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덕 교수와 작가 정비석의 ‘자유부인’ 논쟁
황산덕 교수와 작가 정비석의 ‘자유부인’ 논쟁
  • 김다인
  • 승인 2008.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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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50만명에 해당되는 이적행위’라 비난 / 김다인



[인터뷰365 김다인] 내달 2일부터 열리는 제13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영화 <자유부인>이 상영된다고 한다. 옛 필름을 디지털로 복원해 상영한다고 하니 선명한 화질로 1950년대 문제작을 볼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자유부인>은 1956년부터 1986년까지 무려 다섯 번이나 리메이크돼 ‘자유부인 신드롬’을 일으켰던 화제의 영화다. <운명의 손>에서 최초의 키스신을 영화에 넣었던 한형모 감독이 정비석 원작 박암 김정림 주연의 오리지널 <자유부인>을 1956년 만든 이래 1957년 역시 김정림 주연의 <속 자유부인>, 1969년 김진규 김지미 주연의 <자유부인>, 1981년 최무룡 윤정희 주연의 <자유부인>에 이어 1986년에는 최무룡 이수진 주연의 <자유부인 2>가, 1990년에는 고두심 강석우 주연으로 <1990 자유부인>이 제작됐다.

1956년작 <자유부인>은 영화 자체도 사회적 이슈가 됐지만 원작도 논란의 쟁점이 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영화의 원작은 작가 정비석이 1954년 1월1일부터 8월6일까지 215회 동안 서울신문에 연재한 것이다. 이 연재소설은 70회 정도를 넘어가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신문사나 작가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인기였다.

대학교수의 부인인 오선영 여사가 대학생과 춤바람이 나고 탈선행각을 저지르다가 결국은 남편의 용서로 다시 집에 돌아온다는 내용의 이 소설은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일으켰다.

1954년이면 한국전쟁이 끝나고 사회가 점차 안정을 되찾아가던 시기였다. 하지만 여성들은 전쟁을 겪으며 변화했다. 전쟁통에 아이를 들쳐업고 전선에 나간 남편 대신 생계를 이끌었던 여성들은 전쟁이 끝나자 예전과 같아질 수는 없었다. 지금처럼 활발하지는 않고 미미했지만, 직업전선에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남편의 울타리를 벗어나 독립적인 개체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계바람이나 춤바람이 일기 시작한 것도 이같은 독립성의 음성적인 면이라 할 수 있다.



오선영 여사는 이같이 변화된 사회상으로 태어난 인물이다. 남편이 교수인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양품점을 경영하면서 탈선이 시작된 것이다. 오선영 여사의 탈선이 본격화될 때 연재소설의 독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논란이 점화됐다.

시작은 주로 남성 독자들이 신문사나 작가 집에는 비도덕적 비윤리적 소설의 연재를 당장 그만두라고 빗발치는 항의를 한 것이었다. 특히 남편의 직업이 대학교수인 것에 대해서도 지식인층의 비난이 들끓었다.

하지만 정작 사회적 이슈가 되기 시작한 것은 당시 서울대 교수로 재직중이던 저명한 법학자 황산덕 박사가 공개적으로 비난을 가했을 때부터였다. 국내 최초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황산덕 교수는 형법학 법철학계의 큰 별로 후에 문교부, 법무부 장관을 지낸 바 있다.

황교수는 서울대에서 발행하는 대학신문 1954년 3월 1일자 ‘자유부인 작가에게 보내는 글’이라는 제하에 ‘갖은 재롱을 부려가며 대학교수를 모욕하고 있다’는 내용의 기고를 하면서 왁자지껄했던 자유부인 논쟁의 포문을 열었다.

이에 작가 정비석은 3월 11일 서울신문에 ‘교수답지 않게 감정적으로 흥분한다’고며 반박글을 썼고, 다시 황교수는 ‘문화의 적, 문학 파괴자, 중공군 50만명에 해당하는 적’이라고 몰아붙였다.

여기에 홍순엽 변호사가 작가를 옹호하는 기고문을 다시 발표하고 또 문학평론가 백철이 ‘신문소설의 대중성과 예술성 문제’를 거론, 이때부터 문단에서 신문소설의 윤리성과 창작의 자유 논쟁으로 이어졌다.

작가가 아무리 ‘춤바람을 경고하는 의미였고 대학교수를 모독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항변을 해도 각계에서 들어오는 뭇매를 피할 도리가 없었다.

여성단체에서는 여성을 모독했다 해서 작가를 고발했고, 소설 내용 중에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계 재계의 비리를 폭로했다 해서 관련인사들이 '북괴의 사주를 받은 이적소설‘이라고 당국에 투서하는 지경까지 사태가 확대됐다.

신문지면에 연재된 통속소설을 두고 ‘이적’으로까지 표현한 것은, 당시 북한에서 이 소설에 묘사된 내용을 가지고 ‘남한은 지금 이렇게 속속들이 썩어가고 있다’는 선전공세를 폈기 때문이다. 황산덕교수가 표현한 ‘중공군 50만명에 이르는 이적행위’란 바로 이 공세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상황이 여기까지 이르자 작가 정비석은 치안국, 특무부대 등 고발과 투서가 들어간 곳마다 불려가 조사를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이처럼 떠들썩한 논쟁은 오히려 역선전의 효과를 나타냈다. 소설이 연재됐던 신문의 부수가 무려 3배로 뛰어올랐고 연재를 끝낸 후 정음사에서 상하권으로 엮어낸 단행본은 발매 3일 만에 초판이 매진됐다. 총 7만부가 팔려나간 소설 <자유부인>은 국내 최초의 베스트셀러로도 기록돼 있다.

<자유부인>이 영화화된다고 하자 정비석은 내심 불안을 떨칠 수 없었지만 결과물을 보고 한형모 감독의 솜씨에 만족스러워했다. 영화 <자유부인>은 수도극장에서 개봉, 10만 8천명을 동원하여 1956년 흥행에서 1위를 차지했다.

한편 <자유부인> 논쟁으로 호된 곤욕과 인기를 동시에 누린 작가 정비석은 8년 후 1962년에도 다시 한번 회오리바람 속에 휩쓸렸다. 역시 신문에 연재했던 <혁명전야>라는 소설의 몇 줄 때문이었다.

문제가 된 것은 ‘돈 오십환이 생기면 고려대생은 막걸리를 마시고 연세대생은 구두를 닦고 서울대생은 노트를 산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자대학생들을 보면 연세대학생은 연애의 대상이요, 고려대학생은 결혼의 대상이요, 서울대학생은 동경의 대상이라는 것이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본 연대생들이 작가 집으로 몰려가 항의를 하는 바람에 결국 연재를 중단하고 해명서를 내는 것으로 일단락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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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다인

영화평론가. 인쇄매체의 전성기이던 8,90년대에 영화전문지 스크린과 프리미어 편집장을 지냈으며, 굿데이신문 엔터테인먼트부장, 사회부장, LA특파원을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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