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가 돌아왔다' 가수 전영록
'오빠가 돌아왔다' 가수 전영록
  • 조현진
  • 승인 2007.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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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만에 귀환한 최고의 하이틴 스타 / 조현진




[인터뷰365 조현진]
오빠가 돌아왔다. 공식적으로 말한다고 해도 거의 15년 만이다. 그는 최고의 하이틴 스타였다. 그는 최고의 가수였다. 그는 최고의 작곡가였을 뿐 아니라, 최고의 MC, 최고의 DJ였다. 배우로서도 그는 정상의 자리에 서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서태지와 HOT가 등장하기 한참 이전부터 조용필과 함께 우리나라 연예 사상 최초의 ‘오빠’였다.


어느 날 그는 사라졌었다. 단언컨대 인기가 떨어져서 수명이 다한 배터리 마냥 없어진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그냥 사라져버린 것이다. 누구는 전처인 이미영과의 이혼이 이유라고 말했고, 갑자기 너무 살이 쪄서 심한 우울증이 걸렸다는 기사도 읽히곤 했다. 그러면서 전영록의 자리는 다른 가수, 다른 배우, 다른 작곡가, 다른 MC, DJ의 차지가 되었다. 90년대 중반이었다.


분당의 스타벅스에서 전영록을 기다리면서 나는 시간이 전영록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을까 궁금했다. 전영록이 들어왔다. 이런.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온건가? 믿을 수 없을 만큼 전영록은 그대로였다. 50대 중반이라는 물리적인 나이가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깨끗한 피부와 맑은 목소리, 뿔테 안경너머로 보이는 호기심 가득한 두 눈은 바로 그때, 그 전영록이었다. 새로 시작할 방송을 위해 새로 했다는 ‘오대수 파마’ 덕분에 도리어 그는 예전보다 더 어려 보이기까지 했다. 시간의 벽은 그렇게 허물어졌다.



그 헤어스타일도 잘 어울린다.

잘 어울린다고? 정말? 난 아주 이상하다. 어제 미장원에서 한 건데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 보고 깜짝 놀랐다. 인권이(전인권)가 거울에 나오길래. 하하.


나는 머리보다 그 말이 더 웃긴다. 인권이 하는게...누가 봐도 전인권보다 10살은 어려 보이는데.

동갑이다. 이홍렬이도 나랑 동갑이고.


어머니(가수 백설희씨) 건강은 어떠신가?

아주 좋으시다. 여전히 목소리가 쩌렁쩌렁 하시지. 하여간 타고난 가수라니까.


정말이지 너무 만나고 싶었다. 도대체 그 동안 뭘 한 건가?

그러게 말이다. 그 질문 분명히 할 것 같아서 뭐라고 대답할까 생각했는데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내가 여기 분당에 제법 살았는데 아직도 어디가 어딘지 길을 잘 모른다. 그래서 잘 안돌아 다니지. 집 잊어버릴까봐. 그래서 어디 안다니고 틀어박혀서 곡만 쓰고 지냈다. 시간관념이 별로 없어서 그렇게 오래 되었는 줄 몰랐고. 좋은 곡을 쓸때 까지 도 닦는 마음으로 작업한 거지. 십여년 만에 이제 만족할 만한 앨범 하나 낼 정도 곡이 써졌다.


쉼이 너무 기니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왜 그럴까 하고 아주 궁금해 했었다.

그러게. 사람들이 내가 완전히 은퇴한 줄 알았다더라. 그런데 얼마 전 토크쇼 프로그램에서 몇 번 나와 달라고 해서 나갔다가 그게 계기가 된거다. 근데 참 신기하지? 쇼 프로 나가니까 다들 전화 와서 바로 ‘영화하냐? 음반내냐?’ 하더라. 좀 어의가 없었지.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다시 보이니까 무슨 목적을 숨기고 나온다고 생각하더라. 그런게 아닌데. 그래서 다시는 안나간다 결심하고. 또 곡이나 써야지 하고 있는데, 하룡이(임하룡) 형이 전화 왔더라고. ‘난데... 재밌는 드라마 있는데 같이하자...야’ 그래서 ‘그래. 하자’ 한 거다. 좋아하는 형이 재밌다는데 해야 할 것 같아서. 조연이지만 꼭 내가 해야 하는 역할이다. 그리고 이젠 이런 일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도 들고.


그래. 그 이야기부터 하자. 전영록의 방송 복귀작 <미스터 킹 밴드>어떤 작품인가?

주철환 PD가 사장으로 가면서 새로 개국하는 인천방송(OBS)의 개국특별기획이다. 8부작 드라마니까 영화4편 분량이다. 공교롭게도 내 마지막 방송작품이 SBS의 개국특집극이었다. 이게 재미난 기획인데 8명의 영화감독들이 미니시리즈 하나씩을 맡아서 찍는 거다. <미스터 킹 밴드>는 <6월의 일기>만들었던 임경수 감독이 연출하지. 다음 주부터 촬영들어가고 11월에 방송될 예정이다.



어떤 줄거리고, 당신은 어떤 역할인가?

나는 이 헤어스타일이 말해주듯이 도 닦고 공중부양 하는 사람처럼 나온다.(웃음) 이야기는 김명국, 임하룡, <품바>하던 정규수, 나 이렇게 4명이 고등학교 때 스쿨밴드를 함께하던 친한 친구사이다. 그러다가 나중에 나빼고 셋이 아주 나쁜 사채업자들이 되고 친구중 하나가 돈을 들고 튄다. 그래서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어서 노숙자처럼 변한 친구들이 그 놈 잡으려고 지방을 다니다가 날 만나게 되고. 우리는 완전히 거지밴드가 되어서 공연하면서 ‘나쁜 친구 찾아 삼만리’ 하는 로드무비다. 공연하고 망하면 도망가고 그런 식인데 재미있다. 김청도 나온다.


잘 했다. 전영록. 잘 유혹했다. 임하룡. 배우로써의 전영록을 먼저 이야기 하자면 그는 분명히 충무로의 귀중한 자산이다. 전설적인 성격파배우였던 아버지 황해(2005년 작고)의 후광이 아니라 전영록 스스로 70년대의 하이틴 스타, 80년대의 액션스타로서 충무로에 분명한 자리를 만들었었다. <너무너무 좋은거야><말해버릴까><푸른교실>등의 작품을 통해 얄개영화의 전성시대를 연 그는 <모모는 철부지><달려라 풍선><오달자의 봄><대학얄개>등으로 ‘영원한 대학생’의 이미지를 완성한다. 이두용감독과 함께 3편까지 만들었던 <돌아이>시리즈는 당시 <람보>시리즈와 흥행에서 맞불을 붙일 만큼 대단했었다.


당신의 복귀가 가장 반가운 쪽은 아무래도 충무로일 것이다. 천호진, 백윤식이 재발견 되듯이 말이다. 당신은 충무로의 귀한 자산이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시나리오를 보내주겠지. 그런데 그 말이 맞다. 충무로의 값어치 있는 자산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충무로가 부르면 가야한다고는 생각한다. 이 책임감으로 이제 좀 더 열심히 할 거다. 나는 원래 재고 그러는 게 없다. OK와 NO밖에 없다. 재밌으면 한다. 사실 방송이나 음악보다는 충무로에 더 미안하다. 너무 오랬동안 떠나있었으니까. 영화는 92년에 최인현감독이 만드신 <친구야 친구야>가 마지막이었다. 그런데 이 영화도 그때 운동권영화로 낙인찍혀 제대로 개봉도 못했다. 그런데 그거 아나? 그 영화에서 고소영이 내 여동생으로 데뷔 한거다.


나이에 대해서 예민한 편인가?

나이를 먹는게 즐겁지는 않지. 이젠 누가 나한테 말할 때 ‘왕년에...’ 뭐 이런 식으로 말하면 참 싫다. 왕년이란 말은 시간을 딱 끊어버리고 단절시키는 거니까... 그런식으로 표현하지 말고 앤틱이다...클래식이다 해줘야지. 우선 언론부터 그렇게 다뤄줘야 한다. 언론이 그런 걸 안 도와주니, 사실 요즘 후배들의 인기 생명이 짧은 거다. 선배들이 물러나면 명예가 남아야 하는데 그게 영예롭지 않으니까 길게 보지 못하는 거다. 긴게 뭔지도 모르고. 그런 상황을 자연스럽게 만들어줘야 젊은 애들도 오래 가는건데.


인터넷은 할 줄 아나?

아니. 난 컴맹이다. 댓글이 뭐고 낚시질이 뭔지도 최근에 알았다. 그런데 후배들 보니까 거기에 올라오는 글에 일희일비하고 목 메다는 녀석들이 많다더라. 나 원 참.



분명히 이제 하나의 문화코드니까.

문화이긴 한데 너무 자극적이라는게 문제지. 참 그 말 잘했다. 요즘 학력문제 때문에 시끄럽지 않은가? 난 중대 연극영화과 2학년 중퇴다. 맨날 술 취해서 학교 분수대 옆에서 자고 그러니까 당시 날 지도하던 양광남 교수님이 아버지한테 전화 걸어서 당신 아들 문제 많으니 데리고 가라고 하셨다. 아버지가 얼마나 나에게 실망하셨는지 모른다. 나는 그 날 이후 학교 못 갔다. 흑석동 근처에도 못가게 하셨다. 우리 아버지는 그런 분이셨다. 그때 나는 아버지가 배우로서 가진 프라이드가 얼마나 강한 건지를 깨달았다. 내가 그 자존심에 흠집을 낸 것이다. 난 그때 술을 끊었고 아직까지 안 마신다. 그래서 난 학교 졸업했다고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아버지 가슴에 대못을 박은 사건인데, 그걸 어떻게 바꿔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난 중앙대 중퇴인데 얼마 전에 매니져에게 확인해보라고 했더니 포탈사이트에 학사라고 써져있다더라. 연락해서 좀 고쳐달라고 말해줘라.


알았다. 꼭 전하겠다. 그리고 이 인터뷰 기사를 보면 사람들이 진실이 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어쩌면 ‘전영록 학력의혹’이라고 검색어 1위가 될런지도 모른다.

제발 그런 일이 없으면 좋겠다. 정말 인터넷이란 거 요지경이다.

하긴 이번에 학력문제를 보면서 나도 미디어 쪽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지만 좀 착잡하기도 하다.

연예계는 단순하다. 실력 있는 사람이 올라가 최고가 되는 거다. 왜 그런걸 따질까? 배우를 학력보고 사랑 한 건가? 아니지 않나. 물론 거짓말을 한건 잘못이다. 하지만 그 하나의 ‘깜’을 언론이 너무 확대해버리고 안 좋은 쪽으로만 몰아가면서 미디어가 역기능을 만드는 거다. 잘못했습니다. 해도 끝내려고 하지 않으니까. 자극만 있고 실제로는 대화나 토론이 없는 거다. 그래서 난 잘 모르지만 인터넷을 무서운 놈이라고 생각한다.
전인권이 내 친군데 며칠 전 수갑 차고 나온 거 보니까 완전히 악마를 만들어 놓았더라. 물론 잘못은 했지만 한때 우상이었던 스타가 실체는 저 꼴이란다 하는 듯이 말하는 기사를 보면서는 화가 좀 나더라. 하룡이 형이 며칠 전 전화가 왔다. 심형래하고 같이 인터뷰하라고 하길래 우리가 옛날에 같이 개그맨이었지만 이젠 감독과 배우입장이니까 인터뷰 안하는 게 좋겠다고 했더니 <심형래, 임하룡 우리는 가는 길이 다르다!>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나왔다더라. 이건 아니지 않나?




전영록은 조용필과 함께 최초의 ‘오빠부대의 부대장’이었다. 이 오빠부대라는 말은 어느 가수는 좋아하고, 어느 가수는 싫어한다는 형태로 이어졌다. 그전까진 나훈아와 남진의 팬을 구분할 수 없었던 것과 달리, 조용필팬, 전영록팬, 이선희팬, 이용팬등으로 80년대 초중반, 가수의 팬클럽은 태동기를 맞는다.



원조 팬클럽의 오빠인데... 그때랑 지금 가수들 팬클럽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그때와 지금은 아주 다르다. 그땐 말 그대로 팬들 스스로가 팬클럽을 만든 거고, 스타를 만든 거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기획사가 만들었다가 버린다. 스타도 그렇고, 팬도 그렇고. 그러니까 팬들에게도 비극이지. 스타를 한번 쓰고 버리는 상품처럼 생각하니까. 요즘 보면 예쁘고, 끼 있는 애들이 참 많다. 그리고 금방 스타가 되지. 그런데 그 이상을 어떻게 넘는지를 모른다. 그러니까 30대로 넘어가면서 나이 먹고, 설 자리가 줄어드니까 자살하고 그러는 거 아닌가? 난 이게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연예계의 구조가 만든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아요>의 양수경이나 <바람아 멈추어다오>이지연 등의 가수들을 발굴할 때가 있었다. 그런 활동은 이제 안하나?

그때도 뭐 직접 그 친구들을 매니지먼트 한건 아니다. 내 곡을 필요로 해서 준 거고, 내가 직접 부르는 것 보단 그 친구들이랑 잘 어울려서 히트를 한 거지. 지난 십 여년 간 아무에게도 곡을 안주다가, 오랜만에 김혜림한테 <어쩌면 좋아>라는 곡을 하나 만들어 줬었다. 그랬더니 얼마 전에 ‘린’이라는 친구가 찾아왔다. 아주 노래를 잘 하는 가수다. 내가 볼땐 ‘J, 화요비, 린’ 이 셋이 지금 한국의 3대 R&B의 디바다. 린이 ‘선생님 저요...얼마 전에 김혜림씨 노래 만들어주셨죠?... 저도 하나만 만들어 주세요.’ 하더라. 그래서 어떤 노래를 하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심수봉 스타일의 트로트하고 싶어요... 곡 주시고 디렉팅 해주세요.’ 하더라. 난 아주 기분이 좋았다. 얘가 뭔가 깬 애더라. 가수는 그런 거다. 어떤 세대에 머물면 한계가 있다. 늘 다른 세대로의 크로스오버를 시도해야 하고, 그런 마인드를 가진 친구들이 성공한다. 나나 용필이형이나 사실 얼마나 많은 장르를 넘나들었는데. 린이에게 얼마 던지 써준다고 했다.



그렇다. 당신은 장르를 앞서갔고, 사실은 시대를 앞서갔다고도 생각한다. <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아요> <종이학><내 사랑 울보><나를 잊지 말아요><그대 우나봐>등 지금 젊은 가수들이 리메이크를 하는 노래 중에 가장 많은 곡이 당신 것이다. 다른 가수들에게선 한 두곡 리메이크가 나오는데 당신은 거의 모든 발표곡이 리메이크 된다. 아직도 대중과 트랜드가 맞으니까 그런 것 일 텐데.

트랜드를 맞추기 보다는 남들이 안 하는 게 뭘까 를 늘 고민했었다. 사실 내 인생이 그렇다. 남들은 뭐라고 해도 한국최고의 연기자인 아버지와 한국최고의 가수인 어머니가 내게는 있었다. 이 말은 내가 정통으로는 평생을 해도 그 분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좌절감 같은 것이기도 했다. DJ, MC도 그래서 한 거다. 이 어른들이 못하고 전영록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기 위해서 말이다. 내 창법이나 곡을 만드는 스타일도 어쩌면 그런 구조에서 나온 것이다. 한국 최초로 도너츠 판을 만든 게 나다. 그리고 요즘은 누구나 다 하는 데모테이프도 내가 처음 시도해봤다. 신곡을 팬들에게 먼저 데모로 나눠주니까 첫 방송에서 팬들이 다 따라 불렀다. 다른 가수랑 PD가 깜짝 놀랐지. 그 다음부터 데모테이프는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은 거고. 이런 식 인거다. 변칙은 아닌 거지?


하하. 물론이다. 얼마 전에 <종이학>이 라디오 방송에서 나오더라. 곡이 끝났는데 어느 팬이 인터넷에 ‘이곡 누구노래냐?’하는 질문을 올렸다더라. DJ가 웃으면서 ‘아... 이젠 전영록을 모르는 팬들이 있구나.’하면서 웃던데.

세대가 변하니까. 아마 요즘 젊은 친구들은 <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아요>를 마야의 노래로 알지도 모른다. 며칠 전 방송을 보니까 드라마 <칼잡이 오수정>의 테마로 나오더군. 내 노래들이 아직도 사랑받는 진짜 이유는 고마운 후배가수들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헌정앨범을 두 번이나 받았다. 20주년에 한번, 30주년에 한번. 그때 최고로 인기 있는 젊은 가수들이 내 노래를 부르니까 다시 화제가 되고 그런 거다. 고맙지.



가족이야기를 좀 해보자. 당신은 대표적인 연예인 2세다. 요즘이야 연예인 2세들이 하도 많이 나오니까 뉴스거리가 안 될 정도다. 게다가 얼마 전엔 준비도 안 된 연예인 2세 하나가 방송에 나왔다가 네티즌들에게 한참 두들겨 맞기도 했다. 이런 문제는 어떻게 보는가?

난 우리 부모가 연예인 이라는 것이 이제는 고맙다. 하지만 어릴 땐 아니었다. 우리 부모는 계속 못나가게 날 눌렀다. 그런데 그 이유가 뭔 줄 아나? 자식에게 까지 대물림 해서 고생시키기 싫다는 생각이셔서 연예계에 내보내지 않는 게 아니라, 이 놈이 누구 아들입네 하고 나갔다가 부모 망신시키면 어쩌나 하는 우려가 더 크셨던 것이다. 나는 늘 그런 스트레스 속에 살았다. 내가 자칫 우리 부모 망신시키면 안 된다는 걱정 말이다. 그러니까 이것저것 관리가 스스로 된 거다. 내가 볼 때 요즘 2세들은 부모가 너무 밀어주니까 문제가 되는 거다. 이게 최종적으로는 아이들을 죽이는 거다. 아까도 말했지만 연예계는 누가 밀어준다고 되는 게 아니다. 어느 지점까지는 가겠지만 그 이상은 대중이 밀어주지 않으면 절대 안 된다. 그런데 대중의 자리에 부모가 서있다면 대중이 그 연예인을 어떻게 밀어줄 수 있단 말인가?


바른 시각이라고 판단한다. 그런데 정말 아버지(영화배우 고 황해)가 그렇게 심하게 반대하셨나? 그리고 당신은 배우,가수,MC등 하도 다양한 활동을 했기에 연혁 정리가 쉽지 않은데 어떻게 데뷔를 헤서 오늘까지 온 건지 좀 순서적으로 정리를 해 달라.

가장 처음은 노래다. 중앙대학교 다니면서 <드래곤스>라는 그룹의 헬퍼로 시작했다. 악기 대신 들고 따라 다니고 그러면서. 지금 들으면 야구팀도 아니고 좀 웃긴 이름이지만 <드래곤스>는 당시에 날리던 그룹이다. ‘김갑춘’이란 형이 리더였는데 이 형이 나중에 <터질거예요>를 히트시킨 <김씨네>가 되는 거다. 그 <드래곤스>연습실에서 노래배우며 따라다니길 72년도부터 군대 갈 때 까지 5년간 했다. 그러면서 통기타 들고 광교, 무교동에 나가서 가수들 펑크 나면 대신 노래하는 걸로 시작했다. 광교에 <태평양>이란 곳에서 시작하다가 그 옆에 이종환 씨가 하시는 <셀부르>로 옮겨 갔었고, 그러다가 결국 70년대 가수들이라면 누구나 서고 싶던 무대인 명동 에 드디어 들어간 거다. 여기서 처음엔 <가는 세월>부른 서유석씨 모창을 내가 했었다. 그러다가 내 순서 맡게 되고. 양희은씨 다음 순서였다. 그래서 희은이 누나 때문에 양희경이랑 친구도 되고 그랬다. 그때 희경이는 노래를 아주 잘 했을 뿐 아니라, 짤록한 허리에다가 기타를 무사처럼 어깨에 매고 다녔는데 진짜 섹시했었다. 하하.


그럼, 방송이나 영화는?

방송은 73년도에 MBC에서 <제3교실>이라는 드라마가 준비되었는데 이게 <대장금>만든 이병훈 PD 작품이었다. MBC가 정동(현재 경향신문사 자리)에 있을 때인데 그 앞 다방에서 아버지랑 같이 송재호씨 만나다가 송재호씨가 ‘너 드라마 나가라.’ 하더라고. 그런데 아버지가 이 놈 지금 가수한다는 것도 머리아파 죽겠는데 배우는 절대로 안 된다고 하셨다. 그런데 그 날 우리 옆에 우연히 앉아있던 <주간경향>의 이상벽 기자 (현 방송인)가 그 모습보고 ‘영화배우 황해아들 전영록 탈렌트 데뷔’라는 기사를 쓴 거다. 그래서 얼레불레 <제3교실>출연하게 되면서 배우가 된 거지. 진유영, 손창호, 이계인이 나랑 같이 데뷔한 사람들이다.



영화는 원래 배우가 될 생각은 전혀 하질 못했고, 75년도에 <화천공사>라는 당시 좋은 영화 만드는 회사에 영화음악을 해보려고 찾아갔었다. 그런데 거기 있는 분이 날 보고 ‘너 참 어리버리 하게 생겼다.’ 하시면서 최인호씨 원작인 <내 마음의 풍차>에 정신박약아로 캐스팅 해버린 거다. 그 분이 바로 우리나라 하이틴 영화의 대부가 되는 김응천 감독이다. 김응천 감독은 우리 아버지가 황해인줄도 몰랐고, 그 영화 개봉할 때 까지 우리 아버지도 내가 영화하는 줄 모르셨다. 그 다음에 김응천 감독이랑 하이틴 영화들 몇 개 하다가 군대 가게 된 거지. 군대 갔다 와서는 <대학얄개> 시리즈를 또 한 거고. 영화로 착한 대학생 이미지를 얻었고, 마침 대학문화가 활발해지다 보니 DJ, MC자리들이 생긴 거다.


부모의 적극적인(?) 반대. 부모를 넘어설 수 없다는 좌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힘으로 열고 싶은 미래. 분명히 시대는 새로운 스타를 찾고 있었고, 전영록은 매니져도 없이 ‘돌아이’처럼 그 시대와 충돌해 나가며 자신의 시대를 시작했었다. 그리고 80년 중반, 그는 가수로써 ‘조용필’이라는 큰 벽과 마주선다.




조용필과 전영록. 4살 터울인 이 둘은 80년대 초중반 한국 가요계의 양대 축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용, 이선희, 김수철, 김범룡 등이 등장했지만 누구도 이 둘을 위협할 정도의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흥미로운 것은 조용필은 가수로써의 외길만을 걸었던 것에 비해, 영화와 DJ등의 빈번한 ‘외도(?)’를 멈추지 않았던 전영록이 조용필의 상대 아이콘이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조용필 Vs 전영록. 이 문제를 한번 이야기해보자. 실체가 있었던 일인가? 아니면 언론이 그렇게 싸움을 만들어 간 건가?

글쎄. 조용필은 나에게 좋은 형이다. 나는 정말로 ‘형’이라고만 생각하고 지냈는데... 언제부턴가 용필이 형이 날 되게 신경 쓰는 것 같더라. 그래서 한번은 물어봤다. ‘형 왜 그래?’ 했더니 ‘난 너 부러워.’ 하더라고. ‘왜?’ 그랬더니 자기도 영화하고 싶은데 안 불러준다고. 하하.


하하. 정말?

그런데 용필이 형이 영화 안했던 게 아니다. ‘형, <창밖의 여자> 영화했잖아’ 라고 했더니 ‘망했잖아.’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하는 거 중에서 형은 뭘 제일하고 싶은데?’ 했더니 MC랑 DJ해보고 싶다고 하더라고. 우리 둘은 그런 거다. 라이벌? 그런 생각은 가져본 적도 없다.


당신 둘은 그런 게 아니었어도 팬들은 아주 서로에게 날카로웠었는데.

사실 지금 와서 말이지만 조용필 팬들이 아니라, 이용 팬들이 극단적이었다. 그때 이용이 조금 불미스러운 일로 미국에 가게 되었었는데 그걸 MBC <토토즐(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이 특종을 한 거다. 그 방송 나갔더니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이덕화랑, 전영록이랑 죽여야 된다... 뭐 그렇게 불똥이 튀더라고.


왜?

몰라. 근데 그 걸로 한참 시끄러웠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날 <토토즐> 나와서 노래 한곡 부른 거 밖에 없는데. 서태지 데뷔할 때 방송에서 평 한것도 잘못 와전 되어서 나보고 죽일 놈 하질 않나... 날 보면 막 싸우고 싶은 투쟁심이 생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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