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가수, 성공한 CEO, 그리고 채시라 남편 김태욱
전직 가수, 성공한 CEO, 그리고 채시라 남편 김태욱
  • 유성희
  • 승인 2008.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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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통해 내가 복받은 사람이라 느껴요” / 유성희



[인터뷰365 유성희] ‘내 두눈을 짝지게 만든 멋있는 여자~ 내 머리를 고장내버린 세련된 여자~내 평생을 쓰고도 남을 엄청난 재물~그 모두가 고개를 숙인 찬란한 명예~ 조그만 이 주먹을 움켜쥐고 멋진 인생이 시작되는 순간~ 흥분해 꿈에서 그만 깨어났네~ 반드시 오늘은 좋은 일이 생길거야 꿈처럼 신나는 일이(하략)’


가수 김태욱의 1991년 데뷔곡 ‘개꿈’의 노랫말이다.

노랫말대로 김태욱은 꿈을 이뤘다. 개꿈이 아닌 진짜 꿈 말이다. 만인의 연인 탤런트 채시라를 아내로 맞았고 웨딩시장에 IT기술력을 접목해 신화를 일군 CEO가 됐다.

그는 얼마 전 국내 굴지의 CEO들이 참여한다는 EBS ‘CEO 특강’에 연예인 출신으로는 처음 출연했다. 그가 운영하는 아이웨딩네트웍스는 ‘국내 최대 IT 웨딩서비스 기업’으로 지난 2000년 창립 후 한국 웨딩산업 초유의 유통체계를 구축, 현재까지 무려 4만 5천쌍의 결혼식을 도왔다. 최근에는 세계시장 진출도 모색하고 있다.

가수에서 CEO로 변한 김태욱 아이웨딩네트웍스 대표는 여전히 껑충한 키에 사람좋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인터뷰를 위해 입을 여는 순간 그의 입에서는 노래 대신 논리적인 사업가의 달변이 이어졌다.



데뷔곡인 ‘개꿈’의 가사가 실제로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언제부터 사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거죠?

어릴 적부터 유통에 관심이 많았어요. 중학교 때 밴드의 리더를 하게 됐는데, 리더라 하면 음악적인 부분뿐 아니라 밴드에 관한 모든 비즈니스와 살림살이를 책임지게 돼요. 당시 공연을 하면 친한 친구들에게 반강제적으로 티켓을 파는 게 고작이었는데 저는 그렇게 하기가 싫었어요.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밴드의 포스터를 촬영해 음악과 관련된 악기사나 레코드방의 업체명을 넣어서 협찬을 받아내는 거였어요. 또 근처 가게들을 찾아다니며 티켓을 팔아주는 대신 수익의 어느 정도를 나눠 갖기도 했고요. 안정적인 유통망을 구축한 거죠.(웃음) 그때 장사꾼 기질을 조금 익힌 것 같아요.


그렇다 해도 가수 활동을 접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갑자기 인생의 방향을 옮기게 된 특별한 계기라도 있었나요.

98년에 갑자기 목소리가 안 나오기 시작했어요. 병원 어디를 가도 원인을 알 수 없었어요. 생각해보세요. 가수가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상황을... 저에게는 죽음의 선고나 마찬가지였어요. 1년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상태로 결혼을 했고 2년 정도 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어요. 소통이 되지 않으니까 글로 써서 의사전달을 해야 할 정도였죠. 꿈을 잃었지만 열정은 그대로 남아있어 너무 괴로운 시간들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의 시기가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던 것 같아요.



사업의 테마를 웨딩으로 정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자세히 말씀 드리면 저는 웨딩사업을 하는 게 아니에요. 정확한 명칭은 ‘IT 웨딩서비스 기업’이에요. 웨딩에 IT기술력을 기반에 둔 유통사업을 하는 거죠. 그러니까 유통사업의 첫 번째 메뉴가 ‘웨딩’이었던 것이죠. 99년에 결혼 준비를 하면서 우리나라 웨딩 시장 안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던 게 계기가 됐어요. 방대한 시장구조에 비해 체계적인 유통구조 시스템이 없다는 걸 알았죠. 제겐 웨딩시장이 블루오션으로 보였어요.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해보자는 마음이었습니다.


IT 기반의 웨딩유통 사업이라니요. 구체적으로 어떤 사업인지 말씀해주시죠.

아시다시피 결혼을 준비할 때 드는 비용이 결코 적은 비용이 아니잖아요. 집을 구하는 부동산 비용을 빼고 1년에 소비되는 돈만 13 ~ 14조원에 이르는 산업이 웨딩이거든요. 하지만 체계적이지 못한 시장구조 때문에 ‘부르는 게 값’인 시장이 웨딩이었어요. 이처럼 체계적이 못했던 웨딩시장의 구조를 유통 산업화 시킨 비즈니스 형태가 웨딩 컨설팅, 웨딩 플래너지만, 그 역시 한계가 있었어요. 우리는 투명한 유통구조를 가지고 업체와 고객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차별화됩니다. 투명성을 위해 업계 최초 정찰제도 실시했습니다.


회사의 규모는 어느 정도입니까?

창립 당시 15명으로 시작해 지금은 직원이 150명입니다. 창업 당시 연간 고객수가 150쌍 정도였는데 올해는 1만 8천쌍의 결혼식을 진행했고요. 100배 정도의 성장을 이룬 셈이죠. 이렇게 되기까지는 고생이 많았죠. 한 달에 두 번, 직원들 월급 전날과 업체 결제하는 날. 잠을 잘 수가 없죠. 사채도 써봤습니다. 끝까지 지켜낸 신뢰가 쌓여서 지금의 회사를 만들어내는 데 큰 밑바탕이 된 것 같아요.


직원들 월급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힘드셨습니까?

힘들었던 이야기는 정말 끝이 없죠. 2002년 말 대표이사를 맡으며 문 닫기 직전의 상황을 겪기도 했고, 2006년도에는 병역특례업체 조사를 받으며 뉴스에 보도되기까지 했고요. 저희가 웨딩회사로는 이례적으로 IT병역특례업체로 선정되었는데 ‘IT 웨딩 서비스 기업’이 저희가 최초였기 때문에 인식이 많이 퍼지지 않은 상태여서 의심을 받았어요. 하지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경쟁력 있는 회사임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어요.


그렇지 않아도 궁금했던 부분이었습니다. 연예인 출신이라서 일반인보다 쉽게 성공했을 거라는 선입견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사업을 시작할 당시만 해도 ‘노래나 부르지 무슨 사업이냐’ ‘웨딩에 무슨 IT냐’ 하는 눈초리뿐이었어요. 사람들이 생각하길 연예인이 사업을 하면 굉장히 유리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 반대예요. 우리 회사의 가장 큰 핸디캡은 저예요. 제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훨씬 빨리 성장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의 인식을 반전시키고, 신뢰를 얻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어요.



비단 웨딩분야 뿐 아니라 사업에 뛰어드는 연예인이 적지 않은데 성공을 이룬 경우는 극히 드문데요.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고 보십니까?

사람들은 연예인이 운영하는 사업체에 대한 기대치를 일반 업체보다 높게 잡아요. 똑같이 ‘100’을 만족시키는 식당이라도 소비자들은 연예인 사업체에 대한 기대치를 ‘200’으로 생각하게 되죠. 웨딩의 경우 스타들의 결혼 소식이 매체를 통해 이슈가 되면서 웨딩사업의 경쟁력을 스타마케팅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건 굉장히 위험한 발상입니다. 비싸다는 인식 때문에 오히려 마이너스가 되기 십상이에요. 스타결혼식은 결코 장기적인 발전으로 삼을 수 있는 모델이 아닙니다.


가수 활동에 비해서 아무래도 좀 따분하지 않을까 하는데요. 언제 가장 보람을 느끼나요?

재래시장의 구조와 같았던 체계적이지 못한 웨딩시장을 IT산업화시켰다는 데 자부심을 느낍니다. 처음에는 벤처의 황제를 꿈꿨어요. 하하. 현재는 그러한 생각이 저만치 내려가 있을 정도로 이 세상에 없는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고 대중화 시켰다는 게 신나고 재밌습니다.


음악할 때 이상으로 재미를 느낍니까?

그럼요. 이것 역시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대중에게 큰 사랑을 받는 것과 같은 이치예요. 제가 직원들에게도 자주 얘기하는 것이 우린 예술가들이라고 해요. 우린 누굴 흉내내는 게 아니라 새롭게 창조하는 거라고. ‘당신은 멋있는 작곡가, 멋있는 화가, 멋있는 아티스트야’(웃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결혼식은 누구였나요?

송일국씨 결혼이었어요. 주몽답게 결혼식을 올리고 싶다고 전통혼례를 이야기 하더라고요. 지금까지 많은 결혼식을 봤지만 송일국씨 결혼식은 정말 너무 멋있었어요. 우리 것이 이렇게 멋있다는 걸 새삼 느꼈죠. 이후에 서양식으로 준비하던 고객들 중에 전통식으로 바꾼 분들도 많았어요.


스타들의 결혼식 계약내용 중에 비밀로 해달라는 조건도 있나요?

아무래도 결혼을 알리지 말라는 내용이죠. 근데 결혼준비를 하다보면 들키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저는 들켜서 추측성 기사 나오게 하지 말고, 어느 시점이 되면 정확하게 밝히라고 중재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일반 사람들이 결혼식을 저렴한 비용에 치를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까?

결혼준비 하는 분들에게 꼭 얘기하고 싶은 것 중 하나는 ‘싸게 싸게’의 가치를 어디에 둘 것인가 하는 겁니다. 결혼준비라는 건 가격만을 싸게 한다고 해서 될 게 아니예요. 특히 결혼은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에 보다 편리하고 안정적으로 끝까지 책임져 줄 수 있는 가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가수로서의 활동을 돌이켜보면 어땠나요?

저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우리나라 교육제도에 불만이 많았어요. 학생의 정서는 고려하지 않고, 기능적으로 우수한 사람으로 만들려는 제도였어요. 강압적인 교육제도가 너무 싫었어요. 하루는 AFKN을 통해 비틀즈 공연을 보게 됐는데 딱 신 내린 느낌이랄까. 해방을 맞이한 거죠.(웃음) 이후로는 학교에서 맞아도 마냥 행복한 거예요. 그때부터 무작정 노래를 하기 시작했어요. 비틀즈가 되는 꿈을 안고, 시작한 가수생활이었는데 가요계 현장의 매커니즘은 제 생각과 많이 동떨어져있었어요. 멋있게 음악하고, 창작을 하는 곳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전투모드였어요. 노래 이외에 전혀 준비되지 않은 것들을 하려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촌놈이 서울 와서 광고도 찍고, 내놓으라 하는 쇼프로그램 MC도 맡고, 드라마 주인공까지 해봤지만 전혀 행복하지가 않았어요.


이제 음악에 대한 미련은 전혀 없나요?

한편으로는 좋아했던 음악을 못한다는 아쉬움도 있지만, 노래한다는 열정으로 사업을 하고 있어요. 사업도 아티스트라고 생각해요. 노래는 나이를 조금 더 먹고 폼나게 하고 싶어요. 폴 매카트니, 에릭 클랩튼 처럼 백발의 멋진 모습으로 여유 있고, 멋있게 노래 부르고 싶어요. 공연도 하고 팬들하고 놀러도 다니고.


둘째 아이가 이제 막 돌이 지난 걸로 아는데요.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행복한 가정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집에 들어가면 초등학교 1학년 딸과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아들이 있어 그것만으로도 이 세상 평화예요. 저는 솔직히 아버지로서는 부족한 점이 많아요. 일 핑계로 술도 많이 마시는 편이고요. 아이들 교육은 엄마에게 다 맡겨 놨는데 너무나도 훌륭하게 잘 하고 있어요. 딸 채니도 나중에 엄마 같은 사람이 되겠다는 이야기를 해요.(웃음) ‘내가 복 받은 사람이구나’ 아내를 통해 많이 느껴요. 지금의 회사가 있기까지 힘든 시간을 묵묵히 지켜준 사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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