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이 중의 사나이, 허준호의 부친 허장강
사나이 중의 사나이, 허준호의 부친 허장강
  • 김다인
  • 승인 2008.09.2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기는 프로, 현실에서는 인격 갖춘 신사 / 김다인



[인터뷰365 김다인] “마담, 우리 심심한데 뽀뽀나 할까.”

지금도 개그맨들이 곧잘 흉내내는 이 느끼한 대사의 오리지널 저작권(?)은 배우 허장강에게 있다.

걸쭉한 톤에 스타카토로 끊으면서 콧소리를 약간 섞어 내는 독특한 목소리, 그 주인공인 허장강은 개성파 배우 허준호의 부친이다.

최근에는 김지운 감독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만들면서 특히 극중 송강호 연기는 이만희 감독의 1971년작 <쇠사슬을 끊어라>에 출연한 허장강 연기에서 영감을 얻었음을 밝혀 화제가 됐다. <쇠사슬을 끊어라>에서 허장강이 오토바이를 타고 뚝섬 한가운데를 질주하는 장면이 그대로 사막을 가로질러 도망가는 송강호의 오토바이 액션으로 바뀐 것이다.

배우 허장강은 한국영화계가 자랑해도 좋을, 빛나는 보석이다.

허장강은 극단 활동을 하고 있던 도중 이강천 감독의 데뷔작 <아리랑>에서 원하던 배우가 캐스팅이 되지 않자 ‘꿩 대신 닭’으로 출연하면서 영화 데뷔를 했다.

1923년 서울 뚝섬에서 태어난 허장강(본명 허장현)은 교육자가 되거나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키우며 자라난 개구쟁이였다. 집안사정으로 대학을 포기해야 했던 그는 대신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향해 나아갔다.

자신이 극단을 조직, 여관집 창고를 임시 무대로 첫 작품을 올렸으나 별 성과없이 끝났고 태평양악극단에 가입해 비로소 본격적인 무대활동을 할 수 있었다. 무대극 <계월향>에서 명기 계월향은 괴롭히는 일본 대장 소서행장 역을 맡아 인정을 받았는데, ‘긴 강’이라는 뜻의 장강이라는 예명도 <계월향>의 연출가 서항석이 ‘성수동 뚝섬의 물이 마를소냐, 기나긴 강물처럼 부디 오래오래 살아 대성하라‘는 뜻을 담아 지어준 것이다.

영화 데뷔작 <아리랑>으로 호평을 받은 후 허장강은 무조건 이강천 감독의 다음 작품 <피아골>에 출연 의사를 밝혔다. 이감독은 그에게 영화에 등장하는 빨치산 가운데 가장 욕을 많이 먹은 만수역을 맡겼다. 같은 여성빨치산을 겁탈하고 죽이기까지 하는 ‘짐승만도 못한 놈’이었다. 영화가 성공하자 허장강은 일약 대중들의 카타르시스 대상이 됐다. 대놓고 욕할 상대가 된 것이다.

사람들이 욕을 해도 허장강은 싱글벙글했다. 비로소 자신의 연기에 사람들이 반응을 보인 것이기 때문이다.

허장강의 악역 행진은 이후 거침없이 이어졌다. 여자를 협박해 돈을 갈취하는 건달, 피도 눈물도 없는 노랭이, 사기꾼, 잔인무도한 일본군 등등. 그중에서도 특히 그의 ‘나쁜 일본인’ 역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같은 시기에 악역 전담배우로 활동한 이예춘과 허장강의 다른 점이 있다면 이예춘은 오로지 악역만 한 것에 비해 허장강은 다양한 연기를 했다는 것이다. 허장강은 초기 악한의 대명사에서 코미디로 그리고 토속적이거나 서민적인 연기로 21년간 거의 1천편에 달하는 영화에 출연했다.

이예춘이 외모에서부터 도저히 접근이 불가한 섬뜩하고 강한 기운이 흘러넘치는 데 비해 허장강은 긴장된 근육을 풀고 웃음을 머금으면 곧 친근한 서민으로 돌변하는 매력이 있었다.



유난히 코가 길어 ‘코장강’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던 허장강은 영화 속 이미지와는 달리 자기관리가 철저한 ‘프로페셔널’이었다.

한국영화의 황금시절이라 일컬어지던 60년대에는 수십편의 영화가 동시에 촬영돼서 인기배우들은 5~6편에 겹치기 출연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다보니 인기 배우들이 촬영 펑크를 내는 일이 잦아 제작부장들은 배우를 모시러 다니는 것이 중요 임무가 됐다. 하지만 허장강은 그렇지 않았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앞의 영화 촬영이 늦어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시간에 맞춰 촬영장에 나와있곤 했다.

일단 촬영을 시작하면 허장강은 군말없이 연기에 몰두했고 자신이 출연한 영화는 성우 녹음을 시키지 않고 반드시 자신이 녹음을 했다. 당시는 후시녹음이던 시절이어서 배우는 촬영 때 옆에서 불러주는 대사를 그대로 따라하며 연기를 한 후, 촬영된 필름을 보고 성우들이 나중에 녹음을 했다. 허장강은 성우들이 하는 후시녹음을 자기가 직접 한 것이다. 그러자니 다른 배우보다 두 배로 바빴지만 결코 스케줄 펑크를 내지 않았다. 참의미에서 프로였던 것이다. 당시 후시녹음을 반드시 자기 목소리로 했던 배우는 허장강과 김승호 두 사람뿐이었다.

그런가하면 자기가 욕심내던 배역을 맡게 되면 한치의 양보도 없었다. <여사장 과 노신사> 촬영 때는 선배연기자 김승호와 의견이 맞지 않자 세 시간 동안의 격론 벌여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도 했다. 그래서 당대의 으뜸인 연기자 김승호는 평소 “내가 무서워하는 녀석은 딱 하나, 허장강뿐”이라고 말할 정도로 연기 면에서 허장강을 맞수로 여겼다.

촬영현장의 휴식시간에도 허장강의 인기는 으뜸이었다. 괴상한 곱사춤을 춰 동료들을 웃겨 놓고는 “이봐 웃긴 값 500원 내놔”라고 해서 한동안 별명이 500원이기도 했다.

당시 그와 함께 영화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허장강을 ‘연기자 이전에 의리와 정의를 중하게 여기는 사나이 중 사나이’라고 기억했다. 그의 생활철학은 ‘마누라 다음은 친구’였다. 자신은 술을 마시지 않으면서도 집에 홈바를 만들어 영화 동료들을 초대해 흥을 돋워주는가 하면 해외여행을 다녀오면 반드시 분장용 화장품을 사다가 동료나 선배에게 선물을 했다. 당시만 해도 국산 분장용품이 나오지 않을 때였다.

영화 속에서 거친 모습과는 달리 남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고 큰소리도 내지 않았다. 영화계에서는 허장강에 대해 초창기 배우 이금룡에 버금가는 인격을 갖춘 배우라고 표현했다.

허장강은 당대의 베스트드레서이기도 했다. 176센티미터의 훤칠한 키, 길쭉한 얼굴에 긴 코, 누에고치를 검게 물들여 붙여놓은 듯한 눈썹 등 한눈에 확 띄는 외모에 머리는 포마드를 발라 올백으로 단정하게 빗어 넘겼다. 옷에서부터 구두까지 색깔을 맞춰 입고 다녔고 특히 빨간 넥타이를 즐겨 맸다.



허장강은 늘 “내 팔자에 딴다라 해서 이만하면 됐지 또 뭘 바라겠어“라고 자신의 삶에 대해 자족하며 별다른 욕심을 내지 않았다. 그가 욕심을 낸 것이 있다면 딱 한 가지, 연기 욕심뿐이었다. 허장강은 ”연기는 오십부터“라며 평생을 연기할 각오로 충만해 있었다.

하지만 하늘도 그를 욕심냈다.

허장강은 나이 오십을 겨우 두 해 넘기고 저세상으로 갔다. 허장강은 1975년 10월 16일 연례행사로 벌어진 새마을돕기 연예인축구대회 OB팀으로 참가했다가 후반전 시작 십분 만에 쓰러졌다. 심장마비였다.

그날 아침 축구시합을 한다며 들떠 있는 허장강은 부인 김옥심 여사와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1967년 결혼한 부인 김옥심 여사와는 유난히 금슬이 좋았다. 집을 나서기 전 허장강은 축구 하면 발이 아플 것이라며 부인의 양말을 달래서 신고 나갔다. 알 수 없는 ‘감’이 있었던 모양이다.

쓰러진 이틀 후 허장강은 아까운 삶을 마감했고 동료들의 오열 속에 떠나갔다.

슬하의 3남2녀 가운데 허기호 허준호 형제가 연기자로 활동하고 있는데 특히 허준호는 나이가 들수록 부친의 모습을 꼭 닮아가고 있다.

연전에 한 인터뷰에서 허준호는 “워낙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아버지로서 좋은 분이셨고 배우로서도 준비된 분이셨다”며 “꼬마인 절 서재로 데리고 가 대본 연습을 시키셨다”고 말했다.

허준호는 작년에 TV 드라마 <주몽>에서 주몽의 아버지 해모수 역을 맡아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최근 김유진 감독의 사극영화 <신기전>에 출연하는 등 연기자로서 선친의 뒤를 잇고 있다. 허준호는 또 작년에 선친의 예명을 딴 장강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해 주로 뮤지컬 제작에 힘을 쏟고 있다.

“아버지를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다”는 허준호가 한국영화사에 굵은 획을 그은 배우 허장강의 ‘출어람’이 되기를 기대한다.








기사 뒷 이야기가 궁금하세요?
인터뷰365 편집실 블로그

김다인

영화평론가. 인쇄매체의 전성기이던 8,90년대에 영화전문지 스크린과 프리미어 편집장을 지냈으며, 굿데이신문 엔터테인먼트부장, 사회부장, LA특파원을 역임

김다인
김다인
press@interview365.com
다른기사 보기


  • 서울특별시 구로구 신도림로19길 124 801호
  • 등록번호 : 서울 아 00737
  • 등록일 : 2009-01-08
  • 창간일 : 2007-02-20
  • 명칭 : (주)인터뷰365
  • 제호 :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 명예발행인 : 안성기
  • 발행인·편집인 : 김두호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문희
  • 대표전화 : 02-6082-2221
  • 팩스 : 02-2637-2221
  • 인터뷰365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ress@interview365.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