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만의 인터뷰-국내 첫 시각장애 교환원 강초경
30년만의 인터뷰-국내 첫 시각장애 교환원 강초경
  • 김두호
  • 승인 2008.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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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을 못 보면 마음에 눈이 생긴다”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1970년대 화제에 올랐던 미담의 주인공들을 다시 만나 현재의 근황을 전해주는 사람 찾기 캠페인시리즈 <인터뷰365>의 <당신을 찾습니다>가 이번에는 국내 첫 시각장애 전화교환원 강초경 씨(53)를 찾았다. 여성의 취업이 어렵던 시절 시각장애인의 새로운 직종 진출에 희망이 됐던 그녀는 지금 국내 첫 안마병원을 운영하며 시각장애인단체를 이끄는 부지런하고 활동적인 리더로 변해 있다.

여전히 천사처럼 착하고 예쁜 소녀 때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그녀의 지난 30년 삶의 역정은 시각장애인으로서의 인고(忍苦)가 따랐지만 하루 두세 시간의 수면을 유지하는 근면의지로 인간 승리의 길을 열어왔다.
시각장애인연합회 서울지부부회장이면서 정부의 시설지원을 받아 국내 처음으로 건립한 시각장애인 복지사업체 두드림안마병원(
www.dodreamhi.com)의 원장으로 살고 있는 강초경 씨와 30년 만에 재회한 기자가 추억을 되살리며 감회어린 인터뷰를 했다.


1978년에 보도된 기사와 사진을 다시 소개하며 지금 어떻게 변했을까 몹시 궁금했습니다. 얼굴 모습은 별로 고생 안하신 것처럼 곱게 보입니다. 30년 전 인터뷰 때를 기억하시는지?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나에게 던진 질문과 인터뷰를 하는 동안 담배를 많이 피웠던 것까지 기억납니다. 당신이 쓴 기사를 오랫동안 기념으로 보관했고요. 화제에 오른 뒤 군인아저씨들로부터 내가 오히려 격려와 위문편지를 많이 받았답니다.

고생을 안한 것처럼 보인다고 하셨는데 가슴 안에 묻힌 것들은 안보일 겁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 몸으로 한 고생보다 마음이 더 고달프고 괴로울 때가 많았어요.


그 옛날 교환원 시절로 돌아가 보시지요. 그때의 전화 통화는 교환원들이 수동으로 코드를 연결해 주는 시대였지요. 시각장애인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주긴 했겠지만 그래도 고충이 따랐을 것 같습니다.

물론이죠. 어디서나 비장애인들 속에서 활동하는 장애인들은 대다수 소외감에서 벗어나지 못했어요. 사회적인 인식도 따뜻하지 못했고 어딜 가나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도 전무했지요. 학교에 다니면서 같은 처지의 친구들 속에 살다가 150여 명의 직원 중 나 혼자 처지가 다르다는 소외감은 그때 가장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럼 첫 직장은 언제 떠났어요?

2년 정도 근무했어요. 단순 기능직이라 비전도 없고 그 직업에 만족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시력을 잃게 되면 손의 감각을 통한 촉감이 시각 구실을 겸해 아주 예민하게 변하는 것 같아요. 저절로 손을 통한 침술과 지압 등 치료 기능이 생겨 직원들이 어디가 아프면 나에게 매달렸어요. 결국 내 스스로 나에게 비장애인이 같지 못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그 길을 자연스럽게 택할 수밖에 없었지요. 안마 일은 시각장애인에게 천직 같아요.


그로부터 전문 안마사가 된 것인가요?

사실 나는 내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잊을 때가 많아요. 무엇을 하고 싶은 꿈이 마음속에 피어오를 때 더욱 그러합니다. 아버지처럼 선생님이 되고 싶었고 안마사는 원하던 꿈이 아니었지만 한 동안 안마일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 일로 인정을 받아 재산도 제법 모으면서 사업으로 눈을 돌렸지요.




참, 30년 전 인터뷰할 때 당신은 지극정성으로 딸을 보살피며 사셨던 아버지 이야기부터 시작하며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그때 당신은 “아빠, 오늘은 왜 이렇게 꼬옥 껴안느냐고 했더니 아빠는 말을 않고 자꾸 내 얼굴을 부비기만 하셨어요. 나는 그냥 팔짝팔짝 뛰기만 했는데 얼마 후 내 볼까지 축축해지더라구요. 아빠가 울고 계신거죠.”라고 말했어요. 그 아버지와 또 어머니의 근황도 전해주시죠.

아버지는 덕수중학교 선생님이셨지요. 내가 어릴 때 녹내장으로 점점 시력을 잃어가자 나를 안고 병원을 전전하시며 10여 차례 수술을 받았으나 어느 날 더 이상 시력을 회복할 수 없다는 시각상실 판정을 내리자 딸을 품에 안고 소리 없이 우셨던 건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때의 기억이 뇌리에 충격으로 박혀 있었어요.

아버지는 다른 중학교에 가셨다가 다시 덕수중학교 교감으로 가셔서 정년퇴임하신 후 지금 84세로 건강하게 살고 계세요. 어머니는 4년 전 돌아가시고. 나는 언젠가 아버님께 나 때문에 교장도 못하시고 그만두신 것 미안하다는 긴 참회의 글로 위로를 드렸어요. 글이 말보다 더 진지하게 전달되잖아요. 안마사로 일할 때도 아버지는 학교일을 제쳐두고 딸의 출퇴근을 챙기셨어요. 내가 혼자 다닐 수 있다고 화를 내면 몰래 뒤를 따라 안전을 확인하고 곁을 떠나셨죠. 지난 2002년 모교인 서울맹아학교 90주년 기념행사에서 교장이 아버지께 ‘자랑스런 학부모상’을 주셔서 많이 위안을 받았습니다. 나는 모교의 총동문회부회장도 맡고 있어요.


안마사로 일하다가 사업을 했다는 데 어떤 사업을 하셨어요?

하루 서너 시간을 잠자며 열심히 일해 호텔도 경영하고 또 대학에서 사회복지학과 아동복지학을 전공해 맺힌 숙원도 풀었어요. 고교를 졸업할 무렵 3년간 점자로 입시 준비를 해 대학에 진학하려했지만 가까운 서울의 어느 대학도 시각장애인을 받아줄 교육시스템이 없었어요. 그래서 늘 한이 됐는데 늦게나마 졸업을 하고 시각장애인을 위한 복지나 봉사 사업에 나의 후반 인생을 걸게 됐어요.

지금 이 4층짜리 안마병원도 국내 처음으로 보건복지부의 시설 지원을 받아 내가 회장을 맡고 있는 시각장애인연합회 서울강남지회의 부대사업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내 개인 투자로 적자를 메우고 있지만 점점 매출이 좋아지고 있어요.


결혼과 관련된 개인의 신상을 알고 싶군요.

하하하. 연하의 남자와 결혼해 불만 없이 살고 있어요. 우리 형제 중 딸은 나 혼자고 남동생이 둘인데 남편은 내 동생 친구로 나를 오래전부터 잘 알던 사람이라 마음 편하게 결혼해 함께 사업을 하기도 하며 살아왔어요. 아기는 의사의 진단으로 이상이 없다고 하지만 낳지 못했어요.



얼마 전 서울 마포대교를 지나다가 여러 번 시각장애인들의 시위 현장을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한강에 투신 시위까지 할 정도로 절박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요?

안마사의 직업활동을 시각장애인에게만 부여한 것이 흔들리면서 시각장애인들이 목숨을 걸고 생존투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알기로는 평소 안마치료를 좋아하는 박정희 대통령이 지방에 내려갈 때마다 받는 단골 안마사에게 도와줄 것이 무엇인가를 묻자 안마를 시각장애인들만이 할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는 건의를 해 그것이 대통령의 지시로 시행됐던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법률적인 근거가 약해 헌법 소원에서 위법으로 나와 그런 시위를 하게 됐지만 다시 법률로 명시되자 또 비장애인 측에서 헌법 소원을 해 계류중에 있어요. 우리 시각장애인들의 처지에서는 물러설 수 없는 생존투쟁이지만 지금 스포츠마사지라는 이름으로 어디서나 간판을 달아 안마사의 기능이 과거와 달리 전문성을 잃어버렸어요.


깜박 잊고 있었습니다. 인터뷰365의 <당신을 찾습니다> 기사가 나간 직후 당신의 근황에 대한 제보를 받았는데 그 기사를 직접 접하고 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지금이 디지털시대 아닙니까? 시각장애인용 컴퓨터와 프로그램이 있어서 소리로 인터넷과 통할 수 있고 점자로 변환시켜 읽을 수도 있어요.


30년 전 당신이 했던 말 중에 매우 의미있게 던진 말이 있습니다. “시력을 잃은 강영우 씨가 미국에 가서 공부해 철학박사가 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참 기뻤어요. 헬렌 켈러도 훌륭하고 그녀를 가르친 설리반 선생도 훌륭하지만 그보다 훌륭한 것은 그런 분들을 키워낸 미국의 사회와 교육환경이라고 생각해요”라는 마지막 한마디인데 기억나세요?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하지 않고 있어요. 강영우 박사는 그후 재미동포 공직자 중에 가장 고위직에 올랐다는 뉴스도 많이 접했어요. 지금은 장애인들을 위한 복지문제나 시설 등이 예전과 비교 안 될 만큼 발전했지만 과거에는 난감하고 기막힌 일이 한두 가지가 이니었지요.


요즘 우울한 일도 많이 생기고 특히 연예인들이 스스로 생명을 저버리는 사건도 잇달아 일어납니다. 멀쩡하게 건강한 사람들이 왜 그런 좌절과 절망에 빠지고 고민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건강한 사람도 언제 어디서 장애자가 될지 모르는 시대입니다. 행복과 위기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고 공존한다고 봅니다. 행복한 사람도 잠깐 사이에 불행해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우린 살기가 좋아지면서 고민을 극복하는 의지들이 박약해 진 것 같아요. 특히 젊은이들은 정신도 약하고 몸도 약해졌어요. 우리 안마병원에는 젊은이들이 많이 오는데 몸을 만져보면 운동부족에 심신이 모두 망가져 있는 경우가 많아요. 낮에는 자고 밤에 일하는 야행성 생활은 식사부터 수면, 활동까지 규칙적인 리듬이 유지될 수가 없지요. 평생 신체 기능의 불편을 안고 살면서도 그것을 불행으로 생각지 않고 굳굳하게 살아가는 장애인들을 생각하면 하찮은 고민들로 실의에 빠지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녀는 꼭 해야 할 말만을 했다. 대답 속에는 분명한 소신과 자신의 체험을 통해 얻은 지혜들이 스며 있었다. 육체의 눈은 비록 캄캄한 암흑을 그녀에게 안겨주었지만 마음의 눈은 맑고 여전히 신선한 광채를 지니고 있었다. 국내 시각장애인 1호 전화교환원 강초경 양을 30여 년이 지나 사회 지도층 인사가 된 강초경 여사로 다시 만나 인터뷰한 시간이 기자에게는 묘한 보람을 느끼게 했다.

[인터뷰이 나우] 강초경 서울맹학교(교장 이유훈) 동창회장은 10월 1일 서울 종로구 신교동 서울맹학교에서 재학생과 학부모, 동문과 지역 주민 등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유서 깊은 맹학교 100주년 기념행사에 동문대표로 참석했다.


맹학교는 100년 전인 1913년 4월 1일 우리나라 최초의 관립특수교육기관인 ‘제생원맹아부’로 창립되어 2013년 현재까지 시각장애교육의 대표적인 교육기관으로 발전해 왔다.


이날 기념행사에서는 정부 포상 및 공로패 전달, 내빈 축사, 재학생의 비전 선포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특히 행사 중 유, 초,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재활과정 및 전공과 등 6개 과정 재학생들의 다양한 솜씨자랑 축하 공연이 참석자들의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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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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