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심청전을 짓다', 연극 특성 살린 무대와 신들린 배우들의 연기
[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심청전을 짓다', 연극 특성 살린 무대와 신들린 배우들의 연기
  •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승인 2022.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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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숙 작, 권호성 연출의 '심청전을 짓다' 개막
- 옛날 얘기보다 더 재미있는 지어낸 심청이 이야기...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도 많네
연극 '심청전을 짓다' 공연 장면.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영화나 드라마는 세계적인 히트작이 나오는데 연극은 왜 부진할까.

지원 제도 등 여러 문제가 있겠지만 기획력과 상상력 부족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연극은 문학이나 영상이 하지 못하는 연극만의 특성을 살려야 하는데, 그런 작품을 오랫동안 발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서울연극제에 출품된 소극장 연극 한 편이 연극적 상상력을 자극하며 관객의 호응을 얻고 있다.

대학로 알과핵 소극장에서 공연 중(~5월 28일까지)인 김정숙 작, 권호성 연출의 '심청전을 짓다'. 

심청전을 비튼 김정숙 작가의 창작인데, 그 발상이 기발한데다 연출과 배우들의 호흡이 맞아떨어지면서 매회 예상을 뛰어넘는 아우라로 대학가의 화제가 되고 있다.

“심청이는 나오지 않고, 작가가 지어낸 심청이 얘기가 이렇듯 재미도 있고 해피엔딩으로 힐링도 해주네.”

필자가 이 작품을 관람한 소감이다.

연극 자주 보는 배우와 연출의 추천을 받고 특별히 공연장을 찾았는데 소문난 잔치에 이렇게 먹을 게 많을 줄은 미처 몰랐다. 연극이란 본디 이야기인데 심청전을 새로운 버전으로 지어낸 김정숙 작가에게 다시 한번 반했다. 무엇보다 우리 고전이라 친숙하고 정서적으로 와닿는다.

김정숙 작, 권호성 연출의 연극 '심청전을 짓다' 포스터.

원전의 주제가 ‘효(孝)’라면 김정숙 작가는 아버지 눈을 뜨게 해 주려고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이를 진혼(鎭魂)하면서, 장기기증으로 생명을 살려내듯 열녀문 세우게 죽어달라는 강요에 시달리는 사대부 규수를 천민의 죽음과 바꿔 새 삶을 얻게 한다. 양반과 상민이 나오는 고전극 형식인데 그게 상투적 대립이 아니라 서로의 처지에서 최선을 다하는 캐릭터로 그려냈다.

특히 김정숙 작가의 특기는 인물들의 대사로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다. 처녀 심청이를 죽음으로 내몬 마을 아낙의 자책, 뱃전에서 심청이를 밀어낸 남경상인의 변명과 회한은 완판 심청전에 없는 창작이다.

아버지의 개안을 명분으로 했지만 산 목숨을 바다에 던지려는 찰나의 처녀 심청은 얼마나 무섭고 바들바들 떨렸을까. 작가는 그런 심리적 상황을 디테일하게 묘사, 원전에서 느낄 수 없는 재미를 살려냈다. 특히 아홉 명의 인물 모두가 씨줄과 날줄의 교차처럼 조화를 이루게 한 극작술이 놀라울 정도다.

연출은 또 어떤가. 풍문으로 듣던 권호성은 얼굴은 모르지만 극 초반부터 끝날 때까지 연출 의도와 디테일이 읽힐 정도로 구도와 동선이 명징했다. 옛 화공이 가는 붓(세필)으로 초상화를 그리듯 배우의 동작 하나, 동선 전체가 컴퓨터로 계산된 것처럼 정교하고 한 치의 오차가 없었다.

아홉 명의 배우가 어떤 상황에도 부딪침 없이 무대를 누비며 미장센을 구축했고, 오케스트라가 교향악 연주 중 솔로 악기가 연주하듯 배우들이 전체 앙상블을 이루다가 자기 차례가 오면 역할들을 똑 따먹으며 천연덕스럽게 개인기를 뽐냈다.

연극 '심청전을 짓다' 커튼콜 무대에 오른 배우들./사진=정중헌

여기에 스태프들은 왜 그리 또 찰떡궁합인가. 우리 옛날 얘기라 무대디자인이 쉽지 않았을텐데, 정수미가 대숲으로 뒤덮은 동굴 같은 성황당은 극의 분위기를 음습하게 조성하는데 안성맞춤이었다. 여기에 장대비와 천둥 번개 치는 상황이 음향과 영상으로 투영되면 극적 아우라가 고조되고 객석에선 공포감을 느끼게 된다. 그만큼 조명(박철영)과 영상(정혜지)의 손발이 잘 맞았다. 특히 천둥 번개 음향에 배우들이 반응하는 반사 연기는 또 어찌 그리 잘 맞는지...

이 연극은 장대비가 쏟아붓는 밤중에 성황당에 상민 개동이가 어머니의 시신을 업고 와 제단 안에 숨기는 미스터리로 시작해 우연히 모여든 사람들의 속내를 그리며 막이 내릴 때까지 배우들이 관객의 혼을 쏙 빼놓았다. 소극장 객석을 가득 채운 관객들은 100분간 미동도 않고 극에 몰입했다. 근래 이 같은 집중도는 처음이었다.

배우들의 가장 큰 특징은 연기하는 것 같지 않고 일상처럼 해내는 천연덕스러움이었다. 특히 성황당에 모여든 사람들 앞에서 효녀 심청이 이야기를 하는 귀덕네 박옥출 배우의 연기는 압권이었다. 질펀한 사설과 꾼다운 묘사력은 번역극에선 맛볼 수 없는 토종 장맛 그대로였다.

양반 나으리 역 고훈목은 감정의 기복 없는 중립 캐릭터를 천연덕스럽게 해내며 사건을 해결하는 수완을 보였다. 남경상인 역 정래석은 심청이를 바다에 밀어 넣은 죄책감을 양반댁 아씨의 탈출을 돕는 선행으로 상쇄하는 등 안정감 있게 극을 받쳐주었다. 아씨 역 이예진도 뭣에 씌운 듯 신기가 서린 연기를 했다.

연극 '심청전을 짓다' 커튼콜 무대에 오른 배우들

만홍 역 김희경, 개동이 역 최상민, 선달 역 이민준, 귀덕이 역 김수영도 자신의 역할을 개성 있게 해내 극의 이해를 도왔다. 무엇보다 처음부터 상것의 죽은 에미 역을 맡아 대사 동작 하나 없는 시체로 막판까지 등장한 현혜선 배우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모든 예술이 그렇듯 연극도 뭔가 달라야 하고 새로운 것이 있어야 한다. 김정숙 작가의 '심청전을 짓다'는 우리 이야기를 이렇게 비틀 수도 있음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여기에 또다른 희생을 강요하는 사람들을 통해 금지된 욕망을 해피엔딩으로 몰면서 카타르시스를 안겨 주었다.

일본의 '라쇼몽'이 세계적 콘텐츠로 부상된 것처럼 '심청전을 짓다'는 우리 얘기를 우리 정서로 지어냈다는 것은 이 연극의 미덕이다. 이 작품을 보면서 연극만의 극작술은 아직도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느꼈다. 김정숙 권호성 콤비는 그간 흘려 넘겼던 연극의 소중한 보물을 무대에 살려놓은게 아닐까.

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을 지냈다. 현재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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