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의 베컴, 데이비드 벤틀리
제 2의 베컴, 데이비드 벤틀리
  • 이근형
  • 승인 2008.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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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컴을 위협하는 ‘잉글랜드의 미래’ / 이근형



[인터뷰365 이근형] 2008년 3월 26일, 프랑스의 스타드 프랑스 경기장에서 펼쳐진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A매치 친선 경기는, 세계적인 수퍼스타 데이비드 베컴 (LA 갤럭시) 의 A매치 100번째 출장이었기 때문에 22명의 총 선수들 중 단연 화젯거리였다. 좀더 일찍 100번째 경기를 치러 센추리 클럽에 가입할 수 있었던 기억 때문에 비교적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5번째로 센추리 클럽에 가입하는, 그것도 전 세계인이 다 아는 축구의 스타 베컴의 100번째 경기였기에 무엇보다 특별했다.


베컴은 여전히 자신의 주 포지션인 오른쪽 윙 미드필더로 나와 그라운드를 누볐다. 하지만 냉정하게 경기를 바라보는 많은 축구 전문가들은 베컴의 선발 출장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왜냐하면 이탈리아 출신의 명장 파비오 카펠로 잉글랜드 감독이 경기 직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베컴을 무리하게 선발 출장하지 않고, 작금 프리미어리그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선보이는 윙 미드필더 데이비드 벤틀리 (David Bentley)를 선발로 쓰겠다고 공언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컴이 선발로 나온 것은, 전 세계인이 주목하는 이 베컴의 100번째 경기를 심하게 의식한 카펠로 감독의 의중이라는 게 대세다. 그러나 스타 플레이어보다는 실력과 성적을 중요시 여기는 카펠로 감독의 본능은 결국 표출되었다. 후반 17분, 카펠로 감독은 베컴과 벤틀리를 교체시켰다.


벤틀리는 교체되어 그라운드를 밟자마자 프랑스의 왼쪽 사이드를 철저히 공략하면서 과감한 크로스, 인사이드 돌파 등을 시도했다. 역시 07/08 프리미어리그에서 블랙번 로버스 소속으로 6골을 뽑아낸 그 실력 그대로였다. 많은 축구 언론은 데이비드 벤틀리의 프랑스전 활약에 주목했고, 결정적으로 베컴과 벤틀리의 교체 장면이 커다란 사진으로 형상화되면서 ‘옛 윙어와 떠오르는 윙어의 세대 교체’ 라는 뉘앙스의 보도도 나기 시작했다. 베컴에게는 너무 가혹한 반응이었을지 몰라도, 어쨌거나 더 이상 잉글랜드는 베컴에 의해 운용되는 팀이 아니라는 방증, 그리고 데이비드 벤틀리의 영향력이 이 정도로 커졌음을 의미했다. 게다가 이미 벤틀리는 카펠로 감독의 전임인 스티브 맥클라렌 감독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은 바 있다.


이렇게 소속팀 로버스, 그리고 잉글랜드 대표팀을 오가며 축구 팬들과 잉글랜드 축구 관계자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플레이어가 한 명 있었다. 그는 훤칠한 외모에 날개 포지션이 제격이라는 점에서 베컴과 많이 비교되곤 했었다. 물론 차이점이 있다. 베컴보다 덜 유명하며, 베컴과 달리 긴팔 유니폼을 입지 않는다는 것이겠다. (외모 차이는 보는 사람의 각자의 의견에 맡기겠다!) 하지만 벤틀리는 일단 언제 정상에서 하산할지 모르는 베컴보다는 더 중용되는 편이다. 그리고 애런 레넌 (토트넘 홋스퍼), 숀 라이트 필립스 (첼시) 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의 치열한 오른쪽 날개 싸움에 기름을 붓고 있는 장본인이다.



거기에 08/09 시즌을 앞두고 약 4년간 뛰었던 정든 블랙번 로버스를 떠나, 후안데 라모스 (스페인) 토트넘 감독의 러브콜에 의해 스퍼스 (Spurs) 멤버가 되었다. 토트넘 홋스퍼가 08/09 시즌 여름 이적 시장에서 루카 모드리치 (크로아티아), 히오바니 도스 산토스 (멕시코), 에우렐류 고메스 (브라질) 등 능력있는 자원들을 속속 수집하면서 많은 화제를 낳았는데, 앞서 언급한 이들 모두 유럽 축구가 주목하는 알찬 선수들이었다. 그러니까 후안데 라모스 감독과 토트넘 수뇌부가 지난 시즌 강등권과 중위권을 오가며 천국과 지옥을 경험한 토트넘을 완전히 바꿔놓기 위해 ‘돈 좀 썼다는’ 이야기다. 바로 그 토트넘의 위시리스트에 데이비드 벤틀리의 이름이 거론되었다는 것은, 벤틀리의 실력이 이 정도라는 뜻이다. 등번호 5번을 부여받고 현재 주전 미드필더로 활약하고 있는 벤틀리의 이야기다.



‘벵거의 아이들’ 에서부터 시작한 벤틀리의 축구 인생


데이비드 마이클 벤틀리 (David Michael Bentley) 는 1984년 8월 27일, 잉글랜드의 캠브릿지셔 주의 시골 도시 피터버러에서 태어났다. 벤틀리는 지역 축구 소모임에서 유소년 축구선수로 뛰다가, 아르센 벵거 아스날 감독과 아스날 스태프의 눈에 띄어 아스날 유소년 축구팀에 가입하게 되었다. 사실 아스날이란 클럽 자체가 모국인 잉글랜드에서 유소년 축구선수를 양성하는데 크게 관심이 없는 편이고 (그들은 해외 유소년 축구 지사만 수십개다), 우리가 잘 알듯 아스날 유소년 출신의 스타 플레이어를 찾아볼 수 없지만, 이 글에서 밝히는 벤틀리와 함께 저메인 페넌트 (리버풀), 스티브 시드웰 (아스톤 빌라) 등의 유능한 선수들을 길러내며 어느 정도 체면 치레를 한 셈이다.


벤틀리는 윙 미드필더와 윙어, 그리고 포워드를 오가며 아스날 유소년 클럽에서 성장했다. 그리고는 01/02 시즌부터 아스날 성인 팀에 격상하여 후보 선수의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성인 팀에서 데뷔전을 치르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려, 무려 3년여만에 아스날 1군 선수들과 호흡을 맞추게 되었다. 그는 02/03 시즌 잉글랜드 FA컵 옥스포드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콜로 투레 (코트디부아르) 의 교체 선수로 출전해 팀의 승리로 무난한 데뷔전을 치렀다. 그 후 리그 경기 1회 출전했고, 결정적으로 아스날이 무패 행진을 달리던 03/04 시즌 FA컵 경기에서 득점에 성공하며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 아스날의 중원을 이끌던 세계적인 윙어들인 융베리, 피레스 (비야레알) 의 이름을 뛰어넘을 수 없었던 꼬마 벤틀리는, 04/05 시즌 노리치 시티로 임대를 갔다.


벤틀리는 노리치 시티에서 주전 미드필더로 낙점받으며 약관의 나이에 리그 26경기에 출전해 득점을 꾸준히 하는 등, 발군의 기량을 선보였다. 하지만 노리치 시티의 챔피언십리그 강등을 막을 수 없었고, 결국 05/06 시즌에 앞서 아스날로 다시 복귀했다. 하지만 벵거 감독을 비롯한 스태프진은 벤틀리를 다시 다른 팀으로 임대 보내기로 결정했고, 벤틀리는 ‘자신의 축구 인생이 걸린 운명의 클럽’ 블랙번 로버스에 새 둥지를 틀었다. 이렇게 벤틀리는 축구 인생 전반전 내내 아스날과 별다른 인연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일까, 벤틀리가 08/09 이적 시장에서 토트넘 홋스퍼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스스로 “새로운 도전, 그리고 나의 첫 클럽인 아스날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다” 라고 밝힌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아스날과 토트넘 홋스퍼는 같은 하늘 아래 공존할 수 없는 견원지간이다.



‘마크 휴즈 감독의 남자’, ‘차세대 잉글랜드 주전’


2004년부터 블랙번 로버스를 이끌던 마크 휴즈 감독은, 벤틀리의 임대 영입에 대해 크게 반겼다. 그러면서 그에게 곧바로 주전 자리를 내줬다. 아스날 유스 출신이라는 점, 그리고 노리치 시티를 이끈 점에 크게 점수를 준 것이었다. 벤틀리는 여기에 부응하는 실력을 보여줬다. 비록 오른쪽 윙 미드필더 자리에는 브렛 에머턴 (호주) 등 라이벌이 있었지만, 벤틀리는 이에 개의치 않고 어느새 에머턴을 밀어내고 완연한 붙박이 주전을 점할 수 있었다. 그는 04/05 시즌부터 블랙번에 합류한 노르웨이 출신의 미남 윙어 모르텐 감스트 페데르센과 함께 블랙번의 좌우 날개를 책임지었다.



2006년부터 이어지는 05/06 시즌과 06/07 시즌은, 벤틀리가 프리미어리그에서 꽃을 피운 시기였다. 먼저 벤틀리는 05/06 시즌 후반기에서 맨유와의 경기에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팀의 4대3 승리를 이끌었다. 그러면서 그 전까지 날개 요원이 지녀야 하는 공격성이 없다는 세간의 평을 단숨에 잠재워 버렸다. 06/07 시즌은 벤틀리의 프리미어리그 절정기였다. 페데르센과 함께 블랙번의 좌우 날개로 박차를 가하며 시즌의 거의 모든 경기를 출장했고, 게다가 자신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많은 어시스트 기록인 11개를 뽑아내며 프리미어리그의 떠오르는 윙어 자원으로 이름을 날렸다. 마크 휴즈 감독의 절대적인 신임은 말할 필요 없었다.


벤틀리는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잉글랜드 21세 이하 대표팀에서 활약했는데, 2007년 프리미어리그에서 떠오르는 샛별이니만큼 스티브 맥클라렌 당시 감독의 눈에 안 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먼저 벤틀리는 잉글랜드 B팀에 새로 가세하며,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면 잉글랜드 1군 팀에 이름 올리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바로 그것은 현실로 이뤄졌다. 벤틀리는 같은 해인 2007년부터 잉글랜드 1군 팀으로 올라갔으며, 데이비드 베컴이 없는 오른쪽 날개 자리에 올라가 오언 하그리브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와 함께 베컴의 전유물인 ‘등번호 7번’ 을 서로 경쟁하며 상한가를 달렸다. 맥클라렌 감독은 졸레옷 레스콧 (에버턴), 마이카 리처즈 (맨체스터 시티) 와 함께 벤틀리를 ‘잉글랜드의 미래’ 로 손꼽았고, 벤틀리 역시 대표팀에서도 준수한 활약을 펼치며 주변의 기대에 부응했다.


프리미어리그에서의 뛰어난 활약, 그리고 그것을 잉글랜드 대표팀으로 고스란히 옮기는 그 상응성. 벤틀리는 심지어 지금 토트넘 홋스퍼에 이적한 이후부터, 지금보다 더 나은 커리어를 갖게 될 것이라고 호평하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다. 벤틀리의 마지막 블랙번 로버스 소속 시절인 07/08 시즌, 리그에서 6골과 어시스트 11개를 기록하며 절정에 달했다라고 평을 받았는데, 이것이 벤틀리가 보여준 실력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소리다. 물론 벤틀리에게 어려운 점과 단점이 있기는 하다. 날개 자원으로써 인사이드 돌파와 크로스는 좋지만, 큰 경기 경험이 없어서 타 날개 요원들과 앞으로 계속 라이벌전을 해야 한다는 점 말이다. 게다가 베컴이 다시 정상 궤도에 올라 잉글랜드의 등번호 7번을 되돌려 받았다. 앞으로 카펠로 감독도 베컴에게 큰 기대를 걸 모양이다. 그러니 벤틀리가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탄탄대로를 달리라는 철칙 같은 것은 없다.



아스날에 복수하기 위해 토트넘에 간 ‘제 2의 베컴’


우리가 잘 알다시피 마크 휴즈 감독은 2004년부터 4년간 지휘봉을 잡았던 블랙번 로버스를 떠났고, 데이비드 벤틀리 역시 자신의 프로 커리어에서 가장 밝은 별이 되었던 블랙번을 떠나 북런던의 토트넘 홋스퍼로 자리를 옮겼다. 여담이지만 마크 휴즈 감독과 벤틀리 모두 다 모험심이 대단한 사람들이다. 마크 휴즈 감독은 선수 시절 축구의 새로운 땅을 개척하며 웨일즈의 몇 안되는 해외파 선수로 이름 날렸고, 감독직 역시 잉글랜드 대표팀의 러브콜을 받거나, 이렇게 갑부 구단으로 떠오른 맨체스터 시티의 스카우트를 과감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벤틀리 역시 후안데 라모스 감독의 새로운 프로젝트에 한 몸 바쳐 토트넘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물론 벤틀리가 블랙번을 떠난 이유는 마크 휴즈 감독의 맨체스터 시티행, 그리고 새로 블랙번 사령탑에 오른 잉글랜드 축구의 전설 폴 인스 (Paul Ince) 와의 마찰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일전에 벤틀리는 폴 인스 감독이 블랙번의 지휘봉을 잡는다고 했을 때, 그의 아마추어적 지도자 경험에 대해 일침을 날리며 비판을 가했다. 잘 알려졌다시피 폴 인스 감독에게 있어서 블랙번 로버스 감독 수락은 공식적인 메이저 감독 커리어 첫 번째 단계다. 그 전까지만 해도 잉글랜드 하부 리그의 MK 돈스를 이끄는 등, 선수 시절과는 딴 판으로 상당히 아마추어적이었다. 아버지처럼 따랐던 마크 휴즈 감독의 맨체스터 시티 이적, 그리고 폴 인스 감독에 대한 불만으로 벤틀리가 토트넘으로 간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서두에 밝혔듯, 벤틀리는 자신의 축구 인생에서 새로운 도전과 함께 자기가 한때 몸담았던 아스날을 향해 복수하기 위해 토트넘으로 건너갔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유럽 최고의 명장 후안데 라모스 감독의 눈독에 든 것이 벤틀리의 네임 밸류가 이 정도라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일단 벤틀리는 아스날이라는 거대한 모함 안에서 커가기보다는, 작은 팀이라도 그곳에 들어가 자기가 주인공이 되는 것을 꿈꾸던 야망 큰 젊은이다. 든든한 지원군보다,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지금의 자리에까지 오른 벤틀리다. 게다가 자신을 믿지 못하던 아스날이었으니, 응당 스포츠로 복수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을 것이다. 비록 최근의 상한가에 비해 조금 ‘의외의’ 클럽에 갔다지만, 벤틀리의 새로운 도전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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