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룡이는 내꺼지? -
삼룡이는 내꺼지? -
  • 황기성
  • 승인 2007.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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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동양의 대배우였던 김승호 / 황기성

영화에 입문한 세월로 치자면 44년의 긴 세월이 흘렀고 그간에 만난 배우들 가운데 가장 인상 깊은 한 사람을 꼽으라면 나는 이제 고인이 되신 김승호씨를 짚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1963년 가을 어느 날, 신상옥 감독의 대표작이 될(?) 영화 <벙어리 삼룡>의 기획회의가 남대문 메트로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거창하게 열리고 있었다. 약관의 나이로 신필름의 기획실장으로 일하고 있던 나에게는, 물론 내가 주재하고 있는 회의였지만 매우 긴장이 될 수밖에 없는 자리였다

회의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상했던 대로, 길게 둘러앉은 전국의 지사장들이나 전무며 사장까지 영화의 흥행성에 대하여 이의를 걸고 들어왔다.


‘어디 할 이야기가 그렇게 없어 불구자를 주인공으로 영화를 만드느냐 ?’

‘이 영화 손님이 들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지방에서 올라온 흥행사들은 마치 반대를 작심하고 올라온 사람들 같았다.

그때부터 대한민국 최대의 영화사인 신필름의 사실상의 사주이면서, 200명이나 되는 유급사원을 거느리고 있는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 이사가 빙긋이 웃고 지켜보는 가운데 애송이 기획실장과 노련한 흥행사들 사이에 격론이 벌어진다. 그러던 회의는 당시 한국영화의 대명사였던 신상옥 감독이 슬쩍 끼어들며 “불구자 이야기지만 아름다운 삼룡이로 그릴 수 있다 ”라며 기획실장의 손을 들어주자, 전국의 흥행사들은 당대 최고감독의 강경한 주장앞에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럼 한번 해 보쇼'하는 표정으로 기획안은 간신히 통과가 된다.



영화가 좋아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흥행성>이라는 단어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사탄의 칼 이다. 한편의 영화가 나오기까지<감독>과 <기획자>란 연인처럼 부부처럼 속내를 주고받고 아무도 모를 밀약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신상옥 감독은 나도향의 원작 소설인 ‘벙어리 삼룡이’ 를 좋아했다. 그는 틈날때마다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들고 싶어했고, 그 날 이후, 우리는 좋은 영화를 만들면서 흥행까지 같이 노리는 음모(?)를 면밀히 진행해왔다. 당시의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였던 임희재 선생도 열의를 보였다.



사실 <벙어리 삼룡>의 진짜 문제는 캐스팅이었다.

여주인공 ‘새 아씨’ 역은 최은희라는 최고의 스타가 회사 안에 있으니 염려가 없지만 ‘삼룡이’ 를 누가 연기하는가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1년에 200여 편의 영화가 쏟아져 나오는 아수라장, 영화마다 모두가 톱스타를 잡으려고 난리인 충무로에서 탑 클라스의 남자배우는 김진규. 신영균. 김승호. 최무룡이 경쟁하던 시대였다. 신 필름에서 욕심을 내는 영화가 준비되고 있다는 소문은 이내 배우들에게 전해졌고, 그러면서 이들은 저마다 그 영화가 자기에게 출연을 제의하기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음흉을 떨면서 서로 시간벌기로 가는 사이 난데없는 전화가 왔다. 수화기를 들자 다짜고짜 걸쭉한 강원도 억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 실장, 나 동양의 대 배우 김승호요. 삼룡이는 내꺼지!’


김승호 는 아시아 영화제에서 <마부>로 주연 남우 상을 받은 뒤였다. 큰일이 생긴 것이다. 신 감독과 나는 역할의 분석결과 김진규 로 가기로 결정을 이미 내린 뒤였던 것이다. 신영균 은 너무 볼륨이 크고, 김승호는 나이가 너무 많았다. 이것은 기획의 비밀에 속하는 답안지였다. 물론, 김승호의 전화는 한 번에 끝나지 않았다.


김승호는 스스로 <벙어리 삼룡>은 자기영화라고 믿는것처럼 보였다. 낭패였고, 쉽게 끝날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 일을 잘못 처리 했다가는 스타와 회사사이 오해가 생겨 다음영화에 닥쳐올 일들을 감당할 수가 없을것 같았다. 고민 끝에 나는 묘책을 발견해냈다. 기막힌 아이디어라고 생각하고 김승호의 전화를 다시 받았을때 나는 최대한 아쉬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이걸 어쩌지요? 당연히 저나 감독님도 삼룡이 는 선생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선생은 지금 네 편의 영화에 겹치기 출연을 하고 계시고, 삼룡이는 머슴역이라 머리를 깎아야 합니다. 섭섭하지만 어쩔 수가 없네요.’


‘머리를 깎아야 한다는데 이미 찍고 있어서 연결되어야 하는 다른 영화는 어떻게 할 꺼야?’ 나는 김승호에게 너무 아쉽다는 표현과 최상의 경의를 표하며 통화를 끝낸 후 일이 잘 마무리 된 것을 즐거워했다.


모든 영화가 사연과 곡절을 가지고 있지만, 이렇듯 밝힐 수 없는 비하인드 스토리들을 하나하나씩 채워가며 <벙어리 삼룡>이라는 물건을 만들어 왔던 나에게 이 기획회의란 숙제검사를 받는것처럼 고통스러운 순간이다. 여기서 제작결정을 결의시키지 않으면 이전까지의 수고는 모두 물거품처럼 날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젊은 기획실장의 이런 수고를 지방 흥행사들이 알리가 없다. 그들의 한마디 한마디는 가시처럼 내 마음에 쑤셔든다. 고통스럽다. 화가난다. 나는 흥행사들과의 기획회의를 하면서 치미는 울화에 분노한다. 참을수 없다. 하지만 참는다. 참아야 한다.

‘ 이렇게 만드는 사람들이 애를 쓰는 일들을 기획회의가 다 뭐야! 다수결 이란 것이 뭐 그리 대단한 거야!’


이렇듯 영화한편을 가지고 노력하고 고민한 과정은 철저히 무시된 채 주판을 들고 있는 장사꾼들 탁자 위에 올려진 나의 기획안이 앞뒤 없이 만신창이가 되는 모습을 보면서도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참는다. 그런 고통의 시간 동안 김진규, 최은희를 주연으로 <벙어리 삼룡>의 제작이 확정되고, 흥행사들이 다 빠져나간 회의실에 노련한 은사이신 신상옥 감독이 다가와 ‘영화가 다 그런 거야!’하시며 내 어깨를 툭 쳐주신다. 바로 그때였다.


옆문이 열리더니 나와 신감독에게로 중절모의 남자가 회의실 안으로 걸어왔다. 김승호 씨 였다. 순간 그는 모자를 홱 벗으며 소리쳤다.


“삼룡이는 내 꺼지?!~”

신감독과 나는 깜짝 놀랐다. 그는 머리를 깎고 온 것이다.


그 모습에 신감독과 나는 큰 감동을 받았다. 하지만, 영화 기획자가 뭔지, 영화감독이 뭔지... 그럼에도 그런 김승호씨에게 ‘삼룡이’배역은 돌아가지 않았다. 결국 김진규. 최은희 주연으로 <벙어리 삼룡>은 제작되었고, 그 영화는 좋은 작품으로 평가를 받으며 흥행에도 큰 성공을 거뒀다.


관객의 사랑을 받은 대 배우였고, 어쩌면 그 보다 훨씬 큰 ‘진짜 영화인’이었던 김승호씨가, 새 작품을 시작하기 위해 배우를 만날 때면 언제나 나에게 기억되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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