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프랑코 촐라의 두 번째 잉글랜드 정복기
잔프랑코 촐라의 두 번째 잉글랜드 정복기
  • 이근형
  • 승인 2008.09.1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웨스트햄 감독 맡아 런던 재입성 / 이근형



[인터뷰365 이근형] 이탈리아 서부에 위치한 지중해의 사르디니아 (Sardinia) 출신의 축구선수는 대표적으로 루이지 리바 (Luigi Riva), 그리고 현재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감독으로 부임한 잔프랑코 촐라 (Gianfranco Zola) 를 들 수 있겠다. 루이지 리바는 사르디니아에 위치한 클럽 칼리아리의 전설적인 축구선수이고, 잔프랑코 촐라 역시 칼리아리에서 자신의 현역 마지막 생활을 마친 바 있다. 촐라는 비록 전성기 시절에 칼리아리에서 뛰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모든 커리어를 종합해서 귀결을 맺는 클럽은 그에게 있어서 칼리아리뿐이었다.


촐라는 토레스라는 클럽에서 뛰다가, 우리에게는 ‘유벤투스 승부 조작 사건’ 으로 유명한 루치아노 모지 (Moggi) 의 러브콜에 의해 SSC 나폴리로 적을 옮겼다. 그는 SSC 나폴리에서 세기의 축구 천재 디에고 마라도나 (아르헨티나) 와 함께 나폴리의 전성 시대를 이끌었다. 이후 파르마 FC로 이적, 파르마에서만 통산 90골 가까이를 쏟아내며 자신의 네임 밸류를 최상으로 올렸다. 하지만 수퍼스타 촐라에게는 이탈리아 내에서의 자신에게 쏟아지는 안 좋은 루머,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의 마찰로 인해 더이상 세리에 A에 버틸 힘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첼시로 이적했다.


촐라의 잉글랜드 첫 번째 정복기는 이렇게 외부의 영향에 의해 이뤄졌다. 비록 그에게 있어서 잉글랜드 진출은 자신이 원해서 간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촐라의 운명은 곧 잉글랜드 프로축구와 맞닿은 것만은 사실이었다. 다행히도 첼시에는 당시 잔루카 비알리, 그리고 로베르토 디마테오 같은 이탈리아 선수들이 있었기에 비교적 빠른 적응을 할 수 있었다. 거기에 탄력을 받아서 엄청난 활약을 펼쳤고, 당시 첼시를 맡던 뤼트 훌리트 (네덜란드) 감독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었다. 2000년대의 첼시 감독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역시 촐라를 신임했다.


아직도 첼시의 구단 샵에는 촐라의 마킹과 그의 등번호 25번을 구비해놓고 있다. 그래서 첼시 팬들은 심지어 촐라가 뛰지 않았던 이후의 첼시 유니폼에다가 촐라의 프린팅을 박곤 한다. 그만큼 아직까지도 더 블루스 (The Blues) 팬들에게 있어서 촐라는 ‘첼시를 빛나게 해준 위대한 이방인’ 으로 기억되고 있다. 어쩌면 첼시가 유지되는 한, 촐라의 업적은 영원할 것이다. 첼시의 중상위권 유지에 큰 도움을 준 인물, 근거리 프리킥에서는 어김없이 득점으로 연결되던 그의 오른발 예봉, 게다가 존재 하나만으로도 첼시에게 천군만마를 얻는 듯한 느낌을 주게 하는 수퍼스타. 2004년 그는 대영제국 명예 훈장 (OBE) 을 수여했는데, 그의 첼시 시절 업적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에게 훈장쯤은 당연 부여해야 한다고 한 목소리 한다.




위기의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그리고 촐라


결론부터 짓겠다. 먼저 08-09 시즌을 앞두고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웨스트햄 유나이티드는 2006년 12월부터 감독직을 맡던 앨런 커비쉴리 감독을 사임시키고, 새 사령탑으로 이탈리아 올림픽 대표팀 코치를 맡던 잔프랑코 촐라를 임명했다. 이로써 잔프랑코 촐라는 2003년 이후 5년여만에 다시 잉글랜드의 심장부 런던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이제는 자신의 전성기와 함께 했던 같은 런던 연고지의 첼시를 상대로 활시위를 겨냥해야 하는 운명을 맞이했다.


웨스트햄 유나이티드는 늘 그래왔지만, 프리미어리그에서 중위권과 하위권을 오가며 항상 그 자리에 못을 박는 듯한 양상을 보여왔다. 프리미어리그 명문 클럽에서 활발하게 움직이는,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수퍼스타들을 양성하는 최고의 유스팀을 가졌는데도, 이렇게 항상 프리미어리그 무대에서는 오늘 내일 하는 클럽이니 과연 ‘유능한 자원들의 양성소’ 다운 모습이다. 앨런 커비쉴리 감독은 1991년부터 찰턴 애슬레틱 감독으로 장기 집권했는데, 좀처럼 발전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웨스트햄 유나이티드는 앨런 퍼듀 감독을 해임시키고 2006년 연말에 커비쉴리 감독을 끌어들였다.


웨스트햄 팬들은 06-07 시즌 중반기에서 후반기로 넘어가는 시점에, 앨런 커비쉴리 감독의 웨스트햄 사령탑 내정에 대해 큰 기대를 걸었다. 왜냐면 주지하다시피 커비쉴리 감독의 축구선수 시절 첫 커리어가 바로 웨스트햄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앨런 커비쉴리 감독은 당시 중위권과 강등권을 오가는 웨스트햄을 이끌고 마지막 실낱같은 희망을 향해 달렸고, 결국 06-07 마지막 라운드에서 우승이 확정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1-0으로 침몰시키고 아슬아슬하게 강등권에서 탈출, 다음 시즌에도 프리미어리그에서 뛸 수 있게 되었다.


07-08 시즌을 앞두고는, 아스날에서 퇴물 취급을 받던 왕년의 스웨덴 출신 스피드스터 프레데리크 융베리를 영입하며 공격진의 활력 요소 마련과 팀 네임 밸류 격상에 한 몫 했다. 공격진에는 ‘원샷 원킬’ 딘 애쉬턴이 있었다면 수비 라인에서는 06-07 겨울 이적시장에서 블랙번 로버스에서 데려온 호주 국가대표 사이드백 루커스 닐, 북아일랜드 출신의 유능한 수비 자원 조지 매카트니, 그리고 날이 갈수록 진화하는 모습을 보이는 잉글랜드 21세 이하 대표팀 센터백이자 리오 퍼디낸드의 친동생 앤턴 퍼디낸드가 훌륭한 앙상블을 이루고 있었다. 06-07 시즌의 수모를 부활의 발판으로 삼아, 07-08 시즌에는 웨스트햄의 명성에 걸맞는 성적표를 받자는 파이팅 넘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결과론적으로 웨스트햄은 07-08 프리미어리그에서 10위라는 성적표를 받아내며 기준치 이상의 호성적을 기록했고, 이것은 지난 시즌 5위 자리를 유지한 토트넘 홋스퍼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기록이라는 점에서 대단했다. (07-08 토트넘은 11위)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웨스트햄은 뛰어난 기량을 지닌 선수들을 더 좋은 여건의 클럽으로 넘기는 일이 지금까지 다반사였고, 커비쉴리 감독 체제라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커비쉴리 감독으로 대변되는 웨스트햄 수뇌부는 아무렇지도 않게 웨스트햄 수비의 핵심 앤턴 퍼디낸드와 조지 매카트니를 모두 선덜랜드에 보내버렸다. 조지 매카트니는 다시 예전의 클럽 선덜랜드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앤턴 퍼디낸드는 웨스트햄의 중추였다가 선덜랜드로 이적하는 각각의 특이한 사례가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비록 이름값에 비해 뛰어난 활약을 펼치진 않았지만, 팀에 있는 것만으로도 보탬이 되는 수퍼스타 융베리와의 계약을 해지했다. 말 그대로 방출이었고, 융베리는 다른 팀으로의 이적을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순식간에 무적 (無籍) 선수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팬들의 분노는 이때부터 진정시킬 수 없이 커져버렸다. 팀의 수비라인 핵심인 앤턴 퍼디낸드와 조지 매카트니를 선덜랜드로 이적시키는 것도 서러워 죽겠는데, 융베리까지 리스트에서 빼버리니 말 다한 셈이었다. 그래서 팬들은 커비쉴리 감독의 해임을 적극 지지했으며, 수뇌부 측에서는 이런 여론을 의식했던지 언론을 통해 “웨스트햄 감독 교체” 의 뉘앙스가 담긴 보도문을 여러번 발표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결국 커비쉴리 감독은 한 시즌 반만에 웨스트햄에서 쫓겨났다.



소원을 이룬 촐라, 두 번째 정복을 꿈꾸다


잔프랑코 촐라는 04-05 시즌 칼리아리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칼리아리에서 그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라운드에 나섰다 하면 칼리아리의 열성적인 팬들의 환호에 경기장이 들썩거렸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는 사르디니아의 영웅이자, 사르디니아 지역 축구의 명성을 이어오는 수퍼스타이기 때문이다. 칼리아리의 등번호 10번은 그에게 있어서 자신의 축구 인생을 멋지게 끝맺을 수 있는 전유물이었고, 어느 인터뷰에서 “스탬포드 브릿지에서의 은퇴보다 칼리아리에서의 은퇴가 더 값지다” 라고 언급했으니 칼리아리 등번호 10번은 결국 촐라의 영광스런 마지막 흔적이었다.


2006년부터 그는 이탈리아 21세 이하 대표팀의 코치로 임명되었다. 은퇴 후 일반적인 축구선수들과 마찬가지로 감독직 연수와 축구 경영 지식 습득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촐라가 보좌하게 될 대표팀 사령탑은 선수 시절 유벤투스와 첼시를 오가며 전성기를 이끌었던 피에를루이지 카시라기 (Casiraghi) 감독이었다. 조금 다른 주제이지만, 두 사람 모두 다 첼시에서 현역 시절을 보냈다는 것에서도 공통점이 있었다. 어쨌거나 촐라는 카시라기 감독을 보좌하며 착실히 감독직 연수를 받고 있었다. 선수 시절 그라운드 내에서도, 그리고 외부에서도 항상 웃으면서 사람을 맞이했던 촐라 특유의 착한 심성이, 선수 훈련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이런 특유의 심성과 항상 배우려 하는 겸손한 자세는, 그가 꿈꾸는 축구팀 감독의 목표에 조금씩 다가갔다.



지오빈코 (유벤투스), 주세페 로시 (비야레알), 리카르도 몬톨리보 (피오렌티나) 등으로 대변되는 이탈리아 21세 이하 대표팀은, 카시라기 감독과 촐라 코치의 지도 속에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참가하였다. 그들은 조별리그에서 1라운드부터 온두라스를 대파하더니, 2라운드에서도 대한민국을 가볍게 제압하며 2승을 따내 8강행 티켓을 선점하였다. 비록 8강에서는 벨기에에게 2-3으로 분패했지만 말이다. 이것 때문에 한창 이탈리아 내에서는 카시라기 감독과 촐라 코치를 비롯한 올림픽팀 수뇌부의 실망스런 성적표 때문에 말이 많았지만, 어쨌거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길 원했던 웨스트햄은 그를 원했고, 촐라는 감독 연수 시작 이후 약 3년여만에 자신이 바라던 축구팀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촐라는 오래간만에 런던에 도착했고,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의 홈 구장인 업턴 파크 (Upton Park) 에서 등번호 1번과 자신의 이름이 프린팅된 웨스트햄 유니폼을 들고 기념 사진을 찍었다. 촐라의 두 번째 잉글랜드 정복, 그리고 런던 재입성은 촐라 개인에게 있어서 상당히 기념비적이고 흥분케 만드는 요소였다. 그는 웨스트햄 감독 수락 이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재미있는 축구, 그리고 공격적인 축구를 이끌겠다” 라고 자신감 있는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첼시에서 수석 코치를 맡던 스티브 클라크를 자신의 오른팔로 내정, 웨스트햄 일선 수뇌부의 재정비와 새로운 활력 요소 찾기에 한 발짝 나아갔다. 웨스트햄 팬들이 가장 걱정하는 ‘유능한 자원의 외부 노출화’ 에도 신경을 쓰겠다고 언급했으며, 아무튼 이제 남은 것은 그가 피치 위에서 웨스트햄을 어떻게 이끄느냐 였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촐라의 수뇌부 및 감독 연수 커리어가 이탈리아 올림픽 대표팀에서 카시라기 감독을 보좌한 것 외에는 전무하다는 게 약점이라며, 웨스트햄 감독 수락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나 잔프랑코 촐라 웨스트햄 감독은 특유의 긍정적인 마인드로 “내가 내세울 수 있는 감독 커리어가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20년을 축구에 매진한 사람으로서, 나만의 노하우가 있다” 라며 별 신경 안 쓴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촐라의 웨스트햄 입성은 상당한 의미를 부여한다. 자신의 축구 인생 최고의 역사를 썼던 잉글랜드 무대에 복귀했다는 점, 그토록 바라던 감독직에 올랐다는 점, 그리고 친정 클럽 첼시를 상대로 본때를 보여줄 수 있다는 점 등등이다. 비록 자신의 웨스트햄 감독 데뷔전에서 웨스트 브롬위치에게 패하는 장면을 관중석에서 바라봤지만, 이제부터 촐라의 잉글랜드 두 번째 잉글랜드 정복기는 시작되었다.







기사 뒷 이야기가 궁금하세요? 인터뷰365 편집실 블로그

이근형
이근형
press@interview365.com
다른기사 보기


  • 서울특별시 구로구 신도림로19길 124 801호
  • 등록번호 : 서울 아 00737
  • 등록일 : 2009-01-08
  • 창간일 : 2007-02-20
  • 명칭 : (주)인터뷰365
  • 제호 :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 명예발행인 : 안성기
  • 발행인·편집인 : 김두호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문희
  • 대표전화 : 02-6082-2221
  • 팩스 : 02-2637-2221
  • 인터뷰365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ress@interview365.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