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해탄에 빠져 동반자살한 윤심덕과 김우진
현해탄에 빠져 동반자살한 윤심덕과 김우진
  • 김다인
  • 승인 2008.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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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의 찬미’ 남기고 간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 / 김다인



[인터뷰365 김다인] 우리나라 개화기(1920~30년대)를 주도했던 여성 예술가 세 명을 꼽자면 시인 김일엽(1896-1971), 화가 나혜석(1896-1948), 그리고 성악가 윤심덕(1897-1926)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모두 일본에 유학 가서 신문물을 접한 후 당시 여성들과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승려이자 시인, 수필가인 일엽스님은 이화학당 졸업 후 일본 유학을 했으며 1920년에 잡지 <신여자>를 창간, 여성해방을 주창했다. 여성에게 족쇄처럼 채워진 유교의 굴레를 벗어나 자유연애를 주장했으나 결혼에 실패한 이후 환멸을 느껴 스님이 되었다.

한국 최초의 여성화가 화가 나혜석(1896-1941) 역시 일본에서 공부를 했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1회부터 5회까지 입상을 했으며 여성화가로서는 최초로 개인전도 열고 소설도 썼다. 나혜석은 현모양처보다는 자신의 예술을 추구하다가 1929년 이혼을 당했으며 이후 1933년 삼천리에 ‘이혼고백서’를 연재하는 등 기존의 관습에 항거했다.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1897-1926)은 앞의 두 여성 예술가와는 좀 다른 일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일본 동경음악학교에서 성악을 공부한 재원이었으나 유부남인 김우진과 동반자살을 해 세상을 들썩이게 한 것이다.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苦海)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후렴)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설움


윤심덕이 1926년 자살하기 직전 부른 대중가요 ‘사의 찬미’의 가사 일부다.

이 곡은 ‘다뉴브강의 잔물결’을 번안한 것으로 한국 대중가요의 효시로 보는 시각도 있으며 한국어 음반으로는 처음으로 일본에서 발매되었다. 이 노래는 윤심덕이 김우진과 현해탄에 몸을 던지면서 더욱 화제가 됐다.

1926년 8월 4일 새벽 부산과 일본 시모노세키를 오가던 부관연락선이 현해탄을 건너 부산으로 향하던 중 남녀 한 쌍이 물에 빠졌다. 즉시 배를 멈추고 부근을 수색했으나 종적을 찾지 못했다. 승객 명부에는 남자는 김수산, 여자는 윤수선이라 적혀있었고 유류품으로는 여자 지갑에 현금 140원과 몇점의 장신구, 남자 지갑에 20원과 금시계, 만년필로 쓴 유서 등이 있었다. 이들은 가명으로 탑승한 김우진과 윤심덕이었다.

8월 5일 각 신문에는 이 사건이 대서특필됐다.

‘현해탄 격랑중에 청춘남녀 정사. 극작가와 음악가가 한떨기 꽃이 되어 세상시비 던져두고 끝없는 물나라로’ ‘장안을 들썩이게 한 악단의 여왕과 백만장자의 정사극’ 등의 제목을 단 기사들이 앞다퉈 실렸으며 김우진과 윤심덕의 살아온 내력들이 소상하게 특집으로 다뤄졌다. 심지어 이 사건에 대해 독자들의 찬반투고까지 연일 실렸다. 실로 세상을 뒤흔든 일대 사건이었다.

센티멘탈리즘과 니힐리즘의 결정체라 할 동반자살을 감행한 두 남녀는 당시 최고 지식인으로 문학과 성악, 연극에서 특별한 존재감을 지니고 있었다. 나이도 30세 동갑이었다.

윤심덕은 1897년 평양에서 김우진은 같은 해 장성에서 태어났다.

윤심덕은 근근이 살아가는 가정의 4남매 중 둘째딸로 태어났으며 김우진은 벼슬을 한 만석꾼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났다.

윤심덕은 큰 키에 노래 솜씨가 빼어나고 성격이 활달했다. 어려운 형편에도 평양사립숭의학교에 들어간 건 부모의 교육열 덕이었다. 윤심덕은 성악을 하겠다며 서울로 유학, 경성여고보(경기여고 전신) 사범과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졸업 후 18세의 나이로 교사를 하다가 19세인 1915년 조선총독부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동경음악학교로 유학을 가게 된다.

김우진이 일본 유학을 간 것도 1915년이었다. 김우진은 엄한 부친의 뜻을 따라 집안의 토지 관리를 위해 구마코토농업학교로 유학을 갔으나 적성에 맞지 않자 부친의 뜻을 어기고 와세다대학교 영문과로 전학을 했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1921년, 3.1운동 2년 후 일본 유학생들끼리 고국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자는 취지에서 극예술협회를 결성한 때였다. 이들은 고국에 가서 연극 순회공연을 하기로 뜻을 모았다.

윤심덕이 활달하고 적극적이어서 따르는 남자들이 많았던 반면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여러 계모 손에서 자라난 김우진은 소극적이고 사색적이었다.

윤심덕은 자신에게 대시하는 여러 남자 가운데 특히 홍난파와 가까운 사이였다. 작곡도 하고 바이올린도 켜는 호남아 홍난파와 윤심덕은 음악적 동지이자 친구이자 애인이었다. 김우진은 일찍 결혼해 고향에 아내와 딸을 두고 있던 처지였다.

성격과 환경이 판이하게 달랐던 두 사람은 별로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극예술협회에서 부산 공연을 하는 사이 두 사람은 예전에는 없던 호감을 서로에게 가지게 됐다. 여기에는 윤심덕의 적극적인 성격이 한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는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윤심덕은 1923년 동경음악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귀국한다. 귀국 무대에서의 반응은 대단했으며 이후 각종 무대에 쉴새없이 초대받는 유명인사가 됐다.

동아일보는 윤심덕의 공연에 대해 ‘밤 지난 해당화의 붉은 화판이 아침이슬에 젖은 듯한 오렌지빛 작은 입술로 옥반에 흐르는 구슬소리와 같이 곱고도 청아한 멜로디를 울리어 한없는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다’(1926. 8.6.)고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윤심덕에게는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었다. 그의 가족은 윤심덕이 귀국하자 모두 서울로 이사를 했으며 동생 두 명의 학비는 당연히 윤심덕의 몫이었다. 명성에 비해 그리 큰 수입을 올리지는 못한 윤심덕은 개인교수 등을 하며 뛰어다녔으나 생활고에 기진하고 좌절했다.

김우진은 윤심덕보다 1년 늦게 귀국했다. 하지만 엄한 부친 때문에 신문화에 대한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한 채 목포에 머무르고 있었다. 윤심덕은 가끔 목포로 내려가 김우진을 만나곤 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윤심덕은 남산 밑 부호 이용문과의 스캔들-이용문이 돈으로 윤심덕을 샀다는-이 터지자 북만주로 피신했다. 윤심덕이 6개월 만에 귀국했을 때 김우진은 서울에 머무르며 날카로운 필설을 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윤심덕은 이미 예전의 환호를 잃었다. 귀국해서 가진 무대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실망한 윤심덕에게 김우진은 연극을 해보라고 권했고 윤심덕은 그 말을 따라 극단 토월회에 입단한다.

윤심덕의 토월회 입단은 빅 뉴스였다. 신문들은 ‘악단의 여왕 배우 변신’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고 식구들 반대에 부딪힌 윤심덕은 여관방을 얻어 기거하며 연기 연습을 했다.

하지만 윤심덕의 연기는 딱딱했고 성악을 한 목소리는 오히려 대사 전달에 방해가 됐다. 더군다나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라고 우러러보던 대중은 연극배우로 변신한 윤심덕에게 화류계 여자가 됐다는 식으로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윤심덕은 재기에 실패하자 좌절했고 김우진은 부친과의 갈등과 행동할 수 없는 지식인인 자기 모습에 좌절했다. 결국 김우진은 윤심덕에게 말도 없이 다시 일본으로 가버렸다.

김우진이 일본으로 가자 윤심덕은 일본 레코드회사에 취입 의사를 밝혔다. 일본 회사 측은 대환영이었다. 윤심덕은 김우진의 동경 주소를 알아낸 후 오사카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배웅 나온 친한 작가 이서구에게 선물로 무엇을 사다줄까 묻자 이서구는 넥타이나 하나 사 보내라고 말한다. 죽어도 사와요? 라고 농담조로 묻는 윤심덕에게 이서구 역시 농으로, 죽으려거든 넥타이나 부치고 죽으라고 한다.

일본 레코드회사에서 ‘사의 찬미’를 비롯해 26곡을 취입한 윤심덕은 레코드판과 함께 파란 실크 넥타이를 이서구에게 배편로 부친다. 이 넥타이는 윤심덕이 죽은 후 이서구 손에 닿았으며 이서구는 이 넥타이를 차마 맬 수 없어 47년 동안 고이 보관했다.

레코드 취입을 마친 윤심덕은 묵고 있던 오사카 여관에서 자신의 짐을 다 정리한 후 김우진에게 전보를 쳐 오사카로 와달라고, 오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고 한다. 당시 김우진은 동경에서 독일 유학을 꿈꾸며 독일어 공부를 하고 있었다. 김우진은 함께 공부하던 친구 홍해성에게 윤심덕의 편지 내용 알리고 오사카행 열차를 탄다.

오사카에서 만난 윤심덕과 김우진은 며칠을 함께 보낸 후 귀국하는 배를 타고 현해탄에 빠져 동반자살을 한다. 그믐이 가까운 어두운 바다였다. 두 사람의 시신은 김우진 집안에서 현상금까지 내걸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이 충격적인 사건을 접한 일부 사람들은 윤심덕은 이미 자살을 결심했으며 김우진은 그런 윤심덕에 이끌려 돌발적인 죽음을 택했다고 추측했다. 하지만 일제 하 막막했던 시절 당시의 젊은이들, 특히 김우진처럼 충돌지점에 서있는 이에게는 깊은 좌절과 번뇌가 의식 속에 자리하고 있어 선택은 순간이었을지라도 결정은 잠재해 있었을 것이라 보여지기도 한다.

두 사람 사건이 거의 일주일 동안 대서특필 되는 가운데, 춘원 이광수는 ‘사회의 죄인’이라는 제하의 글에서 이 사건에 대해 언급해 눈길을 끌었다.

이광수는 ‘죽음 자체에는 시비를 걸 수 없으되 두 사람이 다같이 조선 땅에서 나고 자랐으며 해외에 나가 고등교육을 받게 된 학비도 조선사람이 부담한 덕택이니 그들은 조선사람들에게 책임과 의무를 이행해야할 채무가 있고 그 채무를 상환하기 전에 이슬로 사라졌으니 조선사회 조선인에 대한 죄인’이라 주장했다. 지식인의 책임론을 제기한 것이다. 이어 그는 사회의 무정함도 지적했는데 ‘조선사회에서는 분수 이상으로 찬양하다가도 한번 그르치자 정도 이상으로 혹독하게 대한다’며 윤심덕에 대한 사람들의 추앙과 멸시를 지적했다.

특집기사들이 시들해지자 루머가 돌았다. 두 사람이 죽은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악기점을 운영하는 한편으로 윤심덕은 음악공부를 김우진은 문학공부를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한 음악평론가는 윤심덕의 모살설을 내세웠다. 레코드를 취입한 일본 레코드사 사장이 윤심덕이 취입을 끝내놓고 죽으면 그 레코드가 날개 돋힌 듯 팔려 나갈 거라는 계산에서 그리 했을 것이라는 억측을 한 것이다.

실제로 윤심덕의 자살로 덕을 톡톡히 본 것은 일본 레코드사였다.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두 사람의 자살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십만장 넘게 판이 팔려나갔다. 이광수 지적대로라면 윤심덕은 조선인에게 진 빚을 갚는 대신 일본인을 벼락부자로 만든 아이러니를 남긴 셈이었다.

윤심덕의 파란만장한 삶은 1991년 <사의 찬미>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김호선 감독의 이 작품에는 장미희가 윤심덕, 임성민이 김우진, 이경영이 홍난파 역을 각각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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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인쇄매체의 전성기이던 8,90년대에 영화전문지 스크린과 프리미어 편집장을 지냈으며, 굿데이신문 엔터테인먼트부장, 사회부장, LA특파원을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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