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절 제자 30여만 명 둔 강영숙 예지원장
예절 제자 30여만 명 둔 강영숙 예지원장
  • 김두호
  • 승인 2008.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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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고 행복해 지려면 예절부터 지켜야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이 시대의 고전적인 화두가 되어버린 ‘전통 예절 교육’을 위해 34년을 쉬지 않고 달려 온 강영숙 예지원 (禮智院 www.yejiwon.or.kr) 원장은 여전히 지친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올해 72세, 전반의 절반을 화려한 인기 아나운서로 살고, 후반의 절반을 전통예절 교육기관인 예지원 운영에 바친 그에게 지금까지 예절을 배워간 제자만 30여만 명을 헤아린다.

꺾이지 않는 집념을 캐고 들어가 보니 시대를 초월하는 신비로운 인연의 내력들이 실타래가 되어 줄줄이 풀려나온다.


‘아나운서 강영숙 시대’는 1960년대 라디오시대부터 1970년대 민방 TV시대까지 계속됐다. 특히 왕영은 길은정으로 이어진 어린이 프로 인기 진행자의 원조가 강영숙 아나운서였다.

강영숙 원장을 MBC아나운서 시절인 1970년대에 ‘어린이의 예절’과 관련된 원고를 청탁하면서 알게 된 기자는 실로 30여년 만에 다시 인터뷰 기자가 되어 예지원을 찾았다.



참 세월이 물살같이 빠릅니다. 1972년인가. 초년병 기자시절에 뵙고 36년만입니다. 그때는 아름다운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사흘이 멀다하고 전화질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하하.

그래요. 그러고 보니 우린 참 무정하게 살았군요. 아직도 이쁘네요.(의례적인 덕담인듯)


예지원을 설립하신 때가 1974년 9월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땐 MBC에서 아나운서 활동을 하실 때였지요?

그래요. 그해 한달 전 8월 15일 국립극장 광복절 기념행사장에서 육영수여사가 돌아가셨지요. 예지원 사업의 씨앗은 그분이 뿌린 겁니다. 나와 인연이 희한하게 이어졌어요. 내가 여류방송인클럽 회장을 하면서 육여사를 만나는 기회가 많았어요. 그러다가 내가 말만 잘하는 아나운서라는 선입견과 달리 좀 과묵하고 예의가 반듯하다고 좋게 느끼신 것 같아요. 그래서 박목월 시인은 문학에 대한 개인 강의를 하고 나는 스피치나 예절에 대한 조언을 하는 기회가 많았어요. 어느 날 나라 안이 온통 경제개발로 어수선하고 여자들은 복부인이라는 말이 나오는 등 치맛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사회 안정의 근간이 되는 가정과 가족사회의 윤리교육 문제에 함께 공감을 나눌 기회가 있었어요.



그럼 그때 두 분이 예지원 설립을 설계하신 건가요?

예지원이라는 이름은 그때 나오지 않았고 그저 우리 민족 고유의 아름다운 전통예절을 가르치는 민간 교육시스템을 구상한 거지요. 1974년 5월 어린이날 행사가 남산 어린이회관에서 개최될 때 나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당시 신명순 어린이회관 관장에게 적당한 교육장소를 찾아보도록 지시를 하셨는데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어요. 곧 시행하는 것보다 여름방학 시즌이 지나 가을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는 나의 의견으로 미룬 사이에....


그 후 혼자서 결행한 건가요?

사연이 길어요. 우선 육여사 얘기를 좀 더 하고 싶네요. 나는 그해 어린이달을 맞아 육여사가 모범 어린이를 청와대로 초청해 격려하고 다과를 베푸는 자리에 인솔자로 참석했는데 그때 한 어린이의 어머니가 중풍으로 얼굴이 몹시 일그러져 있었어요. 의료보험이 없던 시대라 병원에 갈 형편도 못되었던 그분을 육여사가 버려두지 않았지요. 비서와 나에게 용한 침술사를 찾아보도록 요청해 북아현동의 유명한 곳에서 치료를 받도록 한 일이 있어요. 그런 건 육여사가 한 선행 중 일부분이지만 놀라운 것은 육여사가 타계하신 후 내가 관여했던 중풍어머니의 치료비가 걱정되어 침술사를 찾아갔더니 이미 정리를 하고 난 뒤였어요. 그뿐만 아니라 육여사는 운명 3개월 전부터 어린이회관 이전문제며 양지회의 봉사일 등 자신의 신상주변의 잡다한 문제를 모두 정리해 두었다는 점인데 스스로 무언가 예감을 하셨는지 아직도 믿을 수 없는 일화가 많아요.


처음 듣는 일화입니다. 육여사 추도 방송도 진행하셨지요?

아, 그때 정말 기가 막혔어요. 나도 충격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진행을 나에게 맡기는 거예요. 졸지에 일어난 사건이라 취재자료나 원고도 없고 그냥 혼자 무슨 말이든 결과만 가지고 방송을 하는 건데 4시간을 계속했었지요. 워낙 평소 알고 있는 것이 많아 막히지는 않았어요. 방송 중 “아직도 어린이인 지만 군은 이제 어디에 대고 어머니라고 불러야 될까요?”라는 말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펑하고 눈물이 터졌어요. 그 소리에 듣는 사람도 다들 울었다고 하더군요.

이제 다시 예지원이 문을 열게 된 때로 돌아가시지요.

그로부터 일주일 후 내 집안의 비극처럼 마음 아파 헤매던 때에 서울 동덕여고의 김재영 선생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어요. 특별활동 시간에 학생을 위해 꼭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인데 거절했지만 집요하게 간청을 해 출근 시간 전 학교에 갔더니 학생들이 교문에 서서 합장을 하고 나를 환영해요. 100여 명이 들어 찬 교실에 들어가니 ‘강영숙 보살의 설법’이라는 제목이 칠판에 적혀 있어요. 난 불교 신자도 아닌데 이게 무슨 일이냐고 따졌더니 독실한 불교도인 김재영 선생이 특활시간의 주제를 그렇게 잡았으니 이해해달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내가 예절교육을 할 만한 장소가 없어서 걱정이라는 말을 듣고 즉시 남산에 있는 대원정사라는 곳을 찾아보도록 권했지요.


그래서 설립 한 첫 장소가 대원정사로 알려져 있군요.

그곳도 사연이 많아요. 동덕여고에서 바로 이른 아침에 대원정사로 갔어요. 남산 언덕에 큼직하게 세운 건물 안에 부처님을 모셔두고 있었어요. 아무도 보이지 않아서 그냥 멋도 모르고 향을 한다발 향로에 피웠지요. 몇 개만 피우는 건데 처음이라 한 묶음을 몽땅 태우며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사람을 기다리는데 어디서 가느다란 말이 들려왔어요. “웬 향이 이리도 독한고” 라는 목소리가 꼭 꿈속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지요. 얼굴을 돌려보니 아주 초췌해 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이 보청기를 끼고 나타나신 건데 나는 대뜸 “이곳에 오면 회장님을 만날 수 있다던데 어디 계신가요?”하고 소리쳤어요. 할아버지는 “무슨 일로?”라고 받으셨고 다시 나는 “교육 시킬 장소 구하려고요”라고 대답했어요. 이어서 “교육은 학교가 있잖아”라는 말씀에 “학교 교육이 아니고 마음의 교육을 시키는 곳이 필요해요”라며 소리치다가 말이 잘 안 통하는 어른 같아 메모를 적어드리고 곧장 방송국으로 출근했습니다.

하하하, 그런데 다음날 방송국으로 대원정사 회장이 찾는다고 그곳 비서한테 전화가 왔어요. 달려가 만나보니 글쎄 회장이란 분이 바로 그 할아버지였지 뭡니까. 하하하.


만들어 낸 이야기 같습니다. 하하하.

그렇지요. 나도 그렇게 느꼈어요. 한순간은 소름이 끼치더라고요. 그런 그 보청기 할아버지가 바로 유명한 동국제강의 장경호 회장님이셨고 그분은 “내가 이 건물을 지워놓고 임자가 없었는데 이제야 임자가 나타났군요.”라며 비서를 불러 그 큰 건물을 고루 보여주게 한 뒤 사용하라고 하셨어요. 강당도 있고 강의실도 있는 아주 좋은 장소였지요.



출범 초기는 혼자 뛰셨어요? 예지원 이름은 누가 지었고요?

육여사가 이끌던 정부고위층 부인들의 봉사 모임인 양지회가 육여사의 유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협조하고 참여해 순탄하게 우선 양지회 회원을 대상으로 한 강좌부터 시작했어요. 예지원 이름은 언론인 송지영 선생이 정심원(正心院)으로 지어주셨으나 왠지 만족감이 느껴지지 않아 고민할 때 우리의 전통예절의 골격인 인의예지덕(仁義禮智德)에서 딴 예지원으로 남편(한영섭 전 KBS 보도실장)이 작명했어요. 지금도 심심하면 작명료 요구를 한답니다.


초기에는 상류사회의 부인들만 가는 곳으로 소문이 나기도 했던 것 같아요.

입학 자격이 정해지지 않았지만 초기의 운영에 양지회 회원 분들이 참여해 그런 오해를 받았어요. 당시 김종필 현직총리의 부인 박영옥 여사도 입학을 요청하기에 내가 조건을 내걸었어요. 지각 조퇴는 안된다고요. 그랬더니 자신도 조건을 걸더라고요. 공식행사로 인한 일정이라면 봐달라고요. 그건 어쩔 수 없다고 했어요. 그처럼 엄격하게 운영해 교육기관의 권위를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해 왔어요.


예지원에서 한때 해외에 나가는 여성들의 소양교육을 전담하기도 했지요? 5공 때 해직 언론인의 한 분이셨는데 그 후 정부의 배려가 많았던 데는 특별한 계기라도 있었던가요?

5공 초기에 나는 아나운서 실장을 한 국장급이지만 800여명의 해직언론인 명단에 들어가 방송국을 떠났어요. 예지원을 운영할 때라 오히려 한쪽에 전념할 수 있었지요. 그러다가 청와대 비서실장을 통해 이순자 여사가 나를 찾았어요. 새세대육영회라는 사회사업을 구상하다가 많은 사람의 추천을 받았다며 자신의 사업을 대신 맡아달라는 요청이었어요. 난 돈을 만지는 게 늘 싫어서 돈을 모아서 하는 일은 못하고 돈이 있으면 하겠다고 해서 받아들였지요. 월급이나 자동차 등을 거절하고 봉사하겠다는 말을 하고 그 사업을 열심히 했는데 나중에 금일봉을 주더군요.


얼마나 받았습니까?

그건 비밀입니다. 가정이 어려운 어린이를 위한 사업을 하며 고충도 많았지만 그게 인연이 되어 전두환 대통령이 또 호출을 해왔어요. 1982년이었어요. 이번에는 자신을 도와달라면서요. 그때 나도 조건을 내걸었지요. 예지원이 일반 여성을 대상으로 예절교육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계획과 교육공간이 필요하다고. 대원정사도 회장께서 별세하시면서 옮겨야할 형편이었던 때인데 예지원 사업이 바로 애국이라면서 그때 자유센터에 시설을 마련하고 일반 여행자를 대상으로 한 소양교육도 맡게 돼 예지원의 발전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해외로 나갈 때 반공 안보교육을 할 때인데 시대적으로 그것보다 국제 예절을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실현된 겁니다.


대통령이 의장이던 평화통일자문회의 부의장도 역임하셨지요?

바로 그때 제의를 받았지요. 내가 질색을 했지만 공식행사가 있을 때는 경찰이 에스코트까지 하더라고요.


그래서 권력 맛을 느끼면 정신을 잃게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난 돈이나 권력은 아주 체질에 안맞아요. 3공화국 때부터 두어 차례 국회의원 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했어요. 인기를 누리는 것은 즐겁지만 무슨 행세를 하는 것은 아주 싫어요. 부담스럽고 불편해요.



이제 예지원에서 어떤 교육을 하고 있는지 소개해주시지요.

다양해서 일일이 열거할 수 없지만 우선 예절과 관련한 모든 분야의 강좌와 체험교육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생활예절에서 복식, 요리, 가정의례, 차생활 예절, 상례, 제례, 혼례, 여행 에티켓, 서식예절, 세시풍속, 언어예절, 우리 가락과 춤 등에서 전통예절에 대한 교양강좌나 문화기행까지 다양하게 프로그램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교육기간도 4개월 과정에서 2년 과정까지 있어요.


전통예절을 나이 든 분들의 고리타분한 이야기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필요성과 진정한 참뜻을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간단히 설명해주신다면?

예절을 가르치는 나 자신도 늘 반성하며 삽니다. 내가 잘났다고 생각하면 아름다운 마음씨가 밖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예절은 한마디로 인간의 품격을 보여주는 바로미터입니다. 인간이 짐승사회와 다른 점은 예절이 있기 때문이죠. 예절을 지키는 사람들의 사회라면 부조리도 없고 범법자도 없고 따뜻하고 평화로운 인간다운 향기만 존재하게 됩니다. 예절은 학문이나 지식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배려와 양보, 공손한 말씨나 겸손에서 비롯됩니다. 우리가 동방예의지국이라는데 지금은 그 말이 고리타분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교육으로 그 정신을 일깨워가야 합니다. 그것보다 더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모습을 표현한 말이 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예절교육에 대한 말이 나오면 강영숙 원장의 표정은 진지하게 변하고 목소리는 힘이 실려 나온다. 경기여고 교사였던 강 원장은 1956년 KBS 공채로 아나운서가 된 후 라디오시대에서 흑백TV, 컬러TV, 민방TV를 거치는 동안 옥구슬 굴러가는 듯이 맑고 청아한 목소리로 방송 아나운서의 간판스타로 사랑을 받았다. 어린이 프로 <누가누가 잘하나> <무엇일까요>는 어린이는 물론 어른들에게도 ‘국민 프로’였다.


“성공시대라지만 퍼펙트한 경우가 어디 있나요? 나도 잘 나갈 때 두 번 잘릴 뻔했어요.”


그런 일도 있었습니까?

MBC의 대표적인 어린이 행사인 <우량아 선발대회>의 진행을 보며 협찬회사인 특정 분유회사의 제품을 소개하기보다 모유를 먹여야 한다는 일종의 캠페인을 하다가 잘릴 뻔 했고 또 한번은 산아제한이다 가족계획이다 난리를 칠 때 자녀를 많이 낳아 해외로 많이 내보내면 결국 국가의 장래에 도움이 된다는 소리를 했다가 국장에게 불려가 사표직전까지 갔었지요. 하하하.


참, 동시대 남자 아나운서의 간판스타였던 임택근 씨의 근황이 궁금합니다.

불행한 일이 있었어요. 지난 4월 진해 벚꽃축제에 초청을 받아 참가하셨다가 급제동에 의한 버스 내 사고로 허리를 크게 다치신 것 같아요. 걱정이에요. 건강을 빨리 회복하셔야할 텐데요.


가족분들의 근황도 소개해주시지요.

우리 남편은 성격이 꼬장꼬장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는 걸 싫어해요. 6대 독자 집안에서 태어난 우리집 아들 삼형제가 바라는 대로 잘 성장해 모두 국내외에서 공부하고 사회활동을 하고 있어요.


부군은 방송사 시절에 연애로 만나셨나요?

공보부장관을 하시던 오재경 씨 중매로 결혼했어요. 그땐 신랑이 종군기자였어요.



끝으로 가정에서 직접 실천하시는 생활예절에 대한 경험담을 듣고 싶습니다.

내 전공이 경영학(연세대대학원) 인사관리랍니다. 그게 별 것 아니고 예절관리 같은 범주에서도 생각할 수 있는 공부죠. 시집가면서 처음 부딪힌 체험 예절은 시어머님이 며느리에게 경어를 쓰신다는 거였어요. 절로 언행이 조심스러웠어요. 그리고 친정을 앞세우면 탈이 나요. 시집에서는 시집 법도를 따라야하는 거고 가족의 인사관리를 잘해야 예의바른 주부가 됩니다. 가족의 인사란 생일이나 각종 개인 기념일을 잘 챙겨주는 일이지요. 나는 사실 내 강의 시간에 내 체험담을 주로 가르쳐요.







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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