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본분 다한 멀티플레이어 ‘상록수’의 심훈
지식인의 본분 다한 멀티플레이어 ‘상록수’의 심훈
  • 김다인
  • 승인 2008.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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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외에 영화감독, 배우, 평론가 활동 / 김다인



[인터뷰365 김다인] 소설 <상록수>로 유명한 작가 심훈은 소설만 쓴 것이 아니라 영화배우도 하고 감독도 했다.

개화기라 할 수 있는 1920~30년대에는 문인이 연극을 하고 또 영화를 하는 일은 흔했다. 요즘으로 치자면 ‘멀티플레이어’라 할 수 있겠다.

심훈이 영화에 출연한 것은 얼떨결이었다.

심훈은 동아일보사 기자로 재직중이던 1925년 이경손 감독의 <장한몽>에 이수일 역으로 출연했다. 원래 이수일 역을 연기하던 배우 주삼손이 촬영 중간 돌연 행방을 감추는 바람에 대타로 후반부 이수일을 연기했다. 감독과의 평소 친분 때문이었다.

심훈은 외모상으로도 연기자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심훈과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 동창이며 친척간이기도 한 동요작곡가 윤극영은 심훈의 모습을 이렇게 기억했다.

“양미간이 탁 트인 얼굴에 눈이나 코가 모범형으로 들어앉고 귀거나 입이거나 기타 모든 부속품들의 배치와 조화가 미남임에 틀림없었다. 진실로 그는 호남이었다.”


심훈, 본명 심대섭(1901-1936)은 경성고보 3학년 때 3.1운동이 일어나자 앞장 서 만세를 부르다가 경찰에 체포돼 4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출옥 후 학교에서 퇴학을 당한 심훈은 중국으로 건너가 대학생활을 하며 문학수업을 했다. 귀국 후 1924년에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했다.

하지만 2년 만에 필화사건으로 동아일보사를 그만두고 대신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소설이라 할 수 있는 ‘탈춤’을 동아일보에 연재하면서 시나리오 작가로 데뷔했다.

영화소설은 지금의 영상소설로 삽화 대신 나운규 김정숙 등 배우가 실제 연기한 사진을 넣은 것이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아닐 수 없다. 필명인 심훈도 이때 처음 썼다.

점점 영화 쪽에 흥미를 느낀 심훈은 일본으로 가 영화 제작과 연출에 관한 현장수업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일본 감독이 연출한 <춘희>에 엑스트라로 출연하기도 했다.

일본에서 귀국한 심훈에게 <장한몽>을 만들었던 계림영화협회에서 영화 한 편을 만들어달라 청했다. 심훈은 ‘탈춤’을 영화로 만들고자 직접 각색작업까지 했으나 촬영 일주일을 남기고 제작비가 많이 든다는 이유로 급히 새 시나리오를 썼다. 이것이 <먼 동이 틀 때까지>다.



시나리오의 소재는 신문에 실린 한 전과자의 로맨스에서 얻은 것으로 심훈의 표현을 빌자면 ‘노루꼬리만한 소재를 가지고 하루 저녁 상(想)을 그리어 벼락치기로 완성한 것’이다.

원래는 ‘어둠에서 어둠으로’라는 제목으로 시나리오를 탈고했으나 총독부 검열에서 어둠이 겨레의 비운을 암시한 것 아니냐고 시비를 걸자 아예 엉뚱한 제목으로 바꾼 것이다.

신일선과 강홍식이 주연한 이 영화가 1927년 단성사에서 개봉하자 평단에서는 칭찬이 자자했다. 심훈이 일본에서 배워온 카메라 이동법을 사용해 영화의 흐름이 한결 원활해졌고 미술작업이 뛰어나 배경효과가 훨씬 좋아졌다. 무엇보다도, 저속한 일본 소설을 번안해 영화를 만드는 일이 판치던 시절에 오리지널 시나리오라는 점에서 ‘<아리랑> 이후 나온 명작’이라는 평을 들었다.

하지만 심훈은 다시 기자로 돌아갔다. 영화계의 열악한 환경과 총독부의 검열에 의지가 꺾여버린 것이다.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가 된 심훈은 대신 영화에 대한 칼럼과 평 등을 썼다.

이때 심훈이 쓴 글로는 중앙일보에 ‘만년설’이라는 필명으로 쓴 ‘우리 민중은 어떤 영화를 요구하는가’ ‘10년 후의 영화계’ 등이 있다.

특히 ‘10년 후의 영화계’라는 글에서는 뛰어난 상상력으로 입체영화의 출현, 연극과 회화 영화가 결합된 천연색영화 탄생을 유머러스하고 장난기 넘치는 글로 예고했다.


‘…입체 발성 천연색영화가 발명, 완성되는 때가 언제냐고 점쳐내기를 내게 강요한다면 그 날짜는 내가 예언의 명필을 휘두르고 있는 지금 1929년 5월 13일 오후 2시35분일지도 모른다. 단 전인류 중에서 1939년 5월12일(지금으로부터 10년 후)까지 황천의 아스팔트를 밟을 운명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마음놓고 예언하는 바이다.’


기자생활을 2년 동안 하던 심훈은 갑자기 일을 모두 접고 고향인 충남 당진으로 내려갔다. 그리고는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지금도 당진에는 심훈이 글을 쓰던 필경사가 그대로 보존돼 있다)

당진에서 쓴 글이 그의 대표작이 된 <상록수>로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현상모집 당선작이기도 하다. 일제 탄압의 암흑기에 흙으로 상징되는 민족정신을 그린 이 소설은 심훈의 대표작으로 현재까지 전국민 필독서가 되어있다. 심훈은 동아일보사가 준 상금으로 당진에 상록학원도 설립했다. (한때 서울에 학원 이름 중 상록학원이 많았던 것은 여기서 따온 것일 게다)



심훈은 <상록수> 출간을 계기로 서울에 올라와 이 소설의 영화화를 진행했다. 스스로 각색한 시나리오를 들고 영화계를 다닌 결과 고려영화사에서 제작을 하기로 하고 전옥 강홍식 이승룡 등 주연배우까지 내정했다. 하지만 총독부 검열당국의 방해로 끝내 영화 제작의 꿈은 이루지 못했다.

상심한 심훈은 그 분노를 술로 풀었다. 그는 늘 단골 목로주점 ‘납작집’에서 취할 때까지 술을 마셨다. 굵은 비가 오는 날 역시 심훈은 납작안주(두부를 납작하게 부친 것)에 약주로 대취한 다음 친구 집에 가 2차까지 한 후 거처로 향했다. 며칠 후 심훈은 급성장티푸스에 걸렸고 곧 일어나리라는 자신의 장담이 허무하게 저승으로 가버렸다. 36세, 너무 젊고 아까운 나이였다.

심훈은 생전에 주위사람들로부터 ‘한국의 로이드’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미국의 희극배우 헤럴드 로이드가 즐겨 쓰는 동그랗고 굵은 테 안경을 늘 쓰고 다녔고 짓궂고 장난기가 많은 것도 로이드를 닮았기 때문이다.

심훈은 일제 강점 하에서도 끊임없이 글로써 저항하기를 포기하지 않았고 그 상황을 감당하려는 작가의 임무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는 <상록수>를 비롯한 자신의 작품에서 일제의 검열 때문에 제대로 풀어낼 수 없었던 비분강개한 심정을 시를 통해 표현했다. 1932년 심훈이 써놓았으나 총독부의 검열로 인해 출판 허가를 받지 못한 시집 <그날이 오면>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되던 1945년 비로소 빛을 보게 됐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날이,

이 목숨 끊기기 전에 와주기만 할 양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올리오리다

두개골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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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다인

영화평론가. 인쇄매체의 전성기이던 8,90년대에 영화전문지 스크린과 프리미어 편집장을 지냈으며, 굿데이신문 엔터테인먼트부장, 사회부장, LA특파원을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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