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시험시즌 방송순위 1위 ‘파이팅’의 가수 채환
수능시험시즌 방송순위 1위 ‘파이팅’의 가수 채환
  • 서영석
  • 승인 2008.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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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는 힘들고 지친 이들은 위한 조그만 외침이다” / 서영석



[인터뷰365 서영석] 수능시험을 치르는 학생들에게, 더 나아가 온 국민에게 힘을 내라고 파이팅을 외치는 가수가 있다.

2007년 원더걸스의 ‘텔미’가 골목길의 어린 꼬마들의 어깨까지 들먹거리게 난리를 치던 때, 단 하루 전국의 모든 방송매체에서 방송순위 1위를 차지한 노래가 있었다. 가수 채환이 부른 ‘파이팅’이다. 그 하루는 바로 수능 날이었다.

올해도 수능시험 시즌은 어김없이 돌아왔다. 지난 13일 필기시험은 끝났지만 아직 논술 등이 대기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파이팅’이 필요할 것이다.

이들만이 아니다. 끝을 모르고 추락하는 경제상황에서 움츠러들대로 움츠러든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에게도 ‘파이팅’은 필요할 것이다.

신촌의 지하공연장에서, 또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작년에 정식 앨범을 내고 데뷔한 올해 서른 살의 가수 채환. 광화문 커피샵에서 만난 그는 조금은 시골스러운 모습에 환한 미소가 푸근한 남자였다.



올해 수능날에도 ‘파이팅’으로 파이팅 했나?

당분간 수능날에는 내 노래 ‘파이팅’이 계속 1위를 차지하지 않을까? (웃음) 작년에 ‘텔미’도 젖혔는데...


특별한 날에만 자신이 부른 노래가 유행하는 가수는 생명력에 문제가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생각 많이 한다. 가수가 다양한 레퍼토리를 가져야 되는데 아직... 하지만 항상 감사하고 행복하다. 노래만 할 수 있다면 어떤 고난과 역경도 헤쳐나갈 수 있다. 지난 날 거리에서 노래할 때를 생각하면...


성량이나 음폭 등 가수로서 기량은 출중한데 아직까지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

이제는 홀로 설 수 있다는 자신이 생겨 괜찮지만 처음 노래를 하겠다고 결심했을 때 농촌 출신이라는 것이 너무 싫었다. 남들은 외국 유학이다, 정통 클래식 전공을 했다 하는데 위축되는 자신을 어쩔 수 없이 속이 무척 상했다. 실력은 내가 훨씬 뛰어난데..., 가수는 노래만 잘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농촌 출신이라는 것이 마이너스 요인이라니? 오히려 정서적으로 더 풍부하지 않나?

요즘 와서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도시 출신 가수들이 가지지 못한 더 큰 감성, 자연과 인간에 대한 감성을 지녔다는 자부심,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엄청난 재산이라는 것을 최근에 알았다.


농촌에서 보낸 유년시절에 대해 말해달라.

경북 청도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까지 살았다. 소농사를 하시는 아버지를 따라 우(牛)시장을 다녔던 기억들이 지금도 생생하다. 밭을 갈고 꼴을 베던 전형적인 농촌소년이었다. 학교까지 10리(4Km) 길을 큰 소리로 노래를 하며 걸어다녀 이웃들이 소리만 듣고도 누군지 알 정도였다. 아마 이때 가수로 소리 공부를 제대로 한 것이 아닐까 싶다.(웃음)


노래를 잘했으면 남부럽지 않은 동네 스타였겠다.

부모님도 노래를 잘하셨다. 동네잔치가 있으면 제일 먼저 마이크를 잡으시는 분이 아버지셨고 어머니도 가수 못지않아 동네의 부부 가수로 유명했다. 아버지는 부드럽고 깊은 저음이셨고 어머니는 가냘픈 하이 소프라노셨다. 내 음역이 넓고 음도 상당히 높은 것은 부모님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일곱 살 때부터 동네잔치에 부모님 따라 다니며 노래를 불렀는데 어른들이 주시는 팁(?)이 상당해서 내 주머니는 어린 나이에 풍족할 만큼 돈이 쌓였다. 그게 프로 가수로 첫 발이 아니었나 싶다.(웃음)



가수가 되겠다고 마음을 굳힌 계기가 있다면?

운동을 좋아해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줄곧 육상선수로 활동하며 전국체전까지 출전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대구로 학교를 옮긴 후 이집저집 옮겨다니며 혼자 자취를 했다. 외로움을 달래려 용돈을 모아 기타를 장만해 독학을 했지만 독학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 학원을 다니고 싶었지만 경제적 여력이 없어 교습소를 찾아 심부름과 청소를 하면서 배웠다. 경북고등학교 1학년 때 그룹사운드 ‘가을여행’을 결성해 본격적인 음악 활동에 나섰다. 보수적인 명문고등학교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학교와 교장선생님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숨어서 연습을 했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고, 당시 미술선생님의 숨은 배려가 큰 위안이 되었다. 가을 축제 때 졸업공연을 한답시고 당시 신촌부르스의 엄인호까지 초청을 해 한껏 들떴으나 앰프가 나가는 바람에 퇴학 일보 직전까지 가는 위기를 맞기도 했다. 더 황당한 일은 당시 최고의 가수를 개런티 한 푼 없이 불렀다는 것이다. 공연이 끝난 후에야 비로소 아찔했는데, 다행히 마침 공연을 보러 오신 아버지께서 제 손에 꼭 쥐어주신 50만원(감농사로 버신 돈이란다)으로 겨우 차비 정도를 드릴 수 있었다.


본격적인 음악활동은 어떻게 했는지?

대학 시절, 계속 그룹 활동을 했다. 당시 젊은 층에 인기있던 프로그램 ‘청춘스케치’에 출전해 연말 결선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군입대라는 벽에 걸려 당시 프로듀서가 소개해 준 기획사마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제대 후 본격적인 가수활동을 위해 앨범을 준비하려 했지만 시골 출신 무명가수에게 음반을 제작해 줄 기획사는 없었다. 업소 생활도 하며 가수의 꿈을 키웠지만 결코 쉽지 않았다. 그래서 노래를 할 수만 있으면 거리든 지하철이든 장소를 불문하고 기타를 들었다. 단 한 명의 청중이라도 내 노래를 들어주면, 내가 노래를 할 수 있으면 더 없이 즐겁고 행복했다.


거리에서 노래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처음에는 쑥스럽기도 하고 부끄러웠지만 노래를 할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모든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다. 신촌에서 거리 공연을 할 때 인근의 극장에서 제의가 들어왔다. 지하공간이 비었는데 공연장으로 제공을 하겠다고. 너무도 감사한 마음에 후배들과 열심히 했다. 하지만 겨울에 난방할 돈이 없자 너무 추워 견디지 못한 후배들이 다 사라져 버렸다. 그래도 혼자서 이를 악물고 공연을 했다. 그러다가 가수로서 자기 노래가 없다는 것은 존재감의 부재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어떤 일이 있어도 앨범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거리로 나와 공연을 했다.


‘파이팅’은 어떻게 만들게 됐나?

거리 공연을 하니 내 기타 앞에 돈이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고 친구들과 주위의 청중들이 격려를 해줬다. 파이팅, 파이팅, 채환 파이팅 하며..., 거기서 착상을 해 집에 들어가자마자 채보를 끝냈다. 5분이나 걸렸을까. 노래 ‘파이팅’과 가수 채환은 이렇게 탄생을 했다. 전혀 일면식도 없는 일반인들의 격려가 오늘의 채환을 만들어주셨다. 내 노래 ‘파이팅’은 운동선수들의 우렁찬 파이팅이 아니다. 내 자신이 가장 어렵고 힘들 때 만들어진 노래라 제 마음 속의 작은 울림, 힘들고 지친 소외된 이들은 위한 조그만 외침이다.


첫 앨범을 보신 아버지의 반응은 어땠나?

앨범이 나오자마자 한 달음에 고향으로 달려가 아버지께 드렸다. 두 눈 가득 눈물이 고인 아버지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당시 아버지는 브루셀라 병이 도는 바람에 30여 마리의 자식 같은 소를 생매장을 하는 고통을 겪으셨다. 그 아픔을 어디다 견줄 수 있을까. 아버지 손을 잡는 순간, 아버지의 손과 내 손이 어쩌면 그렇게 같은지... 소 고삐를 끄시면서 굳어진 마디와 기타를 치느라 굳어진 내 손끝이 너무 닮아있었다. 아버지께선 평생 소를 키우시면서 싸움소를 가져보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그 때 뱃속에 있던 한 놈을 건지셨다. 다행히 그 놈은 어미의 뱃속에서 무사히 병을 피할 수 있었는데 우려와는 달리 아주 건강하게 태어났다. 싸움소는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다고, 그 놈은 다른 송아지들에 거의 2배에 가까운 몸이었다. 내가 앨범의 타이틀을 따서 ‘파이팅, 거미’라고 이름을 지어줬는데, 그 놈이 지금은 완전히 싸움소로 전국을 누비고 있다.


일곱 살 때 동네잔치에 출연(?)하던 것과는 격이 달라진 상태에서 고향 공연을 한 적이 있나?

어쩐 일인지 대구, 경북은 연예인 불모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의사, 법조인 등 모든 분야에서 명성을 날리는 분들이 많지만 연예인은 드물다. 나 역시 청도 출신의 유일한 가수가 아닌가 싶다. 얼마 전 고향의 가장 큰 축제인 ‘2008. 청도 감축제’에 초대를 받아 일가친척과 이웃들 앞에서 처음 가수로 자랑스럽게 노래를 불렀다. 그야말로 대단한 반응이었다. 전원이 기립박수로 앙코르를 외치는데 눈물이... 부모님께 비로소 효도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수로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인가?

내 노래, 내 호흡이 관객에게 전달될 때, 내 눈빛과 관객의 눈이 마주칠 때 행복과 자부심을 느낀다. 또 방송이나 라디오에서 내 노래가 나올 때도.


‘파이팅’ 노래와 관련된 사연도 있을 듯싶다.

홈피에 사연을 보내주신 분이 있었다. 장애인으로 부산에서 홀로 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분인데, 너무 힘들어 바다에 빠져 죽으려고 가던 중 라디오에서 ‘파이팅’을 듣고 다시 집으로 가는 버스로 갈아탔다는 사연이었다. 그 사연을 읽고 너무 행복하고 자랑스러웠다. 이 하나만 가지고도 가수 채환은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영원히 노래할 자신이 생겼다.



앞으로의 계획은?

더 열심히 노래 할 것이다. 비록 세련미는 떨어지더라도 농촌 출신들, 시민들의 고충을 담은 감성을 노래에 접목시켜 행복한 노래를 들려드리겠다. 내가 음악을 위해 너무 고생을 했고 또 부모님과 어릴 적부터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소외된 이웃에 대한 감정이 남다르다. 그들을 돕고 싶지만 아직 경제적으로는 여유가 없어 그저 몸으로 때우는 편인데, 이번에 그들을 위한 첫 단독 콘서트도 무료로 개최한다. 11월 22일 무역전시장 학여울역에서 여는 ‘중증 장애우를 위한 무료 콘서트’가 그것이다. 이 콘서트에는 제가 2년 동안 한 달에 한 번씩 동료들과 찾는 ‘송천 한마음의 집’ 친구들을 버스로 공연에 초청했다. 이들은 중증을 앓아 첩첩산중에서 문화와 단절된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친구들이다. 이 콘서트에서 2집 싱글앨범에 수록될 새로운 노래 ‘솔직히’도 발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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