두문교회 뒤켠의 장세한 전도사의 집이 그의 임시 진료실이었다. 찾아오는 그 동네 노환자들을 진료하고 늦은 밤 저녁상 앞에 앉아 인터뷰를 시작한 그는 소년처럼 천진난만하고 걱정이 없는 편안한 모습이었다.



고향은 원래 어디십니까?

평안남도 용강입니다. 한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49년 3살 때 가족과 함께 내려왔지요. 전쟁 때 아버지가 납북되시어 5살 때부터 어머님 슬하에서 자랐어요.


이곳은 어떤 동기로 오시게 되셨습니까?

주로 서울과 대구, 그리고 대학캠퍼스가 있는 경주를 오가며 살았지만 오래전부터 나이 들어 돌아갈 고향을 어디로 정할지 찾았어요. 조용히 쉴 곳보다 어려운 처지의 환자들에게 필요한 의사노릇을 하며 남은 인생을 살고 싶었지요. 30여년 교육자로 살았지만 돌이켜보면 나와 내 주변만을 위해 살았던 것 같아요. 의술을 물려주신 조상어른들이 ‘너는 무엇을 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저 혼자 잘 먹고 잘 지내다가 왔습니다’라고 말씀드릴 수는 없지요. 떳떳하게 드릴 대답을 이제부터라도 준비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봉화는 아무른 연고관계가 없었던 곳이군요.

그렇지요. 누군가가 비싸지 않는 산골 땅이 있다고 소개를 했어요. 언젠가 힘이 닿으면 소외된 노인사회가 된 산촌에 노인요양시설을 세울 수 있다는 생각에서 이곳을 찾았다가 산골교회에서 노인들과 더불어 기도하며 사시는 소박한 장세한 전도사님을 만났어요. 그 분과 인간적인 친교를 나누고 땅을 팔겠다는 노인도 만났어요. 그런 사이에 산수 좋고 인심 좋은 시골분위기에 반해 읍내에 살 집까지 장만을 했어요. 또 땅을 판 분이 중풍으로 고생하시는 분이셨는데 동네 주변에 내가 돌봐 드려야할 분들이 많다는 걸 알고 쉽게 결정을 한 것입니다.


한의사 집안에서 태어나셨다면 부친께서도 한의사셨군요.

3대째입니다. 집안 이야기를 하자면 길어요. 아버지는 숭실대에서 농업을 전공하셨지만 큰아버님이 경희대 한의대의 전신인 동양한의대 김정제 이사장(1988년 작고)입니다. 서울 돈화문 앞의 성재원한의원도 그 분이 운영하셨고 저도 백부 슬하에서 한의학을 배웠고 경희한의대 1기 졸업생입니다. 그런데 백부되시는 김정제 어른은 한의사인 조부(김병률) 아래서 의술을 익히며 아들처럼 한가족이 되어 어릴때부터 저는 큰아버지로 부르며 따랐습니다.

한의사인 조부께서는 본래 아들이 저의 선친(김찬욱) 하나뿐이었어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결핵성 인파선염에 걸려 생명을 부지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였을 때 금강산으로 약초를 구하러 집을 떠나셨다고 해요. 페니실린이 나오기 전이었고 연주창으로 일컫던 그 죽음의 병이 전국에서 창궐할 때였지요. 그런데 꿈속에서 산신령이 나타나 점지해준 대로 약제를 처방해 아들을 구했다고 해요. 아마도 치료 약제를 연구하고 찾아다니는 한의사의 집념이 현몽으로 이어졌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때 만드신 약이 신의고(神意膏)라고 해서 조선팔도에 팔려나가 평안도에서 제일가는 부자소리를 들었다고 해요. 그 어른은 선견지명도 있어서 해방되는 시기를 미리 알고 계셨고 조만식 선생을 만나면서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을 하고 용강에 보명농업학교를 설립해 교육사업도 하셨어요.


한의학을 접하게 된 과정은 조부보다 백부의 영향을 많이 받으셨군요.

그렇습니다. 환자를 신처럼 생각하고 신앙으로 대하는 정신도 그 분에게서 배웠습니다. 조카가 되고 제자가 되지만 저에게 한번도 반말을 하지 않고 화를 내신 적도 없습니다. 경락을 잘 짚어내지 못하면 자신의 몸을 실습삼아 내놓으셨지요. “한번 놔보시게”라며 침구를 들게 하고 잘못이 발견되면 조금도 얼굴을 찌푸리는 법이 없이 “여기를 다시 한번 놔보시게”하며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가르침은 언제나 정중하고 경건하게 느껴졌습니다.

환자를 대하는 모습은 참으로 정성스럽고 겸손했습니다. 환자와 마주 앉으면 수시로 안경을 벗어 이야기를 나누시곤해서 어느 날 “큰아버님 왜 안경을 자꾸 벗고 말씀하세요?”라고 여쭸더니 “어른들 앞에서는 안경을 벗고 말하는 법이라네”라고 조용히 대답을 하시더군요.


선친은 전쟁 때 납북되시고 조부께서는 그 후 어떻게 되셨습니까?

할아버지는 해방 후 분단이 되고 북쪽이 공산화되면서 재산을 모두 내놓고 남북간의 무역사업에 손을 댔다고 해요. 그러다가 6.25 전쟁에서 유엔군이 북진했을 때 수복된 지역에서 치안책임자로 참여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남쪽에도 친분이 있는 국회의원 등 지도급 인사들이 많아 도움을 받았지요.

언젠가 농약의 영향으로 농촌에 중풍환자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중풍이라면 침구치료부터 생각하게 되는데 농촌에는 주로 어떤 환자들이 많은지요?

이를테면 뇌일혈로 전신 또는 반신을 못쓰게 되는 증세가 중풍인데 한방에서 보면 말 그대로 바람을 맞은 병입니다. 초기에 땀을 흘리면 회복이 되기 때문에 약제나 침구 치료를 하면서 땀을 내라고 권합니다. 농촌에는 대부분 노인들이 살고 계셔서 중풍보다는 허리 어깨 등 신체의 통증을 호소하는 각종 만성질환자들이 많습니다. 제가 평생을 두고 연구한 분야가 경락이어서 쉽게 효험을 드릴 수 있어서 보람을 느낍니다.


이곳에서 진료활동을 하신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처음 봉화를 찾은 것은 2007년 10월이었어요. 그 이듬해 2월에 요양시설을 지을 만한 땅을 구입하고 작년 6월에는 내가 살아갈 집도 샀어요. 집에서 나올 때도 침구가방을 들고 다니며 만나는 환자들을 치료하다보니 진료실이 일정하지 않은 뜨내기 동네 한의사인 셈이지요. 그동안 물야면 지역에서는 장세한 전도사님 댁을 많이 이용하고 있습니다.


치료받은 환자를 통해 입소문이 서울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찾는 환자분도 늘어나 바쁘실 것 같습니다. 더욱이 치료비도 안 받으시니.

대학 밖에서 무리하게 체력을 소모하는 일을 시작하다보니 스스로 건강을 걱정할 입장이 되어 새벽에 일어나면 땀이 나도록 운동을 합니다. 한 시간 정도 조깅도 하고. 그런데 고달픈 하루를 보내고 잠에서 깨어나 동트는 아침 태양과 마주치면 세상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어요. 자연을 대하는 느낌도 달라지더군요. 하루의 시작을 열어젖히는 태양이 나를 위해 떠오른 것처럼 보입니다.


가족분들도 좋은 뜻을 이해하고 이곳에 사는 것을 동의하셨는지요?

물론입니다. 아내(김성희/60)는 이화여대 의류직물학과를 졸업하고 1976년 저와 결혼했어요. 제가 박사과정에서 시간 강사하던 어려운 시절부터 전공과 관련된 사업으로 남편 뒷바라지를 많이 해준 사람이죠. 재미있는 이야기는 저를 만날 무렵 우리 증조부가 아내의 꿈속에 나타나 ‘너희 부부를 내가 잘 돌보아 주겠다’는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죠. 하하하. 그래서 남편 일에 반대한 적이 없나봅니다.


증조부는 어떤 분이신가요?

김태희 함자의 어른인데 어릴 때부터 그 어른의 기념비석이 옛조상인 가야국의 마지막 왕으로 알려진 구형왕릉에 세워져 있다는 이야기를 어른들로부터 전설적인 이야기처럼 듣고 자랐습니다. 아마도 아주 오래전 김해김씨 종친회를 통해 왕릉의 복원사업에 기여를 하셨던 가 봐요. 제가 회갑이 되던 해에 산청군 금서면에 있는 구형왕릉을 찾아가 부근에 있는 5개의 비석 중 한 개에서 증조부의 함자를 발견하고 살아계신 어른을 뵙는 듯한 감격과 감동을 느꼈지요. 함자를 발견하는 순간 기적 같아서 부둥켜안고 울었답니다.


계획된 삶을 뜻한대로 살아오신 걸 보면 학생들에게 깐깐한 교수님일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년을 앞둔 한의학 학자로서의 감회는 어떤 것인가요?

학자의 권위에 집착한 오만을 비우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동국대에서 한의대는 6년제의 독자적인 학칙을 가지고 있어요. 학점에 너무 냉혹하게 했던 일들이나 밤 10시까지 한의학과에 불이 꺼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던 시절이 의미도 따르지만 언제나 욕심을 너무 앞세웠던 건 아닌지 자성을 하게도 합니다. 제가 전공한 경락이론은 전통 한의학의 골격중에서 중심 부문이고 서양의학과 확연히 차별되는 분야입니다. 그래서 전통 한의학의 부활을 염두에 둔 책임감을 버리지 못해 언제나 교수생활이 힘들었던 것 같아요.

한의학에서는 건강하게 사는 비결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몸의 병은 대부분 마음의 병에서 비롯됩니다. 마음은 곧 심장을 뜻합니다. 정신 기능의 중추가 심장에 있고 심장의 혈이 대뇌혈로 올라갑니다. 심장 기능이 원활해야 건강이 유지됩니다. 심장이 바로 하트입니다. 정신이 건강해야 심장도 건강하게 다스릴 수 있게 됩니다. 여성분들의 진맥을 하다보면 혈행이 순조롭지 못하고 가슴이 꽉 막혀 있는 분들이 많아요. 그럴 때 부군을 오시게 해서 그것을 풀어드리도록 합니다. 우울증이 심하면 만병의 원인이 됩니다. 건강하려면 기쁘게 살아야 해요.


침술에 대한 효능은 한의사와 환자에 따라 천차만별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쉽게 효과를 보는 경우도 있고 치료효과가 일시적이거나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같은 증세를 두고 침을 놓는 위치가 저마다 다른 경우는 어디에 까닭이 있는지요?

저의 경우는 침을 놓은 뒤 만져보면 반응과 효능이 있는 지 쉽게 감지가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증세에 따른 위치 선정과 발침까지의 적절한 치료시간입니다. 침구요법이 치료의 만능이 될 수는 없지만 제3의 감각통로인 경락을 제대로 자극하면 어떤 병이든 치료가 가능합니다. 의사에 따라 치료 위치가 다를 수 있지만 지식과 경륜이나 치료 체험을 통해 이루어지므로 하나의 원칙이나 비결로 풀 수는 없는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증세에 맞게 환자의 경락을 제대로 찾아내는 일입니다.


원광대 한의대를 졸업하고 한 때 대학로에 한의원을 개업했던 도올 김용옥 교수와 중고교 동기동창이라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아, 용옥이요? 보성중고교를 같이 다녔지요. 제가 학과장 시절, 학생들이 한 학기 실습비에 해당하는 5백만원을 요청해 김용옥 교수의 특강을 듣겠다고 해서 당장 김 교수와 전화를 연결해 달라고 했지요. 그래 내 제자들에게 특강료를 받겠느냐고 했더니 특강료에 신경 쓰지말라며 친구 체면을 세워주더군요. 그 친구 사실은 대구에 있던 우리 집에 내려와 묵으면서 한의학 서적을 30여권 빌려가더니 나중에 한의대까지 가더군요.


노인요양시설의 계획은 언제쯤 실행하실 생각인지요?

아직은 막연한 희망사항입니다. 한동안 이렇게 찾아오는 분들을 치료해 드리는 일로 살면서 능력이 닿는 대로 준비를 할 생각입니다.





김길훤 교수의 앉은 자리 곁에는 큰 가방 하나가 놓여 있었다. 침구 등 진료용 기자재가 든 그 가방이 산골동네의 이동 한의원이었다. 처음 만난 환자든, 인터뷰를 하기 위해 찾아온 기자든, 그는 가족이나 친구처럼 금방 친숙감을 느끼게 하는 정감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편안하게 들려주었다. 그는 새로운 고향에서 만년의 삶을 그렇게 따뜻하고 행복하게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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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88서울올림픽 공식영화제작전문위원, 97아시아태평양영화제 집행위원,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대종상 및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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