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백년언약> “이건 아니잖아요”
연극 <백년언약> “이건 아니잖아요”
  • 정중헌
  • 승인 2008.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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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과연 국립극단의 작품인가 / 정중헌

“한국연극 100주년 기념”

“한국을 대표하는 58년 전통의 국립극단”

“<태>와 <초분>으로 한국 연극에 새 바람을 일으키며 ‘오사단’을 이끈 중진 극작가 오태석 의 신작 희곡”

“올해 84세의 장민호 선생과 83세의 백성희 선생이 주연을 맡은 주인공 최고령 기록”





[인터뷰365 정중헌] 연극 애호가나 공연 관계자라면 이처럼 기념비적이고 역사적인 작품에 매혹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국립극단 오태석 예술감독이 연출한 <백년언약>. 40년 가까이 연극을 취재하고 평론하고 관극해온 필자 역시 올 봄부터 이 작품의 탄생을 고대했다. 특히 1968년 <환절기> 이후 40년 만에 부부로 나오는 백성희, 장민호 선생이 강행군 연습을 견디며 다진 노익장의 열정을 보고 싶었다. 60대 조역이 즐비하고 국립의 중견과 신예, 계원예고 여고생 13명, 유치원생 아역 배우 8명, 생음악을 연주하는 뮤지션 8명 등 무대에 오른 인원만 66명에 연출을 위시한 공연 스텝 16명, 국립극장장 등 극장 스태프 38명 등 120명에 이르는 대규모 공연의 완성도도 몹시 궁금했다.



그런데 첫날 공연 이후 ‘재미없다, 실망이다’라는 말이 연극가에 나돌았다. 필자는 후회할 것이라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6월 1일 일요일 낮 마지막 회 공연을 보았다. 해오름극장(대극장)에서 3년 만에 대하는 국립극단의 공연이라 내심 기대가 컸다. 그러나 막이 내리는 순간 “이건 아니잖아, 이건 아니잖아”라는 개그의 유행어가 머리를 스쳤다. 모든 기대가 일순에 무너져 내렸다.



‘이것이 한국연극 100주년 기념작일까. 한국을 대표하는 58년 전통의 국립극장 작품일까. 극작가와 연출가로 한국 연극사에 획을 그은 오태석의 작품일까.’



믿기지가 않았다. ‘황당했다 졸았다’는 연출가와 평론가들의 말을 들었지만 실망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다른 때 같으면 무대 뒤로 찾아가 존경하는 장민호 백성희 선생님께 인사올리고, 오태석 감독과 반가운 악수를 나눈 후 김재건 서희승 배우들과 한잔 하자고 했을 텐데 찾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정신이 몽롱해지고 속에서 열이 나 평소 먹지 않는 아이스크림으로 입안을 식히며 극장 앞을 한참이나 서성거렸다. 극장을 내려오면서 남대문 소실 때 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낙산사 화마로 목조건물의 취약성을 알았다면 전보다 몇 배의 대비책을 세웠어야 할 문화재청장이 소 잃고도 외양간마저 고치지 않아 국보 1호 남대문을 태워버린 것 아닌가.



정권이 바뀌면 지난 10년과는 다른 세상이 열릴 줄 알았다. 경제 살리고 정치 바로 잡으면 문화 예술 환경도 나아질 것 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100일 밖에 안됐는데 민심은 바닥이고, 거리는 학생들 촛불시위로 바람 잘 날이 없다. 연극배우 장관이 취임했을 때 우려가 많았지만 그래도 국공립 예술단체 하나라도 바로 세울 줄 알았다. 이 나라 최고의 극장, 최고의 공연이 이뤄지는 국립으로서의 권위와 위상이 업그레이드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대통령도 장관도 국민의 기대를 충족시키기보다 실망시키고 있다. 특히 문화 쪽은 할 일이 태산이라고들 하는데 소걸음에 우왕좌왕이라는 얘기가 측근들 쪽에서 나올 정도다.





차라리 국립극단이 아니었다면


예술작품은 보는 이의 취향이나 수준에 따라 평가가 다를 수 있다. <백년언약>을 국립극단의 국립극장이 아닌, 오태석 사단의 극단 목화가 민간 극장에서 공연했다면 실망스럽다는 평가보다 ‘실험적이다 우화적이다’라는 호평을 받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국립극장에 오른 만큼 목화 공연과는 달라야 했다. 우선 목화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수십억 대의 제작비가 투입됐다. 그 제작비는 국민이 낸 세금이다. 또 장민호 백성희 선생님과 국립극단 단원들은 연봉을 받는 최고 배우들이다. 스텝들도 일류급이다. 연출의 의도에 따라 라이브 음악에 고교생과 유치원생까지 무대를 채웠고 무대미술이나 소품도 세련미는 없으나 풍족해 보였다.



그럼에도 관객의 기대를 채우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완성도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오태석 작가를 한국 최고의 극작가로 꼽지만 최고의 연출가라고 보지는 않는다. 최고의 극작가라고 하더라도 쓰는 작품마다 걸작일 수는 없다. 오태석 작가는 <태> <초분> <사추기> <환절기> <백마강 달밤에> <심청이는 왜 두 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 등 한국연극 100년을 장식하는 수많은 명작을 남겼다. 하지만 <백년언약>은 작가가 희곡을 새로 쓰고 직접 연출해 여과과정이 없었다. 더욱이 국립극단 예술 감독을 맡고 있어 캐스팅에서 무대 전반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연습 기간이 촉박했지만, 오태석 작-연출에 누구도 작품에 대해 이견을 제기하거나 완성도를 체크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결과론이지만 작가가 작품만 쓰고 연출은 다른 베테랑에게 맡겼더라면 작품이 이렇게 외곬으로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극장장이나 극장/극단 자문위원 또는 연극계 중진을 대상으로 개막 전에 시연회라도 가졌더라면 이런 상태로 무대에 올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무대에 오른 <백년언약>은 제목이 무색했다. 누구를 위한 누구와의 백년언약인가. 팜플릿에는 '또 다시 백년을 이어갈 희망의 약속‘이라고 했지만 그것이 분단을 허무는 통일이라고 하기에는 설득력이 약했다.



오태석은 오늘의 청소년들한테 1910년 한일합방 이후 100년간을 조각보로 곱게 꿰맞춰 옛날 얘기처럼 들려주고 싶다고 의도를 밝혔다. 고난과 희망의 역사를 말하기 위해 삼국유사와 심청전에서 모티브를 따왔다고 했다. 삼국유사 설화에 나오는 쥐를 등장시키거나 인형을 사용하는 기법 등 오태석의 장기를 활용해 상징과 재미를 추구하려는 노력도 엿보였다.



전반부는 일제 패망에서 6.25 전쟁에 이르는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을 사실적으로 짚어나가 집중할 수가 있었다. 무대에 정차해버린 객차는 전후 사회상을 비추듯 ‘인애모자원’, ‘용산여인숙’, ‘크럽(클럽) 아리조나’, ‘毛 안과병원’ 등으로 간판이 바뀐다. 경무대에서 일하던 남편이 인민군 정치보위부에 끌려가 총상 당한 후 두 아이와 유복자를 둔 새댁(백성희)은 세파에 떠밀리면서도 악착같이 살아간다. 모자원에서 뱃속 아기를 뺏기고 호객하는 거리의 여인이 되기도 하고, 기지촌 클럽의 마담이 되어 홀로서려고 발버둥 친다.





후반부로 갈수록 어리둥절


여기까지는 누추하지만 우리의 역사요 체험인 만큼 무대를 읽기도 쉽고 공감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독재 체제에서도 잘 살아보자며 이뤄낸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훌쩍 뛰어넘어 무대에 모택동 깃발과 인공기가 나부끼며 이야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튀면서 무대가 산만해졌다. 중국인 의사를 불러들여 개안 수술을 해주며 돈벌이에 혈안이 된 새댁이 어느 날 꿈에서 헤어졌던 남편을 보면서 무대는 인도주의와 남북 화해와 통일로 급반전한다. 땅굴을 통해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북한 아이들이 내려오고 남편과의 재회를 기다리며 늙어버린 새댁이 그 아이들을 보듬어 안는 것으로 웅대한 클라이맥스를 연출한다. 한 편의 그림 같은 마지막의 정지된 화면은 이 작품의 압권이었다.



그러나 전쟁의 참화를 딛고 대한민국은 성장 발전했다. 그 과정에서 군부 독재와 공해 등 숱한 사회문제가 불거지기는 했어도 우리는 이 만큼 발전하고 성장했다. 반면 북한은 김일성 김정일 숭배와 권력 승계로 백성은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백년의 희망을 약속한다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고 갑자기 튀는 스토리 전개 또한 생뚱맞고 지루해 관객들을 졸게 만든다.



사실주의로 가던 전반부와 달리 후반부에는 쥐떼가 나오고 아기 인형이 등장하는 등 상징주의로 변한 것도 관객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 요인이었다. 민족 수난사를 조각보처럼 예쁘게 꿰어 맞춰 들려주겠다는 작가의 의도와 달리 누추하고 부끄러운 과거의 편린들, 분단의 비극과 참담한 현실만을 누더기처럼 보여준 결과가 되고 말았다. 하마터면 학예회 수준이 될 뻔 했던 무대를 노련한 백성희 장민호의 연기가 살리고 단원들이 가까스로 앤딩까지 버텨주었다. 후반부는 다져지지 않은 흔적이 곳곳에 보였고, 배우들 또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캐릭터 쫒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였다. 즉흥성과 의외성이 빚어내는 오태석 특유의 해학과 익살이 객석을 웃기기도 했으나, 그것이 지나쳐 황당할 때가 적지 않았다.



이처럼 미흡한 작품을 한국 100주년 기념작으로 내놓아 많은 관객들에게 실망을 안겨준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엄정한 피드백을 통해 작품을 다각도로 평가하고 문제가 어디서 기인했는지 제대로 밝혀내야 한다. 공연 예산과 홍보 내역도 투명하게 밝혀 투자 대비 효과도 제대로 검증해야 할 것이다. 특히 성인이 보기에도 껄끄러운 작품을 청소년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적합하지가 않다. 청소년 공연예술제 참가 계획은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하반기에 다시 공연하는 계획도 재고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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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을 지냈다. 현재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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