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 맞는 신춘문예 3관왕 오탁번 고려대교수
정년 맞는 신춘문예 3관왕 오탁번 고려대교수
  • 김철
  • 승인 2008.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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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문학관 열고 20대로 돌아간 문단의 별 / 김철



[인터뷰365 김철] “나는 별을 좋아한다. 오탁번! 그는 우리 시대의 별이었다”

시인이자 소설가이면서 대학교수인 젊은 시절의 오탁번을 두고 문정희 시인이 한 말이다. 20대에 이미 문단의 스타가 된 오탁번 시인을 가장 상징적으로 함축한 말이 아닌가 싶다. 신춘문예 3관왕이라는 화려한 경력으로 대학 강단에 섰던 오탁번 고려대 교수(국어교육과)가 어느덧 정년을 앞두고 있다. 수도여자사범대를 거쳐 모교에서만 꼬박 30년간 제자들을 가르쳐 온 오 교수는 오는 8월이면 정든 강단을 떠난다. 그러나 그는 강단을 떠나는 것이 오히려 홀가분하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오 교수는 몇 년 전부터 20대에 못 이룬 꿈을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 제천에서 펴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를 했다. 그리고 그 꿈은 정년을 일찌감치 앞둔 4년 전 문을 연 ‘원서문학관’이란 결실로 이루어지기에 이르렀다. 제천시 백운면 애련리에 있는 문학관을 찾았을 때 오 교수는 젊은이들이나 쓸 법한 군모를 눌러쓴 채 정원에서 잡초를 뽑고 있었다.



얼룩무늬 모자를 쓴 오 교수의 모습은 영락없이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라는 맥아더 장군의 명언을 연상케 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교수로서 강단을 떠나되 명예교수로 사라지는 오 교수는 육군대위 출신으로 대학원을 졸업하던 29세 때 중위로 임관되어 육사에서 생도들을 가르치기 시작. 지금까지 강단을 떠난 적이 없다. 만감이 교차하는 듯도 한 모습이었다.

폐교가 된 자신이 다녔던 백운초등학교 애련분교를 사들여 꾸민 문학관의 정원은 꽤나 넓었다. 정원에는 수련이 자라는 작은 연못도 있고 갖가지 화초들이 심어져 있었다.



정원이 널찍하고 훌륭하게 가꾸어져 있습니다. 일찌감치 문학관을 세울 준비를 하셨군요. 생각보다 문학관의 규모가 큽니다.

“원래 꿈은 먹고 살 만큼 적당히 돈을 벌면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작품을 쓰면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맘을 먹은 것이 스물아홉 살 때였지요. 그런데 그게 쉽지 않더군요. 평생 교수로 지내다가 이제 제자리로 돌아간 느낌입니다. 정원은 원래 학교운동장이었습니다. 1천평 정도 될 겁니다. 6년 전에 매입해 그동안 직접 가꾼 것이지요. 물론 고향 친구들의 도움이 컸지요.”


문학관은 학생들이 쓰던 교실 3칸과 교직원 사택 그리고 숙직실 등을 활용해 꾸며졌다. 교실 복도에 들어서자 왼편 벽면에는 김춘수 구상 조병화 김남조 시인 등 저명 문인들의 사진과 육필원고가 든 액자 100여 개가 걸려 있었다. 세미나실 겸 방으로도 쓸 수 있도록 만든 교실에는 삼국시대 토기 등 골동품들이 전시되어 눈길을 끈다. 그 중에는 지금은 볼 수 없는 아주 낡은 책걸상도 눈에 띄었다. 오 교수는 자신이 고려대 재학 당시에 쓰던 것으로 학교 측으로부터 기증을 받아 전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잠시 의자에 앉아 보이는 그의 표정은 순간 대학생 시절로 되돌아간 듯 감회어린 표정이었다.



교수님은 대학교 다닐 때부터 스타가 된 것 아닙니까. 하늘의 별 따기 만큼이나 어렵다는 신춘문예에 그것도 세 번이나 당선했으니 당시에는 영웅이 된 것이나 다름없었죠. 그때 기분은 하늘을 찌를 듯했을 것 같습니다. 원래 어릴 때부터 문학에 관심을 두었습니까.

“중학교 다니 때부터 시집을 탐독하고 습작을 하면서 문학에 눈을 떴지요. 3학년 때 당시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던 잡지 ‘학원’에 시가 실리기도 했습니다. 대학교에 들어가 신춘문예에 두 번이나 당선되면서 유명해졌지요. 당시에는 하루에도 수백 통의 편지가 날아들 정도였습니다. 그 뒤 졸업하고 세 번째로 당선되자 나를 대하는 세상의 눈이 달라지더군요. 동화 소설 시에 이어 소설까지 당선되면서 ‘신춘문예 3종3연패’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게 나에게는 영광이 된 반면에 멍에가 되었습니다.”



그는 고대 영문과에 입학한 뒤 고대신문사 기자로 일하던 24세 때인 66년에 동화 ‘철이와 아버지’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처음 당선된 것을 시작으로 이듬해는 시 ‘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가 중앙일보에 그리고 소설 ‘처형의 땅’이 69년 대한일보에 각각 당선되는 진기록을 남겼다.



신춘문예 3관왕이라면 세상 부러울 게 없을 텐데 멍에라니요.

“그게 그렇지 않더군요. 작품을 쓴다는 것은 난산 끝에 아기를 분만하는 산고의 고통과 다름없거든요. 강의 준비하랴 글 쓰랴 내 딴에는 밤잠 설치고 코피 흘려가며 고통스럽게 쓴 작품들을 발표해도 ‘오탁번이 쓴 작품이니 당연하다, 그럴 것이다’하는 식의 평으로 주위에서 치부해버리는 겁니다. 장르가 다른 작품으로 신춘문예에 세 번 당선된 데다 대학교수라는 신분이 시나 소설을 쓰도 그저 쉽게 쓰는 줄로만 알고 문단에서조차 호의적으로 동참을 하지 않으니 말이 아닌 거죠”



오 교수는 지금까지 시집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아침의 예언’ ‘ 1미터의 사랑’ ‘벙어리 장갑’과 소설집 ‘처형의 땅’ ‘순은의 아침’ ‘저녁연기’ ‘손님’ 등 여러 권의 저서를 갖고 있다.

시집 ‘겨울 강’으로 ‘동서문학상’과 소설 ‘우화의 땅’으로 ‘한국문학작가상’ 등을 수상한 경력이 있지만 작품과 명성에 비해 그에게 주어진 상복이 그리 후한 편은 아니다.

그는 오래전부터 소설을 멀리하고 있다. 얻어지는 결과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소설을 쓰는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장기간의 시간이 요구되는 소설에 할애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그래서 50대부터 시에만 전념하고 있다고 말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듯 지금까지 발표한 수많은 작품들 중에 가장 애착이 가는 시가 있다면 어떤 것을 들 수 있겠습니까. 물론 애착이 가지 않는 작품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민족의 영산으로 일컫는 백두산 천지를 답사하면서 쓴 시 ‘백두산 천지’에 애착이 갑니다.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기울여 쓴 작품입니다. 시에 나오는 백두산에서 자생하는 나무 이름은 물론 야생화의 색깔까지 일일이 고증을 받을 정도로 만전을 기했습니다. 혹시 표현이 조금이라도 실제와 다르지나 않나 해서입니다. 시인은 죽어서도 시로 말하는데 내가 죽은 뒤에도 나를 말해줄 수 있는 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가까워 장백소나무 종비나무 자작나무 우거진 원시림 헤치고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순례의 한나절에...”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그의 ‘정지용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주말이면 문학관을 찾는 그는 지난 6일 종강을 겸해 교수로서 마지막 수업을 문학관에서 했다. 수강생들을 자비로 초청, 고별 강의를 한 것이다. 그동안 시인이자 소설가이면서 교수로서 수많은 제자들을 가르친 그에게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쓸 수 있는지 비결을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쉽고 간결했다.


“자신이 숨기고 있는 부끄러운 부분을 고백할 줄 알아야 진정한 시를 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만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까지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그는 그 예로 윤동주 시인의 시와 병원에서 사용하는 진단기기 MRI를 들었다. 암흑기의 일제하에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본유학까지 한 윤동주의 시가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사랑받는 것은 상류층에 속했던 자신에 대한 부끄러운 고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또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신체의 구석구석을 훤히 볼 수 있는 진단기기와 같은 눈이 필요하다고 했다.



흘러간 노랫말에 등장할 만큼 옛날부터 이름이 잘 알려진 천등산과 박달재와 가까운 백운면 청동리 출신인 그는 지금까지 고향과 관련된 동심이 어린 시를 많이 발표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남달리 가난했다고 한다. 박달재는 지게 지고 나무하러 다니던 곳이었다고 하는 그는 젊은 시절의 가난이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해 3, 40대까지만 해도 고향에 오기 싫었다고 웃는다.

그러나 그 시절의 가난은 오히려 그에게 향수를 자극하는 촉진제가 되어 어머니가 그립고 동심이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는 결심을 굳히는 작용을 하기에 이른다. 신춘문예 2관왕이기도 한 시인이자 대학교수로서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부인 김은자(한림대 국문과교수) 씨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백운의 옛 지명을 따 만든 ‘원서문학관’은 그렇게 해서 문을 열게 된 것이다.



정년을 하면 문학관 운영을 비롯해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많겠습니다. 정년에 즈음해 별도로 준비하는 것은 없는지요.

“정년에 맞춰 오는 8월22일 고려대출판부에서 출판할 계획 아래 현재 두 권의 책을 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지나온 삶의 기록을 모은 ‘나’라는 것과 시에 관해 썼던 글들을 엮는 ‘시인의 눈’이 그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담양의 소쇄원이 인상적이더군요. 원서문학관이 후세에도 길이 남는 정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시비와 곤충정원 같은 것도 조성하고 싶고 여러 가지 구상도 갖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뒷받침이 되지 않아 아쉽지요.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 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리고 시를 써도 앞으로는 동화와 어우러진 시를 쓸 생각입니다.



희망자는 누구든 시설 활용이 가능하도록 안내하는 자체 홈페이지도 갖고 있는 원서문학관은 매년 여름방학이면 어린이 시인학교과 문예창작교실 시낭송회 시인과의 대화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현재 한국시인협회 회장직을 맡고 있는 오 교수는 시문예지인 계간 ‘시안’을 발행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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