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의 한류
1900년의 한류
  • 김세원
  • 승인 2007.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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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만국박람회를 다시 가다 / 김세원


20세기 벽두인 1900년 4월 14일 파리 만국박람회가 열렸다. 유럽은 바야흐로 벨 에포크(Belle Epoque, 아름다운 시대, 1880∼1900)의 절정기를 맞고 있었다.


보불전쟁이 끝난 1871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까지 유럽에는 전쟁이 없었고 사회에는 평화가 가져온 향락적 분위기와 함께 세기말적 댄디즘 무정부주의 등 새로운 사상들이 잡탕처럼 공존했다. 산업혁명을 통해 주도 세력으로 떠오른 신흥 부르주아지들에게는 종말을 맞이한 19세기의 모든 것, 낡아빠진 사상을 불식하겠다는 강렬한 욕구와 함께 새로운 세기에는 모든 것이 변하고 새롭게 발전할 것이란 기대가 혼재해 있었다.


최초의 만국박람회가 1851년 5월 런던의 수정궁에서 열린지 50년, 만국박람회는 각종 공산품과 공예품을 통해 자국의 산업기술 수준을 겨루는 국력 홍보마당으로 자리 잡았다. 사실상 유럽의 문화수도였던 파리는 런던을 따라잡기 위해 만국박람회를 집중 개최했다. 프랑스의 랜드마크가 된 에펠탑이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된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탄생했고 1900년 만국박람회를 위해 파리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알렉상드르 3세 다리가 건설됐다.


서구 열강을 따라잡고자 노력했던 고종은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한 세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이 대규모 국제 행사에 주목했다. 조선은 1889년 파리만국박람회와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에 간소한 전시대를 설치한 적은 있으나 전시관을 건설하고 대규모 대표단을 파견한 적은 없었다.


1893년 5월 7일 이폴리트 프랑댕 조선주재 프랑스공사는 파리 외무부에 공문을 보내 “조선의 고관들과 이희 폐하(고종)가 만국박람회를 매우 호의적으로 받아들여 조선을 대표하기 위해 왕가의 일원을 파견하겠다고 밝혔다”고 보고했다. 구한국외교문서에는 1896년 1월 프랑스 서리공사 르페브르가 1900년 4월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박람회에 조선을 공식 초청했으며 고종이 흔쾌히 허락했다고 기록돼 있다.


1897년 1월 박람회 사무국과 다리 역할을 할 프랑스 주재 특사 및 전권공사로 민영환이 임명된 데 이어 1898년 8월 대표단 명단이 발표됐다. (후에 수정된 명단에 따르면) 명예위원장은 종2품 관원이었던 민영찬 대공, 위원장은 샤를르 루리나 파리주재 총영사였다. 1899년 6월 3일자 독립신문에는 파리 만국박람회에 전시품을 출품할 사람을 모집하는 재정후원자 트레물네의 광고가 실리기도 했다.


전시관은 곧 국력의 상징이었다. 1878년 파리박람회부터 참가국들이 나름대로 전시관을 꾸밀 수 있게 되어 저마다 특색을 살리면서 가장 눈에 띠는 건물을 세우려는 참가국들의 경쟁은 치열했다. 할당되는 부지 면적은 참가국의 규모와 재정, 프랑스에 대한 관심도에 따라 결정됐다.


참가국 명단 끝부분에 있는 조선에게는 샹드 마르스 서쪽 쉬프렌대로, 영국 제과관과 향수부속관 사이의 부지가 주어졌다. 처음에 구상됐던 전시관은 두 개로 17세기 유럽에 만연했던 중국 민예품에 대한 애호를 그대로 답습하여 중국풍에 가까웠다.


1900년 1월 재정후원자 드 글레옹 남작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바람에 공사가 중단할 위기에 처했으나 다행히 후임자가 나타났다. 새로운 재정후원자 미므렐 백작은 두 개로 설계된 건물을 하나로 줄였다. 전시관 건축은 베트남의 사이공극장을 건축했던 외젠 페레가 맡았다.





당시 파리 만국박람회를 소개했던 잡지와 신문기사, 공식 소개 책자를 보면 한국 전시관은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기대했던 것보다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 같다.


“한국정부 대표단은 쉬프렌 대로에 극동의 모습을 가장 잘 살린 우아하고 독창적인 건축물을 세웠다. 320제곱미터에 이르는 건물은 화려한 색을 칠한 목조건물로 넓은 기와지붕을 이었고 골조는 금빛으로 빛난다. 위로 치솟은 처마 끝은 이곳의 독특한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입구는 서울의 주택 문을 재현했다. 내부는 서울의 황제가 기거하는 옛궁의 알현실(경복궁 근정전)을 본떴다. 모든 벽에는 오래된 명주천이 걸려있다. 전시관 주위는 난간이 있는 회랑이 있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공식 책자)


“전체가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화려한 색깔이 입혀져 있고 극동 건축의 특징인 하늘을 향해 치솟은 처마끝과 커다란 지붕이 있는 한국관은 행인들의 시선을 끈다. 건축가는 황제의 고궁에 있는 알현실에서 받은 영감을 마음껏 발휘했다.” (1900년 발간된 서적 ‘파리박람회’)


당시 ‘라 퐁데리 티포그라피’ ‘르 프티 주르날’같은 신문 잡지의 기사들도 악기, 자개 공예품, 그림, 장롱, 도자기, 자수, 의복 등 전시된 귀중한 소장품과 토속품들은 Coree란 나라의 자원과 산업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기록했다. 특히 기자들은 한국 인쇄술의 역사를 다룬 책들을 전시한 진열대 앞에 한동안 멈춰 섰다. 콜랭 드 플랑시 공사가 구입한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00년 11월 12일 박람회는 폐막했다. 56개 초청국 중 40개국이 참가했으며 총 방문객 수는 5086만 800명에 이르렀다. 한국은 농산물 가공식품으로 대상을 받은 것을 비롯하여 2개의 금메달(야생작물과 의류), 10개의 은메달(가구 도자기 자수 의복 종이 등), 5개의 동메달, 3개의 장려상을 받았다.


전시품들의 일부는 기메박물관과 국립기술직업전문학교 부설 기술직업박물관으로 보내졌다. 아시아전문 박물관으로 알려진 기메박물관은 청색 인공색소와 알미늄 생산으로 많은 돈을 번 사업가 에밀 기메가 1879년 설립했다. 세계 각국의 종교와 문화에 관심을 가졌던 기메는 세계일주를 통해 수집한 세계 각국의 물품들을 모아 전시했다.


1886년 한불수호조약 체결이후 주한 프랑스 공사 콜랭 드 플랑시와 조선을 여행했던 프랑스인들이 수집한 민속품, 1889년 파리만국박람회때 전시품 등 350여점의 한국 공예품을 소장하게 된 기메박물관은 1893년부터 한국 관련 민속품들을 전시하기 시작했다. 박물관 부설 도서관에선 한국 민간신앙 서적, 1880년대 한양에서 출판된 한글 소설을 볼 수 있었다. 한편 1890년 법학을 공부하러 프랑스로 건너간 홍종우(김옥균의 암살범)는 1892년 6월부터 1년간 기메박물관에 근무하면서 프랑스인 동료와 함께 ‘향기로운 봄’(춘향전), ‘다시 꽃이 핀 마른 나무’(심청전), ‘한 해 운수를 알아보는 안내서’(直星行年便覽)등의 한국 서적을 불역하여 출판했다.


기메박물관은 미지의 나라들에 대한 온갖 지식의 산실이기도 했다. 1897년부터 1893년까지 동양에 관한 연속 무료 강연회가 열렸고 강연 내용은 각각의 책으로 출간됐다. 21개월 동안 한국에서 근무한 뒤 1896년 프랑스로 돌아온 모리스 쿠랑은 ‘8~9세기의 한국’ ‘한국에서의 종교’등 한국과 관련된 6개의 강연회를 맡아 한국의 다양한 문화적 풍요로움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파리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대한제국은 다음해인 1901년 하노이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도 참가할 수 있었다. 내친 김에 1902년 10월엔 해외박람회 국내유치를 위해 박람회 임시사무소를 개설했다. 당시 국내 언론은 1903년 서울에서 박람회가 개최될 것이란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의 등장으로 상황은 다르게 전개됐다. 1905년 일제의 강요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한국이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잃어가면서 모처럼 유럽에 일기 시작하던 한국에 대한 관심의 불씨는 꺼지고 말았다. 1918년 에밀 기메가 사망한 후 한국의 전시품들이 전시실에서 밀려나 창고에 처박힌 것처럼 프랑스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꼬레’(한국)는 사라져갔다.


파리만국박람회에 일본 도자기의 포장지로 사용됐던 우키요에(일본 에도시대의 풍속화)가 고호 모네 등 인상파 화가들의 화풍에 영향을 미치며 유럽에 ‘자포니즘’(일본풍) 유행을 몰고 왔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것이 ’한류‘(韓流)의 원형이다. 한 세기 전 프랑스에서 싹은 틔웠으되 일제에 짓밟혀 채 꽃피지 못하고 스러져 버린 ’한류‘의 ’화석들‘을 발굴하는 노력이 이제 우리에게 요구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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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원

동아일보 기사, 파리특파원, 고려대학교 정보통신대학원 초빙교수 역임, 현 카톡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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