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후에도 연기 계속한 최초의 여배우 복혜숙
결혼 후에도 연기 계속한 최초의 여배우 복혜숙
  • 김다인
  • 승인 2008.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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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 등쌀에 20대부터 할머니 역만 / 김다인



[인터뷰365 김다인] 요즘은 여배우의 결혼이 연기에 장애가 되는 일은 없다. 오히려 결혼 후 더 연기가 빛나는 여배우들이 많다.

하지만 1920~30년대, 영화 초기에는 달랐다. 여배우가 결혼을 하고도 연기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해낸 여배우가 있다. 복혜숙이다. 1926년 <농중조>로 데뷔한 복혜숙(1904-1982)은 <낙화유수>로 유명 배우가 된 이후 결혼과 관계없이 연기생활을 계속했다.

1927년에 만들어진 영화 <낙화유수>는 ‘강남 달이 밝아서 임이 놀던 곳...’으로 시작되는 주제가로 더욱 유명하다. 기구한 사연으로 기생이 된 여인과 화가의 이루지 못할 사랑을 그린 신파극으로, 개봉 당시 장안의 기생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라며 치맛자락을 휘감고 구경들을 와 더 화제가 됐다.

진주 태생 기생의 아들이었던 변사 김영환이 기구한 자기 모친의 일생과 집안의 숨은 내력을 쓴 <낙화유수>는 원래는 무대극으로 올려져 대히트 한 것을 단성사주 박승필이 재빨리 영화화한 것이다. 이구영이 감독 맡아 자신이 조선배우학교에서 가르친 복혜숙과 이원용 주연으로 캐스팅했다.

이 영화 촬영에는 처음으로 일본인 촬영기재를 빌려쓰지 않고 우리 촬영 카메라를 장만해 찍었는데 이것을 주선한 사람이 춘원 이광수다. 한국에 들른 미국인이 자신의 촬영기재를 팔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이구영을 불러 소개, 이구영은 박승필에게 알려 거금 1천1백원 주고 샀다.

<낙화유수>의 주인공 복혜숙은 목사의 딸로 자라나 일본 요코하마 고등기예학교에 유학까지 다녀왔다. 공부를 마친 후 교사 생활을 하다 3개월 만에 때려치우고 단신 상경해 김도산이 이끌던 신극좌에 입단했다. 노한 아버지는 절연을 선언했고, 복혜숙은 세례명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게 하는 복마리라는 본명을 버리고 외가 성을 따서 이경혜라는 예명을 지어 활동했다.

극단이 지방공연을 다니면 악대를 앞세우고 골목마다 다니며 연극 공연 선전하게 된다. 이 때 얼굴이 가장 예쁜 여배우가 인력거를 타고 사람들 이목을 집중시키는데, 이 배우를 ‘마치마와리(거리 행진) 배우’라고 한다. 복혜숙은 마치마와리 전공이었다.

극단을 따라다닌 지 2년 만에 복혜숙은 더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20세 때 조선배우학교에 입학하는 동시에 토월회로 소속을 옮겼다. 토월회로 옮긴 후 본래 성을 찾아 복혜숙으로 활동했다. 당시 토월회 멤버로는 복혜숙 외에도 윤심덕 석금성 등의 여배우가 있었다.

박승희가 부모에게 상속받은 유산으로 세운 토월회는 다른 신파극단과는 달리 체계가 잡혀 있었다. 다른 극단들은 돈이 생기면 단원들에게 얼마씩 집어주는 데 반해 토월회는 극단 최초로 소속 단원에게 월급도 줬다. 박승희는 구한말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의 아들로 토월회를 만들어 극계에 새 바람을 넣는 데는 성공했으나 운영 1년 만에 유산으로 받은 땅 300석지기를 모두 날렸다.

토월회가 망해 해산하자 복혜숙은 영화에 출연하는 한편으로 ‘비너스’라는 카페를 열었다. 종로2가 옛 화신 백화점 뒤에 자리잡은 이 카페는 여배우가 운영한다 하여 장안의 화제가 됐고 내로라하는 재사들이 몰려들었다. 복혜숙은 외모만 예쁜 여배우가 아니라 인텔리여성이었으므로 각계각층 인사들과 대화 나누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비너스 단골손님은 정치인에서부터 문학인까지 다양했는데, 조병욱 박사를 비롯 여운형 박종화 홍사용 등등 쟁쟁한 인물들이 드나들었다. 밤이 되면 비너스에서는 시가 낭송되고 아리아가 흘러나오고 치열한 논쟁도 벌어졌다. 오페라 아리아는 복혜숙이 부르는 것으로 복혜숙은 1930년 ‘애(愛)의 광(光)’이라는 타이틀로 재즈를 취입할 정도로 노래를 잘했다. 비너스 명물은 버터 바른 오징어를 간장에 찍어 정종과 함께 먹는 것이었다.

복혜숙은 비너스를 8년 동안 운영했는데, 자본금 250원으로 시작해 다른 사람에게 넘길 때는 1만여원의 외상값만 남았다.



복혜숙은 자신의 공연 때마다 맨 앞에 앉아 구경하던 열성 팬 김성진과 결혼했다. 의학도였던 그는 복혜숙보다 한 살 어리고 게다가 일찍 결혼한 부인과의 사이에 자녀도 넷이나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5년간의 열애 끝에 결혼했다.

당시는 여배우가 결혼하면 연기자로서는 사형선고가 내려진 것과 같았으나 복혜숙은 결혼 후에도 연기를 계속 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결혼했다.

하지만 막상 결혼을 하니 촬영 때문에 늦게 들어오는 복혜숙에게 남편은 화를 내기 시작했다. 또 시어머니는 영화 속에서 복혜숙이 다른 남자와 부부 역할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복혜숙은 할머니, 그것도 짝이 없는 할머니 역을 주로 맡았다. 1932년 <수업료> 이후 복혜숙은 모든 작품에서 할머니 연기를 했고 이후 노역 연기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돼버렸다.

“밖에서나 인기있는 스타지 집에 들어오면 남편 눈치 보기 바빴다. 열렬한 연애 끝에 결혼했지만 결혼하지 말았어야 할걸 하고 후회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힘든 시집살이 중에도 복혜숙은 연기를 계속해 50년 동안 3백편이 넘는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했다. 젊어서부터 시작한 할머니 연기는 진짜 할머니가 된 후에도 계속돼, 1972년 TV 드라마 <사슴아가씨>에서까지 안경을 쓰고 장난기어린 웃음을 띤 ‘복혜숙 할머니’를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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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인쇄매체의 전성기이던 8,90년대에 영화전문지 스크린과 프리미어 편집장을 지냈으며, 굿데이신문 엔터테인먼트부장, 사회부장, LA특파원을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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