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대 배우 매니저 ‘방돌이’ 방정식 ⑤ <끝>
1세대 배우 매니저 ‘방돌이’ 방정식 ⑤ <끝>
  • 김다인
  • 승인 2008.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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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 때문에 장위동 터줏대감 돼 / 김다인



‘그때 그 인터뷰’는 90년대 활발하게 활동하던 영화계 사람들을 인터뷰해서 1993년에 쓴 글입니다. 첫 번째인 강우석 감독 편에 이어 한국 영화계 1세대 매니저 방정식씨에 관한 글을 소개합니다-편집자 주



[인터뷰365 김다인] 방정식씨는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복무를 마치자 부친은 공무원이면 입에 풀칠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며 외아들을 조달청에 넣었다.

한동안은 열심히 직장생활을 했다. 당시 조달청은 서울 효자동에 있었는데, 고향인 부여를 떠나 혼자 생활을 하고 있던 방정식씨는 종로 쪽으로 나와 영화를 보는 것이 낙이었다. 고교 시절 방정식씨는 영화 <벤허>를 보러 대전에서 서울에 올라올 정도로 영화에 관심이 많았고 연기자가 되어 ‘타도! 신성일’을 하는 것이 꿈이었다.

방정식씨 운명이 바뀌게 된 것은 단성사에서였다.

“우연히 해군 동기생을 극장 입구에서 만났어요. 왜 여기 서있느냐고 물어보니까 입회 나왔다는 거예요. 입회가 뭐냐? 그랬더니 영화사에서 나와 관객 수를 체크하는 거래요. 그 친구 삼촌이 동남아영화사를 하고 있대요. 이거구나 싶었어요. 영화배우가 되고 싶었어도 막상 어떻게, 누구를 찾아가야 할지 막막했는데 그 길이 바로 앞에 보이는 것 같더라구요.”

그 길로 잘 다니던 조달청을 때려치웠다. 나이 스물둘에 부모님이 정한 아내와 결혼해 어엿한 가장이기도 했던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부모와 아내의 시선을 외면하고 꿈꾸었던 세계로 뛰어들었다.

영화계에 들어왔다고는 하지만 누가 그를 반겨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상현 감독이 “본명이 촌스럽다”고 하면서 지어준 대로 방영수 아닌 방정식이 되었어도 여전히 배우 되기는 힘들었다.

“배우가 되려면 제작부장이나 조감독들한테 잘 보여야 한다기에 열심히 밥 사주고 술 사주고 그랬어요. 감독은 어디 쳐다볼 수나 있었나요? 이제나 저제나 하고 연출부 허드렛일하면서 쫓아다니는 동안 밥값, 술값에 방 한 칸을 다 날렸죠.”

시골 부친이 마련해준 방을 날리자, 졸지에 무숙자가 되었다. 서울에는 일가붙이도 없으니 여관에 갈 돈이 없으면 서울역 대합실 의자에서 웅크리고 잤다.

연출부 허드렛일을 보면서 ‘기어코’ 영화에 데뷔하기는 했다. 김수용 감독 작품 <청춘무정>이 그의 ‘데뷔작’이다. 맡은 역은 주인공 신영균이 운전하는 차에 치이는 행인. 설사 그를 아는 사람도 얼른 알아보기 힘든 단역이었다.

“촬영 있는 날이 즐거운 날이었어요. 적어도 세끼 밥은 해결이 되잖아요. 연출부 조수들은 쥐꼬리보다 가는 돈으로 연명했기 때문에 세끼 다 먹고 여관잠 자는 것만도 행복이었어요.”

박호태 감독의 <대전장>에서 얼떨결에 제1조감독을 해본 후 방정식씨는 생각을 바꿨다. 연출부보다는 제작부가 나을 것 같았다. 제작부는 적어도 현금을 만지지 않는가.

그 당시의 제작부는 지금과 개념이 다르다. 지금은 영화사에 제작부장이 소속되어 그 영화사가 만드는 영화제작 진행을 총괄하지만, 그때는 제작 팀이 따로 있었다. 부장 밑에 몇 명이 한 팀을 이뤄서 영화사와 계약, 영화사의 돈을 집행하면서 배우 스케줄 잡는 일부터 현장 진행까지를 도맡았다.

“제작부 사람들은 이상한 버릇이 있어요. 영화사에서 돈을 타면 우선 옷을 쫙 빼입어요. 그 당시 최고로 비싼 세무점퍼에다 미제나 일제 티셔츠 같은 걸 받쳐 입죠. 그 다음에는 맛있는 음식으로만 골라서 진탕 먹는 거예요. 그러니 어디 술집에 가도 인기가 최고죠.”

제작부원의 으뜸 자질은 입담과 ‘어깨’였다.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몇몇 스타들은 대개 서너 작품을 동시에 찍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제작팀이 동시에 한 스타 스케줄에 매여 있는 경우가 많았다. 자칫 스케줄이 꼬이면 서로 자기네 촬영장으로 데려가기 위해 몸싸움까지 벌여야 했다. 그런 험한 일이 벌어질 수 있었으므로, 제작부 가운데는 힘 잘 쓰고 완력깨나 있는 인물들이 끼어 있곤 했다.

방정식씨가 제작 일을 보는 동안 그의 영화계 입성 목표였던 신성일은 매니저를 셋이나 거느린 대스타였다.

“신성일씨 매니저 세 명 중 한 사람은 대본만 보고 또 한 사람은 스케줄 체크하고, 마지막 한 사람은 의상을 들고 촬영장에 따라 다녔어요. 신성일씨가 왕자처럼 촬영장에 등장할 때 나는 현장 진행을 보는 입장이었죠. 스타는 정말 아무나 되는 게 아니로구나 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훗날 스스로 독립하여 제작팀을 이끄는 제작부장이 되었을 때 방정식씨 호기도 남부럽지 않았다. 잘 빼입고 무교동이나 명동을 으쓱거리며 다녔다. 영화담당 기자들이 충무로에 나타나면, 새벽까지 같이 마시고 놀았다. 그러는 동안 방정식씨는 ‘한탕주의’에 빠져 있었다.

“어리석은 생각이었어요. 평생 호의호식하고 살 줄 알았죠.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구요. 아내가 알뜰살뜰하게 돈을 모으지 않았으면 지금도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했을 거예요.”

영화사 돈을 위탁 관리해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 제작부 일을 하다보면 일단 쓰고 보자는 유혹에 빠져들기 쉽다. 제작비를 들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는 경우는 대개가 둘 중 하나다. 씀씀이가 너무 커져서 도저히 뒷감당을 못하고 빚더미에 올라앉거나 아니면 여자한테 빠져서 이성적인 판단이 마비된 상태거나. 그런 일들이 일어나면서 제작부를 보는 눈이 곱지 않았다.

“제작부 하면서 한 같은 게 맺혔어요. 사람들이 좋은 눈으로 보질 않는 거예요. 물론 잘못한 제작부들이 있었으니까 그렇기도 했지만 그냥 부르지도 않아요. 꼭 ‘제작부놈들’이라고 그런단 말이에요. 그 말 밑에는 제작비를 슬쩍해서 자기 뱃속을 채우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잔뜩 깔려 있어요.”

제작부장을 그만두고 매니저로 전업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차라리 사람에게 자기 시간을 투자하면 나중에 고맙다는 인사라도 받을 게 아닌가 싶었다.

당시 배우 매니저는 가수 매니저와는 달라서 계통이나 질서가 잡혀있지 않았다. 70년대 가수 남진, 나훈아 등을 발굴하고 키워내면서 뿌리내린 가요계 매니저 시스템과는 비견이 되지 않았다. 그나마 꼽을 수 있는 이들이라면 60년대 김승호 박노식 일을 봐주던 김진, 신성일 매니저였던 박광수 이종운, 그리고 강수연 매니저였던 채귀정씨와 최진실 매니저 배병수씨 등을 들 수 있을 뿐이다.

방정식씨는 배우들과 매니저 관계를 맺을 때 자기 개런티에 대해 이야기해본 적이 없다. ‘자신들이 알아서 주는’ 관행을 여태까지 고집하고 있다.

“요즘 몇퍼센트로 계약하고 그러는 모양인데 난 그런 식은 적성에 안 맞아요. 사람대 사람으로 믿어서 같이 일하니까 그 부분도 서로 믿어야 한다는 생각이죠.”

그래서인지 방정식씨는 수중에 별로 가진 것이 없다.

영화배우가 목표였던 그의 꿈은 이뤄지기는 했다. 영화 10여편 출연했기 때문이다. 그 첫 작품이 <청춘무정>이라면 ‘고별작’은 정윤희 매니저를 하고 있을 때 찍은 <강변부인>이다.

사실 방정식씨의 외모는 신성일 같은 미남은 아니지만 강렬한 개성이 풍겨나온다. 요즘으로 말하면 성격배우 타입이다.

<강변부인>에서 그가 맡은 역은 고독해하는 강변부인 정윤희에게 “쇼팽을 좋아하시나요?”라고 대사 한 마디를 던지면서 작업을 거는 한량이었다.

“그게 그렇게 안되더라구요. 글쎄, 쇼팽이 쇼빵으로 발음되질 않나, 유들유들해야 하는데 이건 꼬임당하는 부인보다 더 잔뜩 얼어있으니, 원”

그 한 커트를 찍기 위해 무려 4백피트의 NG필름이 버려졌다. 상대역을 맡은 정윤희가 보기 딱해 하니 더 안되는 것 같았다.

”그 이후로는 절대 영화 출연을 안해요. 영화배우를 하려면 타고난 ‘끼’가 있어야 하는 데 난 영 그게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완전히 포기했어요.”

그 결심을 하게 된 데는 이덕화의 핀잔도 한몫 거들었다. 자기가 출연하는 영화에 가끔 단역으로 연기하는 걸 본 이덕화가 그랬다. -“형, 형은 이 바닥 생활 몇 년인데 연기를 그렇게도 못하우?”

연기는 못해도 연기자는 잘아는 방돌이’ 방정식씨는 그래서 지금도 인간적인 매니저로 지금도 맹활약중이다.




■ 방정식씨의 근황


충무로 터줏대감인 그는 장위동 터줏대감이기도 하다.

제작부 말단 시절 장위동 월세 방으로 시작해 여전히 거기 산다. 장위동에 터를 잡은 이유는 제작 일을 보던 당시 배우 문희의 집이 장위동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제작부 말단이던 그가 해야 했던 중요한 일은 촬영 스케줄에 따라 스타를 촬영현장으로 모셔가는 일이었다. 내일 촬영이 있으면 오늘 저녁에 그 스타 집에 촬영 의상을 전해주고 다음날 아침 일찍 대기했다가 현장으로 데려가야 했다. 그래서 집에 들어가는 길에 문희에게 의상 가져다주고 아침에 같이 나오기 위해 장위동에 살기 시작했다.

이 인터뷰를 한 지 15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장위동에 살고 있다. 4년 전 가벼운 뇌졸중 증세가 왔는데 이덕화가 자신의 주치의가 있는 병원에 급히 연락해 조기에 치료를 했다. 지금도 계속 침 등을 맞고 있지만 거의 정상 회복된 상태다.

아들 둘 딸 둘을 다 출가시키고 손주 6명 보는 재미에 사는 그는 현역인 이덕화와는 가끔 연락을 하고 지내지만 은퇴한 정윤희와는 연락이 끊긴 지 오래다.

자신이 호탕하게 영화계를 누빌 때 아내가 알뜰하게 살림한 덕에 마련한 장위동 집은 지금 재개발을 눈 앞에 두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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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인쇄매체의 전성기이던 8,90년대에 영화전문지 스크린과 프리미어 편집장을 지냈으며, 굿데이신문 엔터테인먼트부장, 사회부장, LA특파원을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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