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화가 이철수의 인간냄새 흙냄새
판화가 이철수의 인간냄새 흙냄새
  • 김두호
  • 승인 2008.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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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투사처럼 살지 않았다”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민주화운동이나 노동운동이 산불 같았던 시절의 시위 현장에는 으레 이철수 화백의 걸개그림이 걸려있고 그것이 선봉의 깃발처럼 나부꼈다. 그래서 그가 첫 전시회를 연 1980년대 초부터 ‘민중예술가’라는 호칭이 따르고 사람들에게 그의 모습은 붓을 움켜 쥔 투사의 이미지로 떠오른다. 만나보면 그의 인간적인 실체는 성내고 다투는 것을 금기로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다. 힘 앞에 고개 숙이지 않고, 세상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의분(義憤)을 버리지 못해 그림으로 사회 참여를 해왔으나 그의 삶은 진솔했고 행동은 예술인의 울타리를 넘어서지 않아 누구에게 짓밟힌 적이 없었고 처벌을 받지도 않았다.

서울에서 살다가 산골로 내려가 씨 뿌리고 김 매는 촌부가 된 지도 22년째가 된다. 그래서 그는 이제 직업의 무게를 판화가보다 전업농부 쪽에 더 많이 두고 산다. 그의 농가를 찾은 날은 가뭄 끝에 장마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한 주말이었다.

이화백이 사는 제천군 백운면 평동리는 운무가 자욱한 천등산이 눈앞에 있고 왼쪽으로 '울고 넘는 박달재’가 있다. 동네 끄트머리에 있는 그의 집은 그가 벼농사를 짓는 논과 오솔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열려 있는 대문을 들어서니 '천등산 그림자 일렁이는 앞 개울길'이라 새긴 목판이 보인다. 주인 부부가 마당에 꾸민 잔디 정원 복판에는 귀여운 연못이 있고 연꽃잎이 몇 개 물위에 떠 있다. 약속시간보다 한 시간 앞당겨 찾아간 기자에게 부인 이여경 여사가 뒤뜰에서 나왔다는 박하차를 대접한다. 찻잔에 박은 무늬도 이 화백의 판화 그림이다.

단비가 내리고 솔바람이 불어오는 마당과 주인의 작업실로 자리를 옮겨 가면서 인터뷰를 했다. 기자 만나기를 싫어하고 인터뷰도 좀체 해주지 않는 그가 모처럼 <인터뷰365>를 위해 마음을 열고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로 그는 3년째 창작활동을 않고 있었다.




인터넷에 지금 당신의 촛불 판화가 떠다닌다. ‘산으로 간 배는 오도 가도 못하고’라는 주제의 환경운동 관련 그림도 보인다. 여전히 현실 참여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고 사는가?

촛불판화는 7,8년 전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오래전에 그린 것이다. 시사적인 이슈와 연계되어 다시 살아난 것뿐이다. 꼭 그려 주어야할 단체나 사람이 찾아오면 목판 앞에 앉지만 내 작품을 위해 조각도를 놓은 지 3년이 넘었다. 농사일이나 하고 노니까 좋더라.


놀다니? 그럼 최근에는 창작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얘기인가?

평화롭던 우리 마을에 콘도가 들어온다고 해서 그것을 저지하는 주민대책위원회가 만들어졌다. 내가 공동대책위원장을 맡아 환경운동의 연장선에서 2년째 소송에 따른 일도 해야 하고 또 마을에 솟대공원을 만들려고 이웃사람들과 준비도 하고 있다. 언젠가 마을에 미술관도 세울 꿈도 있다. 그러나 1년쯤은 의도적으로 놀았다. 자기 성찰의 시간이 필요했다.


작가로서 요즘 당신의 내면이 궁금하다. 자기 성찰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고 있나?

작품 만들 때마다 나는 자문자답한다. 흘러가고 지나가는 잡생각을 붙잡아 무엇을 건져 올리려고 이토록 고통스레 이 일을 하는가 하고. 그만 둘 생각을 반복하며 산다. 버릴 나이를 쉰 살로 잡았다가 쉽게 그만두지 못할 거란 아내의 말대로 결국 목판을 버리지 못했다. 쉰 살이 넘은 지금은 떠날 나이를 다시 예순으로 잡아두고 있다.


당신은 1980년대에 정력적으로 작품을 발표하고 그림을 통해 투쟁하는 사회 참여 미술인이었다. 그러다가 1989년 독일 함부르크대학 초청 독일 순회전을 다녀온 후부터 작품세계에 많은 변화를 보여왔다. 우선 사회문제보다 삶의 본질이나 생명과 자연사상에 접근하는 소재들로 작품세계가 옮겨갔다. 선(禪)을 소재로 한 불교판화전도 열었고, <가만가만 사랑해야지, 이 작은 것들> <이철수의 나뭇잎 편지> 등 산문집이나 판화집을 통해서도 엿보게 했다. 떠나고 싶다는 생각은 왜 언제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참여 문화는 시대적 변화와 함께 소멸되므로 작가라면 누구나 시대를 의식하지 않는 순수 작품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다. YS 문민정부가 시작될 무렵부터 창작에 대한 새로운 생각들이 몰려왔다. 물론 서너 달 동안 유럽에 머물며 많은 생각을 했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나의 내면에 깔린 생명 자연 반전(反戰) 평화 그리고 존재에 관한 성찰은 변함이 없다. 그것이 내 삶과 작품의 주제다. 그만 둔다는 생각은 오래됐지만 특별한 동기와 계기는 없다.




‘판화가 이철수’가 나타난 과거로 돌아가 보자. 1981년 5공 권력의 서슬이 시퍼렇게 살아 나던 때에 겁 없이 저항 미술의 첫 개인전을 열었던 당시의 에피소드는 그동안 스스로 말문을 닫아 과거사로 묻혀 버렸다. 그는 젊을 때 “인생을 깊이 생각하다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살았다.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해 중고생 시절에 신춘문예를 넘볼 만큼 문학에 취미가 있었다. 또 아버지가 사다주는 만화책을 많이 본 탓인지 그림도 좋아했다. 제대하고 사회로 나올 무렵에도 철학 사상류 도서나 월간 사상계를 끼고 살았다.

어느 날 그는 문단 쪽과 달리 미술계는 현실 참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이를테면 참여 미술로 눈길을 돌린 계기였다. 그는 정신없이 응달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목판화로 옮겼다. 아기를 업고 행상을 하는 아낙네, 공장 굴뚝 밑에서 절규하는 여공이며 낫을 쳐들고 소리치는 시위대의 분노를 그렸다.

간신히 빌린 돈으로 전시장을 구했지만 돈이 없어서 철물점 핀으로 작품을 엉성하게 걸었다. 오픈행사란 것도 없었다. 관람을 온 누군가가 보도자료를 돌리도록 권했다. 그는 보도자료가 뭔지도 몰랐다. 이틀째 되는 날 작가 출신 국회의원이던 양성우 씨가 찾아와 어딘가에 연락해 단신기사로 전시회가 소개됐다. 그게 소동을 불러왔다. 민주화 운동을 하던 인물들이 줄줄이 찾아왔다. 푸대접하던 화랑 주인도 깜짝 놀라 그림으로 대관료를 요청했고, 자신도 만나기 힘든 미술계 인사가 찾아오고, 개관이래 두 번째로 많이 팔린 전시회라며 무명작가에게 경악했다.

방명록에 앞 다투어 사인을 남긴 재야 명사들은 모두가 새로운 민주화 운동의 목판화 시대를 열었다며 반겼다. 김지하 시인은 그를 ‘새로운 다크호스’라며 다른 인사들에게 소개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한동안 가족과 함께 불안감을 느껴야 하는 보이지 않는 감시의 눈들이 그림자처럼 붙어 다녀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수사나 정보기관에서 모른 척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어떤 일이 있었나?

감옥에 갈 각오로 매일 옷을 두껍게 입고 나왔다. 물론 판화집 <응달에 피는 꽃>은 판금되고 경찰서에도 불려갔다. 누군가가 “또 김지하 같은 스타 만들 필요가 있느냐”는 소리도 들렸다. 가택수색도 받았지만 구금된 일은 없었다. 시골로 이사한 뒤에도 한동안 관의 미움을 사 적응하느라 시간이 걸렸다.


현실 참여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진 동기에는 성장기의 영향도 있을 것 같다. 어릴 때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나는 서울에서 출생했으나 아버지는 경북 영덕, 어머니는 대구 분이다. 동경에서 유학생활을 한 아버지는 서예와 그림을 좋아해 사업을 하면서도 화구와 붓을 버리지 않았다. 방명록에 이름을 쓰면 특출해서 다음 사람이 피했다는 얘기도 있다. 무역업으로 성공해 부자가 됐으나 5.16이 터진 뒤에 파산했다. 가족들의 마지막 둥지인 안암동(서울) 집까지 넘어가면서 나의 암울한 유년기가 시작됐다. 학교에 가면 서무과에 단골로 불려가 수업료 독촉을 받았다. 깎아줄 것도 아니면서 왜 자꾸 부르느냐고 항변도 했다. 가난과 방황 속에서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반항 심리도 생겨났다. 그러다가 입대해 시간이 남아도는 당번병을 하며 책을 읽다가 섬광처럼 번쩍하고 머리속을 하얗게 만든 자기성찰의 계기가 왔다. 의식의 각성 같았다. 4.19와 5.16이 연계된 강만길 교수의 역사인식에 관한 논문과 마주치면서 역사를 읽지 못한 편협한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아! 아버지가 역사의 큰 수레바퀴에 치여 자기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인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 후 아버지 앞에서 늘 순종하고 무릎을 꿇었다. 사도 바울도 길에서 엎어졌다가 일어나면서 새사람이 됐다는데 글 몇 줄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 것이다.


남의 글이나 말을 순간적으로 깨닫고 의식이나 생활에서 변화를 갖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당신에게는 인연이 깊은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 멘토(Mentor) 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화가 많을 것 같다. (무위당은 원주에 살면서 생명사상운동을 한 인물로 재야인사들에게 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존경을 받았다.)

그렇다. 젊은 시절부터 그분이 떠나신 1994년까지 나에게도 ‘큰 바위 얼굴’이셨다. 그 분보다 먼저 만나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이현주 목사가 “너를 만나면 참 좋아할 분이 있다”면서 무위당 앞에 나를 데려갔다. 그런데 이미 그 분 책상 위에 박경리 선생이 가져다 놓았다는 내 첫 전시회의 팜플렛이 있더라. 이곳으로 이사 온 것도 “농사지으면 밥은 안 굶어”라고 곧잘 말씀하신 그 분 때문이다. 처음에는 자신이 초당을 지으려고 점찍어 둔 곳을 소개했으나 땅주인이 내놓지 않아 이곳으로 왔다. 생전에 우리 집에도 여러 번 다녀가셨다.


특별히 기억에 남아 있는 일이나 말씀이 있는가?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네 재주가 좋다”고 칭찬해주고 곧 “엎드려서 기어!”라고 하셨다. 나는 워낙 담배를 좋아해 30분 이상 이야기를 못한다고 말씀드리자 기꺼이 맞담배를 허용하셨다. 모두가 그 분 앞에 앉으면 숨소리도 죽이는 법인데 나와는 맞담배질을 하시며 편안하게 소통하셨다. 무슨 말을 세세하고 장황하게 늘어놓아도 “그 얘기 하지 말라고 한 거 아니냐” “해봐라” “좋구먼” 정도로 사물에 대한 생각을 대범하게 받아들이고 응답은 주로 굵고 짧은 몇마디였다. 그러다가 기분이 좋으시면 담요를 깔아서 글을 써주셨다.


당신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부르는 곳도 많고 찾아오는 사람도 많을 것같다. 지금은 주로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있나?

우리 부부는 아주 불가피한 문상(問喪) 일이 아니면 서울에 가지 않는다. 전시회 일이나 특별히 약속된 곳에 가야할 일이 간혹 있지만 그밖에는 마을을 떠나지 않고 산다. 선배 어른이나 유명한 분들도 나를 만나려면 이곳으로 찾아오시니 도리가 아니지만 어딜 가기가 싫다. 나를 찾아오고 부르는 사람 중에는 내가 무엇의 리더나 구심체가 되어주기를 희망도 하지만 나는 그런 게 가장 싫고 경계한다. 이철수는 목판과 호미를 든 사람이지 그 이상의 인물이 아니다. 내 앞에 누굴 줄서게 할 만한 인물로 착각 받을 때는 당혹스럽다. 또 그림공부를 하겠다고 제자를 삼아달라는 젊은이도 많다. 하루는 컴퓨터를 전공하는 청년이 찾아와 제자가 되기를 간청했다. 나는 당신이 생각을 잘못했다며 이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작업인데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라고 설득했다. 그게 진심이다.




이철수 화백이 자신의 작품 도록집에 쓴 글 중에 “가난하게 살아야지”라는 다짐 같고 소망 같은 말이 있다. 그는 지금도 부자가 아니지만 직접 농사를 짓는 2천여 평의 논밭이 있고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는 믿음직한 두 자녀가 있다. 이제 자신을 감시하는 눈도 의식 않고 산다. 이 화백이 절대로 말문을 열지 않을 것이라는 부인 이여경 여사를 설득했다. 직접 농사를 지은 옥수수와 과일을 대접해준 부인과 어렵게 한자리에서 인터뷰가 이루어졌다.



두 분이 인연이 된 이야기라면?

이화백) 서울 하월곡동에 있던 조그마한 빈민촌 교회에서 만났다. 나는 교회의 벽화를 그려주고 있었고 아내는 탁아소 봉사활동 일로 교회를 찾았을 때였다.


부군에 대한 솔직한 인물평을 듣고 싶다.

이여사) 아동문학가 권정생 선생님이 생전에 말씀하신 말이 가장 적절한 표현 같다. “철수에게 고운 것이 들어 있는데 이렇게 거친 걸 그리느라고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겠나”라는 말씀을 자주하셨다. 나는 한 번도 남편을 투사로 생각한 적이 없다. 그림을 그렸지만 그렇게 산 적도 없다. 본인도 그걸 지우며 사는 게 힘들어 보였다.


가장 힘들고 행복했던 기억들이 있다면?

이여사) 매우 고통스러웠던 때도, 그렇다고 아주 행복했던 기억도 별로 없다. 우리 부부는 특별하지 않고 그저 평범한 부부로 큰 변화 없이 살았다. 가난해서 힘든 때도 있었지만 좋은 결과나 성취감이 따르면 함께 기뻐하는 시간이 찾아왔다. 워낙 잘 나가지 않으니까 유명해졌다고 해도 실감을 못할 때가 많았다. 5년에 한번 정도 전시회할 때 제주도나 울릉도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면 신기하게 느껴진다.

이화백) 결혼해서 이 집이 세 번째 사는 집이다. 24시간을 함께 살다보니 부부 사이에 이야깃거리가 없다.


그래도 간혹 갈등이 없는지?

이여사) 우리 아이들이 엄마 아빠는 안 싸우고 사는 것 같다고 말하는 걸 보면 부부가 다툴 일이 없었던 모양이다.

이화백) 모든 일에서 의견이 같을 수는 없다. 어쩌다 서로 생각이 반대로 가면 우리의 대화는 며칠간 계속된다. 서로 보충된 생각을 주고받으며 합의점을 찾아 결정한다. 그것도 싸움인데 아이들은 모르고 지나간다. 분명한 것은 아내를 만난 것이 내 인생의 새로운 시작이었고 또다른 계기를 주었다.




이야기를 끝내고 밭으로 가는 이화백을 따라 나섰다. 우렁이를 키우며 유기농업을 하는 집앞의 논과 둑을 사이에 두고 토마토 고추 등 작물이 자라는 밭이 있다. 즉석에서 따낸 오이를 먹으며 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작품 활동을 하면서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지만 그는 아직도 40대의 건장한 젊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잠시 잡초를 뽑아든 흙 묻은 그의 손에서 판화가 이철수의 느낌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는 지금 순박한 농부로 그렇게 살고 있다.


[인터뷰이 나우] 한국 목판화의 새로운 장을 연 판화가 이철수는 지난 5월 16일부터 제주에서 기획전을 열고 있다.

오는 7월 31일까지 계속되는 이 기획전 ‘이철수-새는 온몸으로 난다’는 제주시 조천읍 제주돌문화공원 오백장군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민중미술로 시작해 판화를 통해 첨예하게 사회적인 발언들을 해오던 이 작가는 1980년대 후반부터 충북 제천시 외곽에 정착해 편안하고 담담하게 삶과 자연, 사람들을 판화에 담아오고 있다.

이번 제주의 전시 역시 작가가 자연과 사람, 삶에 대한 담담한 성찰이 간소하게 드러나 있는 그의 대표작으로 꾸며지고 있다. 오백장군 갤러리 내 아트존 달리북카페에서는 이 작가의 산문집과 작품, 아트작품도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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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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