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키스신 배역은 여간첩과 첩보대 대위
최초 키스신 배역은 여간첩과 첩보대 대위
  • 김다인
  • 승인 2008.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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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손’에서 윤인자와 이향 / 김다인



[인터뷰365 김다인] 우리나라에서 영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후 남녀 주인공이 입맞춤을 하기까지 걸린 세월은 어림잡아 35년이 넘는다. 최초의 키스신이 등장한 영화는 1955년작 <운명의 손>이다. 영화의 가장 인기있는 소재가 사랑인데, 그 사랑을 표현하는 초기단계인 입맞춤까지는 이토록 오랜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다.

1926년에 만들어진 영화 <농중조>에서 주연을 맡은 복혜숙과 감독 겸 주연이었던 이규설이 장충단공원에서 손을 살짝 포개는 장면을 찍을 때도 구경꾼들은 혀를 끌끌 차며 못마땅해 했다. 당시로는 벌건 대낮에 남녀가 공개석상에서 손을 잡는 것도 발칙한 행위였다.

50년대쯤으로 넘어와도 사정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이때의 영화 속 애정 장면은 대개 이렇게 진행됐다.

이민과 조미령 혹은 김진규와 최은희 커플이 사랑 사랑, 소리가 새어나오도록 오묘한 눈빛을 서로 내쏘고 있다. 카메라는 이들의 얼굴을 클로즈업 한다. 보는 사람들 목으로 꼴깍 침이 넘어가며 긴장한다. 그러나 잠시 후, 흡사 사팔뜨기 눈처럼 서로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비껴 지나가 충돌지점(?)을 피해 어깨와 어깨를 맞부딪히며 껴안고 만다.

60년대 신성일과 엄앵란 혹은 신성일과 윤정희가 출연하는 애정장면은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간다. 두 사람이 역시 사랑 사랑, 눈빛을 교환하다가 돌연 여자 쪽이 냅다 뛰어가기 시작한다. 장소는 주로 한강변이나 정릉 골짜기 같은 곳이다. 여자를 따라 남자도 뛰어간다. 절대 남자가 여자를 앞지르지 못하는 기이한 뜀박질이다.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고 공연히 애꿎은 나무 하나 골라 여자가 그 주위를 돌면 곧 뒤따라온 남자가 그 반대편으로 돌다가 나무를 사이에 두고 공연히 이쪽 봐, 저쪽 봐 게임(?)을 한다. 그러자가 나무를 사이에 두고 서로 손을 잡은 채 빙글빙글 돈다. 이때 성우가 녹음한 웃음소리가 하하하하, 호호호호 울려 퍼진다.

또다른 경우는 역시 여자가 먼저 뛰어가다가 괜스레 발을 헛디뎌 넘어진다. 여자를 못 잡은 게 아니라 안 잡으려 애쓰던 남자도 그 옆에 넘어진다. 그리고는 함께 경사진 언덕 아래로 데굴데굴 구른다. 그러다 멈추면 여자가 아래쪽. 카메라가 누워있는 여자 얼굴을 클로즈업하고 여자는 눈을 감는다. 여자를 내려다보는 남자 표정 클로즈업. 두 얼굴 사이가 극도로 가까워졌을 때 갑자기 카메라는 두 사람을 떠나 빙그르르 하늘이나 나뭇잎을 패닝한다. 이런….



50년대와 60년대 영화에서의 사랑표현법은 이랬다.

60년대 아이돌스타에서 이제는 편안한 토크쇼 단골아줌마가 돼버린 엄앵란 여사는 늘 남편 신성일과의 첫 입맞춤을 촬영중 슬쩍 했다고 얘기하곤 한다. 기억하기로는 영화 <맨발의 청춘>이었던 것 같다. 사람들 눈을 피해 창고 같은 곳으로 도망 온 두 사람. 입맞춤을 한다. 그때 카메라는 세트 장 밖에 있었고 두 사람이 입술이 맞닿은 지점에는 딱 각도 맞춰 창틀이 있었다. 그러니까 화면에서는 창틀 가운데 두고 두 사람의 옆얼굴이 보인 것이다.

50, 60년대 영화의 애정표현이 이처럼 ‘안전거리 확보’를 기본으로 했기 때문에 <운명의 손>의 최초 키스신은 대단한 시도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한형모 감독의 이 영화로 데뷔한 윤인자는 이후 숱한 영화에 출연했음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키스신을 한 여배우로 가장 먼저 거론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운명의 손>은 북한 간첩이면서 바(bar)걸로 위장해있던 정애(윤인자)가 고학생 영철(이향)을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영철이 실은 첩보대 대위라는 사실을 알고 자신의 임무와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결국 사랑을 택하고 영철의 손에 죽는다는 줄거리로 이뤄져 있다. 두 배우의 키스신은 영철이 죽어가는 정애를 안고 슬퍼하는 이별장면에 등장한다.

말이 키스이지, 그냥 잠깐 입술이라는 신체부위가 스친 정도라고 생각하면 되는데도 당시 결혼한 상태였던 윤인자는 절대 못하겠다고 버텼다. 상대역인 배우 이향은 남자라서 그런지 별 문제가 없었다.

일주일 동안 이어진 설득에 결국 윤인자는 중대 결심을 했고 촬영에 들어갔다. 촬영현장에는 감독과 조감독 촬영감독 조명감독 외에는 출입금지였다.

윤인자의 ‘살신성인’적인 용단에 의해 키스신 촬영을 무사히 끝낸 <운명의 손>은 제작 당시에는 화제가 되었지만 정작 개봉 때는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에 밀려 관객 동원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영화 속 키스 장면에 대한 화제는 이어져 한 잡지에서는 영화감독과 배우들을 대상으로 ‘내가 구상하는 러브신’이라는 제목의 앙케트를 게재하기도 했다. 앙케트에 응한 홍성기 감독 등은 ‘열(熱)과 열이 부닥치는 감정을 억제할 수 없어 교차되는... 모든 관객들로 하여금 추운 겨울에라도 땀을 흘리게 하는 장면’을 연출하고 싶다며 키스 장면에 대한 열망을 나타냈다.

<운명의 손>은 키스신이 최초로 삽입됐다는 것 외에도 영화적 구성이 탄탄하고 멜로와 스릴러, 액션이 적절하게 혼합된, 한국영화사 최초의 퓨전 장르영화라는 점에서 기억될 만하다. 동아일보에서는 이 영화에 대해 ‘한국영화사상 획기적 야심작’이라 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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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인쇄매체의 전성기이던 8,90년대에 영화전문지 스크린과 프리미어 편집장을 지냈으며, 굿데이신문 엔터테인먼트부장, 사회부장, LA특파원을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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