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의심'의 끝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연극 '붉은 낙엽'
[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의심'의 끝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연극 '붉은 낙엽'
  • 주하영
  • 승인 2021.12.3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제14회 대한민국 연극대상 수상, 미국 소설가 토머스 H. 쿡 원작, 극단 배다 각색극
연극 '붉은 낙엽' 공연 장면. 담배를 피우고 있는 아들 ‘지미(장석환)’를 발견한 아버지 ‘에릭(박완규)’은 자신의 내면에 자리 잡기 시작한 의심의 뿌리를 숨기며 아들의 속내를 들여다보려 하지만 지미는 아버지의 “의심하는 눈”이 경찰과 똑같다고 말한다./사진=서울연극협회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 의심은 불안에서 시작된다. 내가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거짓일지 모른다는 불안, 내가 보고 있는 모든 것이 환상일지 모른다는 염려, 나를 둘러싼 상황이 불행으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초조...

의심은 분명 인간이 상황을 올바르게 가늠하고 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해 발휘되는 능력이다. 하지만 관계에 있어 ‘의심’은 밟아서는 안 될 ‘지뢰’가 되기도 한다.

무언가가 잘못되었을지 모른다는 일종의 경고, 진실을 판단하기 위해 거쳐야만 하는 인지의 과정, 위험으로 향하지 않도록 미리 확인을 요구하는 안전장치인 ‘의심’이 관계를 망가뜨리고 삶을 파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의 배우 톰 행크스는 “인간은 본성적으로 너무나 복잡한 존재”이기 때문에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으며, 우리에게 남겨진 선택은 “의심을 품고 다가서거나 마음을 열고 솔직하게 다가서는 것”뿐임을 강조했다.

미국의 각본가 로드 설링은 때로는 인간의 “단순한 사고”가 무기가 될 수 있으며, “편견은 사람을 죽이고, 의심은 사람을 파괴한다”라고 말했다. 인도의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의 말처럼, “한 사람의 동기에 대해 의심이 생기는 순간 그가 하는 모든 일이 오염되기 시작”하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의심을 품는 순간 모든 것은 이전에 바라보던 눈으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다. 모든 판단은 혼란에 빠지고 질문은 끝없이 더해진다. 의심의 끝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진실’일까, ‘파국’일까?

연극 '붉은 낙엽' 공연 장면.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며 낮은 자존감과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폐쇄적 측면을 갖춘 아들 ‘지미(장석환)’는 8살 소녀 에이미 실종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다./사진=서울연극협회

최근 국립극단에서는 기획초청극으로 연극 ‘붉은 낙엽’을 선보였다.

제42회 서울연극제에서 4개 부문을 수상하며 “의심의 나비효과와 그 파국을 묵직하게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은 연극 ‘붉은 낙엽’은 지난 28일 대한민국 연극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연극 ‘붉은 낙엽’은 미국추리작가협회상, 앤서니 상, 배리 상, 에드거 앨런 포 상을 수상한 작가 토머스 H. 쿡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2005년에 출간된 소설에서 내레이터는 “우연한 이중 노출로 인해 한 사진의 색이 다른 사진으로 번지듯 한 가족의 역사가 다른 가족의 역사를 물들이는 방식을 묘사하고 싶다”고 말한다.

쿡은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있던 ‘에릭’이라는 내레이터의 가족이 어떻게 위기에 처하게 되고, 이전의 가족이 현재의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며, 한 가족이 다른 가족과 어떻게 엮이게 되는지를 내레이터의 내적 심리를 치밀하게 따르는 방식으로 서술한다.

극단 배다가 각색한 연극 ‘붉은 낙엽’은 주인공 에릭을 제외한 소설 속 인물들의 이름을 일부 변경하고 내용 또한 수정과 첨가를 통해 과거가 현재에 미치는 영향이나 “우리가 못 본 체하기로 결정한 것들”이 삶에 미치는 위험과 같은 부분보다는 ‘의심’이 삶을 파괴하는 방식을 강조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연극 '붉은 낙엽' 공연 장면./사진=서울연극협회

극단 배다 대표이자 연출을 맡은 이준우는 프로그램북에서 스릴러인 소설이 “범인을 찾는 것에 집중하기보다 용의자로 지목된 아들을 둔 아버지의 심리를 따라가는 것”과 “아버지가 품고 있는 ‘의심’의 뿌리가 흥미로웠다”고 설명했다.

또, 그는 “소설의 언어를 무대의 언어로 만드는 과정은 설렘과 동시에 고통스러운 작업”이었음을 강조하면서, “이 공연은 오랫동안 가슴 속에 담아두었던 과거의 기억을 현상해서 인화해가는 과정과 닮아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연극 ‘붉은 낙엽’의 무대는 내레이터이자 주인공인 에릭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이 에릭 가족이 살고 있는 집안에 이중 노출로 다른 영상과 겹쳐지듯 “무대에 현상되어 맺히는” 방식으로 구현된다.

사진이 인화되는 과정처럼 흐릿하던 것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감정적으로 치닫게 되는 연극은 멀리서보면 한 가지 색인 듯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러 색이 중첩되어 있는 낙엽처럼 장면과 장면이 교차되고 공간과 공간이 중첩되는 구성을 취한다.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숲을 향해 안락하게 위치한 에릭의 집 거실과 주방, 아들 지미의 방은 모두 관객을 향해 노출되어 있다.

연극 '붉은 낙엽' 공연 장면. 에릭의 집 거실, 주방, 지미의 방이 모두 관객들을 향해 드러나 있는 무대는 자연스럽게 주방이 ‘에릭(박완규)’과 형 ‘워렌(권태건)’이 만나는 술집으로 변모하며 공간과 공간이 중첩되는 모습을 보여준다./사진=서울연극협회

막이 오르기 전 무대와 객석을 구분하는 프로시니엄 아치이자 에릭의 집 거실 전면을 덮고 있는 흰색 커튼에는 붉은 낙엽에서 발견되는 녹색과 황색, 갈색과 검은 색의 점들이 한데 어우러진 듯 희미한 조명이 비춰진다. 극은 에릭이 자신의 집 거실에 드리워진 커튼을 활짝 열어젖혀 양쪽 끝에 묶고 관객들을 향해 독백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처음 내가 이 집을 살 때 간절히 원했던 것은 절대로 금이 가지 않는 집, 바위처럼 단단하고 튼튼한 집이었다”로 시작된 에릭의 독백은 소설 원작의 마지막 장면을 첫 장면으로 설정한다.

전화벨이 울리고, 누군가가 찾아오기로 한 집 거실에서 에릭은 두 장의 ‘가족사진’을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한 장은 자신이 아들이었을 때 찍은 가족사진이고, 다른 한 장은 자신이 아버지였을 때 찍은 가족사진이다.

연극 '붉은 낙엽' 공연 장면. “절대로 금이 가지 않는 단단한 집”을 꿈꿨던 ‘에릭(박완규)’의 환상은 의심이 깊어질수록 부식되기 시작한다. 무대는 에릭의 집 거실과 낙엽들이 흩어져있는 앙상한 나무가 가득한 정원이 중첩된 공간을 구성한다./사진=서울연극협회

에릭이 결혼을 통해 새로운 가족을 구성하고 아들이 열여섯 살이 될 때까지 어떤 행복한 순간들이 있었는지 사진들을 통해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원작과는 구조가 다르다.

소설의 첫 문장은 “가족사진은 언제나 거짓말을 한다”이다. 하지만 연극의 첫 대사는 “절대로 금이 가지 않는 집”, 아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는 정원을 갖춘 집,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삶에 대한 에릭의 열망을 드러낸다.

쿡이 소설 속에 구현한 “사물의 본성에 내재한 무언가”가 표면 위로 떠오르는 느낌, “튼튼한 집의 기초 아래 땅 속 어딘가에서 생겨난 미세한 떨림”의 불안, “조심스럽게 구축한 삶 아래 입을 벌리고 있는 틈”에 대한 초조는 연극의 경우, 에릭의 대사로부터 시작된다.

에릭은 산책로를 따라 정원까지 잘못 들어온 사람들이 부러워한 것은 멋진 곳에 지어진 집이 아니라 그 안에 살고 있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연극 '붉은 낙엽' 공연 장면. 자정이 넘은 시각, 혼자 걸어오겠다던 아들이 집 안으로 들어서기 전 자동차 불빛과 소리를 들은 아버지 ‘에릭(박완규)’은 지미를 향해 의구심을 품기 시작한다./사진=서울연극협회

학창 시절 20세기를 대표하는 미국 소설가 윌리엄 포크너의 ‘8월의 빛’을 읽고 내레이터가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고 다양한 관점을 반영하게 되는 ‘자기반영성’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쿡은 가족, 상실, 과거가 현재에 미치는 영향 등을 탐구한다.

쿡은 2009년 알리 카림과의 인터뷰에서 “가족의 가장 어두운 비밀”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가족보다 더 강렬한 관계는 없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는 ‘위기’는 인간 본성의 기만적 속성을 드러내는 측면이 있고, 운명과 환경이 어떻게 엮이는지, 인간 조건에 작용하는 교묘한 힘들은 무엇인지 노출하게 되는데, “가족은 모든 종류의 위기에 놓여있는 사람들을 탐구하기에 완벽하다”고 설명했다.

멀리 지나가버린 과거의 일이 현재에 그 결과를 드러내기 시작하는 구성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쿡은 그러한 구조가 인물들로 하여금 액션을 취하도록 만들고 과거를 되돌아보도록 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실수를 통해 배우는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독자들은 인물들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진심의 노력을 다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연극 '붉은 낙엽' 공연 장면. 에이미 실종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 ‘피크(구도균)’는 에릭에게 압수수색 영장이 나왔음을 알리며 모든 사건은 세부사항을 간과하는 무심함으로 인해 발생하게 됨을 언급한다./사진=서울연극협회 

소설 ‘붉은 낙엽’ 역시 아무 문제없이 평온해 보이던 에릭의 가족의 발아래에 도사리고 있던 ‘틈’이 어떻게 바닥 전체를 붕괴시키는지, 에릭이 어린 아들이었을 때 간과한 것들이 어떻게 아버지가 된 현재의 삶을 흔들어놓게 되는지를 잘 드러내 보여준다.

쿡은 에릭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수 있는 길은 없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소설의 끝에서 에릭은 “짧은 시간 유지했고, 의심했고, 결국은 잃어버린 가족”에 대해 생각한다.

그는 가족이 함께 했던 집을 마지막으로 훑어봤던 때를 떠올리며 단풍나무 아래 땅의 모습을 묘사한다. 너무나 심한 좌절을 겪었고, 크고 작은 의심에 지독히 시달린 탓에, 벌거벗은 나뭇가지 아래로 보이는 것이 피가 고인 웅덩이인지, 흩어져 있는 붉은 낙엽들인지 분간할 수 없는 땅의 모습...

에릭은 가족을 이루기 위한 출발선에 서 있는 에이미가 자신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이야기를 ‘끝’에서부터 시작한다. 다음 세대인 에이미가 모든 일을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만들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연극 '붉은 낙엽' 공연 장면. ‘에릭(박완규)’은 사진관을 정리하면서 발견한 ‘에이미가 엄마와 함께 찍은 사진’을 건넨다.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는 ‘에이미(장승연)’에게 에릭은 자신보다 현명하게 ‘가족’을 잘 돌볼 수 있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긴다./사진=서울연극협회<br>
연극 '붉은 낙엽' 공연 장면. ‘에릭(박완규)’은 사진관을 정리하면서 발견한 ‘에이미가 엄마와 함께 찍은 사진’을 건넨다.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는 ‘에이미(장승연)’에게 에릭은 자신보다 현명하게 ‘가족’을 잘 돌볼 수 있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긴다./사진=서울연극협회

연극 ‘붉은 낙엽’ 역시 이야기의 ‘끝’에서 시작하고 다시 ‘끝’으로 되돌아오는 구성을 취하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다르다.

연극은 진실을 드러내지 못하는 사진의 허구성과 의심이 불러오는 혼란과 파괴성에 집중한다. 무엇이 시작이었는지,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어떤 것이 진실이고 어떤 것이 망상인지, 연극은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연극은 실종된 8살 에이미의 납치범을 찾을 수 있도록 가장 큰 도움을 준 존재가 범인으로 의심받던 에릭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삭제한다.

소설에서는 아버지인 에릭이 간과한 부분을 아들인 키이스가 고민하고 제보한 탓에 에이미가 구조되고, 아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인물도 혼자 아이를 키우며 분투하던 엄마 카렌이 아니라 아이가 돌아오기만을 고대하던 부모 중 아버지 빈스였다는 점으로 차이가 있다.

연극 '붉은 낙엽' 공연 장면./사진=서울연극협회

에릭의 아내 인물 표현 또한 다르다. 연극에서는 처음부터 아내가 대학교수였던 것처럼 암시되지만 소설의 경우, 아내는 아들을 키우는 일에 전념하다 지역 전문대에서 강사로 시작해 점차 자리를 잡게 된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연극 ‘붉은 낙엽’은 아들 키이스를 ‘지미’로, 아내 매러디스를 ‘바네사’로 이름을 변경한다.

또, 아내가 아들을 의심하는 에릭을 향해 내뱉는 “아들을 사랑하지만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어”라는 평가를 “지미를 사랑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어”로 바꾼다.

게다가 소설에서는 베이비시터가 올 수 없을 때에만 에이미를 돌봐주던 설정이지만 연극에서는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엄마 카렌이 힘들 때마다 매번 지미의 도움을 받으며 몇 년간 지속되어 온 것으로 되어 있다.

연극 '붉은 낙엽' 공연 장면.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해주길 바라는 변호사 ‘레오(이호철)’ 앞에서 아들 ‘지미(장석환)’는 자신을 향한 의심이 증폭되는 것을 감지하며 불안과 초조를 느낀다./사진=서울연극협회

연극은 밤늦게 들어온 카렌이 딸의 방문을 열어보지 않고 아침이 되어서야 확인한 이유를 육아와 경제의 문제를 혼자 짊어져야 하는 어려움 때문인 것으로 설정한다.

지미에게 직접 에이미의 행방을 묻겠다는 카렌을 막아서는 지미의 엄마 바네사를 향해 카렌이 외친다.

“만약에 지미가 범인이고, 네가 그걸 감춘 것이라면, 너도 나하고 똑같은 벌을 받게 될 거야!”

자존감이 낮고 폐쇄적인 구석이 있는 아이, 큰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지만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아이, 지미는 여느 때와 같이 에이미를 돌봐달라는 전화를 받고 카렌의 집에 갔다가 밤늦게 돌아온다. 다음날 아침, 지미는 엄청난 ‘의심’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피자를 시켜 먹고 에이미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고, 잠든 것을 확인한 후 거실에서 TV를 잠시 보다 나왔다는 지미의 말은 처음부터 ‘의심’과 맞닥뜨린다. 16살 남자 아이가 8살 여자 아이에게 나쁜 짓을 했을지 모른다는 의심과 불안은 세상에 넘쳐나는 수많은 범죄가 사람들로 하여금 더 이상 타인을 신뢰할 수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연극 '붉은 낙엽' 공연 장면. ‘지미(장석환)’는 자신이 “한심한 놈”일지는 몰라도 결코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발견된 증거들이 모두 지미를 겨냥하게 된다. 거짓이 아닌 진실을 말하라고 다그치는 아버지를 절망적으로 바라보던 지미는 벽에 머리를 박으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사진=서울연극협회

늦은 밤 에릭이 차로 데리러 가겠다는 제안을 거절하고 혼자 걸어오겠다고 말한 것과 정원까지 들어왔던 차가 되돌아나가는 소리를 에릭이 들었음에도 누군가가 데려다 줬다는 말을 하지 않는 아들 지미의 모습은 에릭을 ‘의심’의 소용돌이로 몰고 간다. 또, 아들을 당황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면서 카렌과 지미가 직접 소통하지 못하도록 막는 에릭과 바네사의 방어적인 태도는 카렌을 강한 ‘의심’의 길로 들어서게 만든다.

누군가를 의심스러워하는 눈, 상대의 말이 거짓이라 짐작하며 묻는 질문, 무언가를 숨기는 듯한 태도, 조금씩 어긋나는 사실 관계와 드러나지 않던 숨겨진 일들... 무대는 긴장과 미스터리, 그리고 에릭의 머릿속에 넘쳐나는 생각들로 가득하다.

에릭은 말한다.

“의심은 모든 것을 부식시켜버리는 산과 같다.”

연극 '붉은 낙엽' 공연 장면. 자신을 믿지 않는 아버지가 실제로 묻고 싶은 질문이 따로 있다고 확신하는 ‘지미(장석환)’는 ‘에릭(박완규)’을 향해 폭발한다./사진=서울연극협회

신뢰와 믿음, 확신을 차례로 부식시키며 모든 것을 허물어버리는 산성의 속성을 지닌 ‘의심’은 에릭의 현재 뿐 아니라 과거를 향해 나아가며 ‘바닥’을 향한다. 아들의 축 처진 어깨, 우중충한 분위기는 에릭의 과거 속 형 워렌의 모습을 떠올리도록 만든다.

에이미와 비슷한 나이에 뇌종양으로 투병을 하다 세상을 떠나야 했던 막내 동생 제이미, 제이미를 간호하기 위해 밤까지 방에 머물러야 했던 형, 복도에서 마주쳤던 형의 모습과 지미의 모습이 묘하게 중첩되는 것을 인지한 에릭은 ‘진실’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한다.

제이미의 죽음 이후 얼마 있다 파산한 아버지, 자동차 사고로 죽음에 이른 어머니, “쓸모없는 놈”이라는 아버지의 비난을 늘 견뎌야 했던 형 워렌, 사립학교를 다니며 대학 진학과 성공을 꿈꿨던 자신... 어린 시절 가족사진 사이로 숨겨져 있던 진실들은 현재의 가족에게 발생한 ‘위기’의 틈을 타고 새어나오기 시작한다.

연극 '붉은 낙엽' 공연 장면. 예쁘고 아름다웠던 막내 여동생 제이미를 잃은 후 비슷한 또래의 여자 아이들을 지켜보는 행동들로 문제를 일으켜 온 형 ‘워렌(권태건)’은 동생에게 자신의 의도가 순수한 것이었음을 주장하지만 ‘에릭(박완규)’은 형을 믿지 않는다./사진=서울연극협회

교통사고를 위장해 자살을 선택한 어머니, 어머니와 변호사의 불륜을 의심한 고모, 어머니를 학대하는 아버지를 목격한 형, 보험회사 직원의 이상한 질문들, 그리고 제이미가 마지막으로 형을 바라보던 눈... 의심은 집착을 낳고, 집착은 파고들지 말아야 할 것들을 파고들도록 만든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한 에릭에게 아들의 컴퓨터에서 발견된 여자아이의 사진들과 폐차장 근처에서 발견된 에이미의 잠옷, 에이미 집 앞에서 발견된 담배꽁초와 아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아들이 가출을 계획한 채로 꽃집에서 절도행위를 하다 걸린 적이 있다는 점은 에릭을 ‘폭주’하도록 만든다.

모든 증거와 화살이 지미를 향하는 가운데 여자아이들을 찍은 사진은 페인트칠을 하다 떨어져 다친 형이 조카의 방에 기거하는 동안 봤던 것들임이 밝혀진다. 늘 지나치게 신중하던 에릭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가족을 향해 의심을 드러내며 압박과 추궁을 가하기 시작한다.

연극 '붉은 낙엽' 공연 장면. 딸을 찾지 못해 패닉 상태에 빠진 에이미의 엄마 ‘카렌(하지은)’은 결국 ‘지미(장석환)’을 향해 총을 겨누고, 지미와 카렌은 모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사진=서울연극협회

에릭의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에서 부족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에릭이 간과하지 말아야 했던 것은 자신을 향한 ‘의심’이 아니었을까? 나의 판단이 틀렸을 경우 불러오게 될 것들을 향한 ‘의심’, 나의 절대성에 대한 ‘의심’, 그것이 먼저 선행되어야 하지 않았을까?

연극 ‘붉은 낙엽’은 진실은 전혀 다른 곳에 있을 수 있음을 드러낸다. 에이미를 납치한 범인은 피자배달원이었고, 형 워렌은 에릭의 추궁으로 인해 자살에 이르며, 카렌은 무고한 지미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 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연극 '붉은 낙엽' 공연 장면. 성장한 ‘에이미(장승연)’는 새로운 가족을 이루게 될 결혼을 앞두고 ‘에릭(박완규)’을 찾아온다. 납치범은 피자배달원이었음에도 엄마가 왜 지미를 총으로 쏘게 된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에이미에게 에릭은 “엄마가 에이미를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사진=서울연극협회

의심은 ‘상처’를 남기고, 상처는 결코 회복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의심은 ‘불신’의 증거가 되고, 불신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끊는다.

모든 관계를 잃은 에릭에게 남겨진 것은 무엇일까? 가혹한 진실과 잔인한 파국 앞에서 에릭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삶에서 불현듯 끝없는 의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될 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야만 하는 걸까?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하영
주하영
jhy0219@hanmail.net
다른기사 보기

관련기사


  • 서울특별시 구로구 신도림로19길 124 801호
  • 등록번호 : 서울 아 00737
  • 등록일 : 2009-01-08
  • 창간일 : 2007-02-20
  • 명칭 : (주)인터뷰365
  • 제호 :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 명예발행인 : 안성기
  • 발행인·편집인 : 김두호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문희
  • 대표전화 : 02-6082-2221
  • 팩스 : 02-2637-2221
  • 인터뷰365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ress@interview365.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