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주기 맞는 비운의 황태자비 이방자여사
23주기 맞는 비운의 황태자비 이방자여사
  • 김두호
  • 승인 2012.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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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년 만에 되살린 여배우 장미희와의 만남

【인터뷰365 김두호】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李方子) 여사가 한(恨)의 생애를 접은 지 곧 23주기를 맞는다. 고궁의 뜰에 꽃이 피고 봄볕이 따사롭게 내려앉던 1989년 4월 30일 87세 되던 해에 생애를 접었다.


역사에 남긴 이방자 여사의 공식 직함은 ‘대한제국 의민 황태자(영친왕 李垠)비’이다. 무너진 왕조가 그녀에게 남긴 것은 ‘황태자비’ 또는 ‘왕비’라는 너울과 고독뿐이었지만 그래도 원망의 소리를 감추고 왕비의 품위를 지키며 일생을 불행한 사람들 곁에서 봉사의 생애를 살다간 분이 이방자 여사다. 대궐이었던 창덕궁 한 켠에 있는 낙선제에서 타계했고, 역시 ‘비운의 황세손’이란 호칭을 달고 불행하게 살았던 아들(이구 李玖)도 고독과 방황의 생애를 정리하고 2005년 무덥던 여름날 만리 타국에서 눈을 감았다.

일본 이름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이방자 여사는 일본 왕실에서 정략에 따라 대한제국의 황태자비로 시집오면서부터 바람 잘 날 없는 격랑의 시대를 헤쳐 나왔지만 눈을 감는 날까지 소박하고 겸손하며 바르고 중후한 언행일치의 법도를 지킨 ‘품격 있는 여자’의 모델이었다.

2007년 11월 말 일본 문부과학성 부대신(차관급) 이케노보 야스코 여사(66)가 한국에 왔었다. 일본 왕족 출신인 그녀도 이방자 여사의 외조카(언니의 딸)다. 일본 문화의 뿌리인 백제문화 유적을 돌아보기 위해 찾아온 그녀는 이모인 이방자 여사에 대한 생전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으시고 자선 모임을 정성스럽게 챙기시던 이모님 모습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는 말을 남겼다.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이미지를 남기고 떠난 이방자 여사. 타계하기 8년 전인 1981년 겨울인 신년 초, 그 시대 톱스타였던 장미희가 낙선제로 이방자 여사를 방문해 인터뷰를 했다. 주제는 ‘여자의 행복’. 장미희의 질문에 대해 비운의 왕비가 들려 준 인생의 기쁨과 슬픈 이야기들을 되살렸다. 이여사가 80살이던 해였다.


살아오는 동안 가장 행복했다고 느낀 순간은 언제였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구(玖 아들)가 멀리 유학을 가겠다고 했을 때 몹시 서운했어요. 그런데 전하(영친왕)께서는 이외로 아들의 뜻을 적극 지지해 당황했어요. 그후 미국 MIT공대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참 기뻤습니다. 졸업식 때는 전하와 함께 참석했는데 저는 보람과 행복감을 느끼며 눈물을 흘렸어요.

여자의 행복을 지배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배우자, 일, 자녀, 재산, 명예 같은 것 중에서 어느 것이 소중한지요?
어느 것 한 가지를 꼬집어 말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요. 가정생활이 행복을 지배할 수도 있고 자신의 하는 일에 가장 행복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기본적인 여자의 행복은 남자에게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좋은 남자와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서로 도우며 따뜻하게 산다면 그것이 여자의 참 행복이 아닐까 생각해요.

이제까지 살아오시면서 가장 슬펐던 순간은 어느 때였습니까?
(이 질문에서 그녀는 대답 대신 한참동안 시선을 허공으로 돌리며 말을 잃었다. 왕가에서 태어났으나 정략혼사의 희생양으로 어린 나이에 무너져내리는 타국 왕손의 아내가 되었던 그녀의 80평생은 기쁜 일이 없었다. 슬픔뿐이었을 파란만장의 생애를 돌이켜보게 한 것이 말문을 잠시 막히게 했던 것 같다.)

침묵이 길어지자 곁에서 모시고 살던 비서 이공재씨가 대신 답변을 도왔다. 그는 이방자 여사가 영친왕이 돌아가셨을 때 몹시 슬퍼하셨고, 맏아드님 진(晋)이 세상을 떠났을 때 가장 많이 우셨다고 말했다.

영친왕과 이방자여사의 결혼사진
여기서 잠시 이방자 여사가 남긴 자서전의 관련 대목을 옮겨보자.

<나는 조그마한 진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마구 울었다. 체면, 그런 건 따질 겨를도 없었다. 소리 내어 한없이 통곡했다. 그저 어머니가 겪어야하는 슬픔을 죄다 울음 속에 쏟아 놓았다.>

구(玖) 왕자의 형이 되는 진(晋)왕자는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왕실에서 독살 당한 비극의 왕손으로 전해진다. 순종황제 제위 때였고, 1922년 22살의 젊은 황태자비 방자 여사는 부군인 영친왕과 함께 순종 알현을 위해 잠시 일본에서 돌아와 있을 때였다. 슬퍼도 소리내어 울지 못하는 것이 왕가의 법도지만 첫 아기를 잃고 통곡했다는 것은 그만큼 한 여자로써 감내할 수 없었던 고통을 의미하고 있다. 장미희의 다른 질문이 이어졌다.


행복에 대한 느낌이 나이에 따라 다르거나 변한다고 생각하는지요? 그렇다면 소녀 때나 결혼전후 중년 노년기 여자의 일생을 통해 어떻게 달라진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점차 달라진다고 생각해요. 어릴 때는 아무래도 부모님 곁에서 같이 공유하고 느끼는 행복이 있겠지만 결혼하면 남편과 가정생활을 하며 느끼는 행복이 있습니다. 자녀를 낳고 키우면서 느끼는 행복은 여자에게 일생동안 가장 소중하게 생각되는 행복이겠지요.

요즘 느끼시는 행복과 보람은 어떤 것인지요?
자행회와 명휘원 일을 하고 있습니다. 심신 장애어린이들을 돌보는 일인데 해야할 일이라기보다 하고 싶은 일이어서 아이들을 바라보면 행복해집니다. 저의 힘이 그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 흐뭇해요.

부군인 이은공(李垠公)의 아호 명휘(明暉)를 따서 지은 명휘원은 광명시에 있다. 이방자 여사가 부군과 함께 동경에 살 때부터 모국에 돌아가면 불행한 어린이를 돕자는 약속을 했다는데, 1965년에 설립됐다. 그로부터 수원에 자혜학교와 광명시에 명혜학교를 설립해 타계할 때까지 농아 소아마비 등 지체부자유 아동을 위한 두 학교의 교육사업에 모두를 바쳤다.

일본 메이지왕의 조카딸 나시모토 마사코에서 대한제국 의민 황태자비로, 그러나 왕비의 영화를 누려본 적 없이 평범한 자선사업가의 모습으로 살다간 비운의 주인공에게 대한민국은 1989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라는 훈장으로 위로했다,

“나는 한국인이고 내가 묻힐 곳은 한국이다”를 입버릇처럼 말했듯이 그녀는 예의바른 한국 여인의 모습으로 살았고 한국 땅에 영원히 잠들어 있다. 경기도 미금시 금곡동 영원(英園)에 1970년 타계한 부군 곁에 묻혔다. 애절하게 사랑하던 아들 이구 공도 오른쪽 건너편에 잠들어 있다.

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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