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화의 부친, 평생 악역만 한 스타 이예춘
이덕화의 부친, 평생 악역만 한 스타 이예춘
  • 김다인
  • 승인 2008.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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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여편 가운데 악역 아닌 영화는 단 두 편 / 김다인



[인터뷰365 김다인] 영화인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영화계 사람들에게 소개할 때 흔히 이런 말을 쓴다. “얘가 내 16밀리야.”

35밀리(아버지)를 잘 모를 때는 그러므로 16밀리(아들)를 보면 아버지를 상상할 수 있다. 지금 세대들은 50, 60년대 한국영화의 중요한 캐릭터였던 배우 이예춘을 잘 모를 것이다. 그렇다면 중견배우 이덕화를 보면 된다. 그가 고 이예춘 선생의 16밀리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이덕화는 MBC ‘무릎팍도사‘에 출연해 부친에 대해 회고하며 눈시울을 붉힌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이덕화는 “학교 다닐 때 단체 관람하러 가는 영화가 마침 아버지 출연 영화면 아버지는 가지 말라고 하셨다고 했다”며 그 이유로 “아버지가 영화에서 맡은 역이 탐관오리거나 간신배거나 여자를 때리는 난폭한 남자였기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그 말이 맞다. 배우 이예춘은 한국영화사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악역 전문배우였다. 그가 평생 출연했던 영화의 편수는 무려 300편이 넘는데 그 가운데 악역을 맡지 않은 영화는 단 두 편 <나그네 설움>과 <푸른 하늘 은하수>뿐이었다.

지금의 이덕화 모습은 강하기는 하지만 많이 순화(?)된 얼굴이다. 눈을 부릅뜨면 강렬한 캐릭터가 보여 지지만 웃을 때는 장난기도 있고 그래서인지 유머러스한 역도 꽤 많이 하는 편이다. 이십대 때는 임예진 등과 더불어 청춘영화의 주역도 많이 맡았다. 그의 아버지 이예춘으로서는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다.

이예춘은 이덕화보다 훨씬 강렬한 인상을 가졌다. 싸늘하게 비웃음을 담아 입술을 찌그러뜨리며 짓는 냉소, 벗겨진 머리에 찢어진 날카로운 눈, 커다란 입을 벌려 잔인하고 호탕하게 웃는 웃음 등은 너무 강렬해서 깡패, 조직의 보스, 악덕사장, 여자를 겁탈하는 악한 등이 단골 역이었다. 그냥 얼굴만 봐도 ‘나쁜 사람’이었는데 거기에 악덕한 연기를 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이예춘은 영화와 인연을 맺기 전 악극단 생활을 했다.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난 해에 태어나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한 2년 후부터 15년 동안 악극단 생활을 해왔다.



영화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55년 이강천 감독의 <피아골>이었다. 카메라 앞에 처음 서는 것이 낯설었던 이예춘은 운수점까지 봐가며 영화와 첫 인연을 맺었다. <피아골>에서 이예춘이 맡은 역은 빨치산 부대의 아가리 부대장. 잔인하고 냉혹하지만 그렇게 된 데는 나름 개인사가 있는 인물이었다.

영화가 성공하는 바람에 이예춘은 영화와의 첫 인연을 성공적으로 맺게 됐고 이후 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까지 한국영화의 악당 역은 모조리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 한 사람, 허장강도 남부럽지 않게 악역을 많이 했지만 그래도 코믹한 역도 많이 했다. 이예춘은 애오라지, 악역만 줄곧 해온 독특한 배우라 할 수 있다.

이덕화는 연기뿐만 아니라 ‘머리카락’으로도 유명해졌다. 그의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영화로 활동영역을 옮긴 후 이예춘은 자꾸 훤해지는 앞머리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무대에서는 먹칠을 해서 커버했지만 화면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뛰어난 대체방법이 없을 때였기 때문에 이예춘은 먹물을 들인 고운 흙가루를 머리에 칠하고 촬영을 했다. 하지만 바람이 불면 말라버린 검은 가루가 날아 가버려 애를 먹었다.

이예춘은 일본에 왕래하는 친구에게 부탁해 자생당 제품의 모생수를 구했다. 바르면 머리가 나는 액체였다. 이예춘은 설명서에 쓰인 대로 모생수를 하루 일곱 번씩 바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냄새가 몹시 고약해 쥐똥냄새가 났다. 그 냄새나는 것을 하루 일곱 번씩 바르자니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사무실이건 다방에서건 남의 눈을 피해 발랐는데 하루는 다방에서 그의 앞에 앉은 여배우가 이게 무슨 냄새냐며 코를 싸쥐는 일이 벌어졌다. 당황한 이예춘은 식은땀을 흘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고 그 바람에 냄새는 순식간에 온 다방에 번져 난리가 났었다는 일화도 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악역의 대부였던 이예춘은 60년대 말 배우들의 영화 제작 붐을 타고 몇 편의 영화를 제작, 성공했다. 하지만 <일본 천황과 폭탄사건> 제작에 크게 실패하는 바람에 그동안 모아뒀던 돈을 날리고 쇼크로 쓰러지기까지 했다. 1971년이었다.



다행히 병세가 호전된 후에는 춘천에서 낚시를 즐기며 요양을 해 1973년에는 정진우 감독의 <석화촌>에도 출연했다. 이것이 마지막 작품이었다.

자신의 뒤를 이어, 자신이 평생 해보지 못한 청춘영화 주연을 맡아 연기하는 아들 이덕화의 성장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이예춘은 이덕화가 오토바이사고가 크게 나자 자신의 병도 잊은 채 아들의 병 간호며 사고 수습으로 동분서주했다. 1년쯤 지난 후 이덕화의 병세가 호전되기 시작할 무렵 병원에 함께 입원해있던 이예춘은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져 1977년 향년 58세로 세상을 떠났다.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했으나 지금 어느덧 부친의 나이가 되어 중량감 있는 연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이덕화에게서 그 유언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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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다인

영화평론가. 인쇄매체의 전성기이던 8,90년대에 영화전문지 스크린과 프리미어 편집장을 지냈으며, 굿데이신문 엔터테인먼트부장, 사회부장, LA특파원을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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