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칠한 성격에 어울리는 김수영 ‘시’ 한 편
까칠한 성격에 어울리는 김수영 ‘시’ 한 편
  • Crispy J
  • 승인 2008.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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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전집 1’ - 암울한 시대의 작품 / Crispy J



[인터뷰365 Crispy J] 외국의 시를 보면 사랑을 이야기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표현하느라 정신이 없다. 모험을 찬양하기도 하고 힘겨운 세상의 시험을 이겨내라는 격려의 시들도 많다. 몇 년 전 드라마를 통해 국내에서 유명해진 시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역시 두꺼운 자기개발 서적을 참기름 기계에 넣고 꾹 짜낸 것과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어 놀랍기만 하다.



그런 반면 우리의 시는 어떤가. 현대 작가들이 쓴 작품 외에 문학계가 오래오래 간직하고 사랑하는 시들을 보면, 사실 현재 2008년에서는 공감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 현대 문학의 근간은 민족전쟁, 독재정권, 4.19의거 등 얼룩진 우리의 암울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 세상이었기에 우리는 그 시를 통해 그때의 시절이 얼마나 힘들었는가를 짐작할 뿐이지, 그 시를 외우며 감동하고 눈물을 흘리기는 쉽지가 않다고 본다.



그런 시 중에도 지금의 우리를 위로하는 시들이 있다. 순수문학을 민족 언어로 지켜내고 있는 몇 개 안 되는 나라 중 하나인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아니던가! 없을 리가 없다! 그 중, 나는 유독 김수영의 시를 좋아한다. 교과서에서 ‘풀’이란 소설을 통해 거친 듯 마음을 쓸어내리는 특유의 감수성에 반한 뒤로, 어른이 된 지금도 까칠한 성격이 폭발하는 날이면 조용히 시집을 펴들곤 한다.



김수영의 시는 간지럽지 않아서 좋다. 그렇다고 너무 우울하지도 않다. 암울한 시대에 태어나 거친 나무를 대패로 밀어내듯 쓱쓱 시원스레 이어지는 그의 마음이 시 안에 드러나는 것 같아서 시를 통해 상처 받은 마음을 한 줄 한 줄 비워내게 한다.

전쟁세대도 아니고, 독재정권 시대에 있지도 않았으며, 치열했던 대학 운동도 한번 안 해 본 내가 어찌 그 슬픔을 알겠냐마는. 어찌 보면 전쟁보다 더하게 사람들과의 이권 다툼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지금의 마음을 그때의 마음으로 치유 받고 있는 것 같아 고맙다. 아니, 그때의 그 시절을 그렇게라도 힘겹게 버텨준 앞 세대들에 대한 고마움을 ‘시’로 느낀다. 누그러뜨리고 살았다면 얻지 못했을 지금 이 순간을 새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어,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작가 지망생으로서 질투심마저 느끼게 된다.



그 중 가장 좋아하는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김수영 전집 1, 민음사)는 지금 2008년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시다. 그 시절, 힘겨웠던 분들로 인해 우리가 이만큼 앞서 온 것이 아닌가 새삼 많은 선배들에게 감사함을 이 시로 전하고 싶다. 그리고 엉뚱한 상상이긴 하지만, 만약 김수영 시인이 2008 대한민국을 바라본다면 흐뭇하게 웃지 않았을까 싶다. 구청 직원 앞에서조차 숨소리를 죽여야 했던 대다수 옛날의 우리가 대통령에게 바른말을 할 수 있다니. 김수영 시인이 MC몽처럼 한바탕 웃었을지 모른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펀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1965.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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