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삶과 인간, 관계 속에 자리하는 ‘모순’...연극 ‘더 드레서’
[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삶과 인간, 관계 속에 자리하는 ‘모순’...연극 ‘더 드레서’
  • 주하영
  • 승인 2021.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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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로널드 하우드 극작, 웨스트엔드 극장 연합상 최우수작품상 노미네이트
연극 '더 드레서'공연 장면./사진=국립정동극장
연극 '더 드레서'공연 장면. 극작가 로널드 하우드는 '드레서'의 역할이 단순히 보조자에 머무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노먼(김다현)'은 '선생님(송승환)'에게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인물이고, 공연과 관련해 모든 일정을 관리할 뿐 아니라 선생님의 내밀하고 사소한 일들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사진=국립정동극장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 시간과 기억, 관계의 실타래는 한 인간의 ‘삶’ 혹은 ‘존재’를 드러낸다.

양자중력 이론의 선구자 카를로 로벨리는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에서 ‘기억’이 인간의 자아를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세상은 실체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서로 결합하는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가 존재하는 매 순간은 기억을 통해 세 겹으로 된 특별한 끈으로 과거와 단단히 엮인다”고 말한다.

로벨리에 따르면, 시간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뇌가 기억과 예측을 통해 세상과 상호 작용을 하는 형식이며 “정체성의 원천”이다.

인간은 영원불멸을 갈망하고 시간의 흐름에 고통스러워한다. 하지만 시간은 세상의 일시적인 구조이고, 세상의 사건들의 일시적인 변동일 뿐이다. ‘나’라는 존재는 “과거의 사건과 미래의 사건 사이에 존재하는 선택의 결과물”이며, 자아에 대한 개념은 “내면적 성찰이 아닌 타인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형성된다.

시간은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으며, 타인과 나 사이로 “조용히 모래시계처럼 흐르다”가 어느 순간 사라진다. 우리는 시냅스를 통해 연결된 기억들의 흔적의 총체이며, 누군가의 추억이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갈망”을 품고 있는 시간 속에 있는 어떤 ‘존재’이다.

연극 '더 드레서'공연 장면./사진=국립정동극장
연극 '더 드레서'공연 장면. 극작가 로널드 하우드가 명배우 도널드 울핏의 개인 드레서로 일한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작품은 '선생님(송승환)'과 '노먼(오만석)'의 관계를 통해 배우들과 연극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힘든 삶'과 "연극은 반드시 지속되어야만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사진=국립정동극장

2003년 영화 ‘피아니스트’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각색상을 수상한 로널드 하우드의 대표적인 연극 ‘더 드레서’에서 평생을 연극에 헌신한 ‘선생님(Sir)’은 20년을 함께 해 온 무대 감독 맷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가끔 내 이야기를 해줘. 나에 대해 잘 이야기 해줘. 배우는 관객들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니까. ...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은 누군가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는 거야!”

나를 둘러싼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겨진 존재의 흔적들, 나를 기억하는 누군가의 파편과 같은 이야기, 그 흔적들과 이야기들을 모두 한데 모으면 이 세상에 머물다 간 한 존재를 오롯이 설명할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는 사랑으로, 누군가에게는 존경으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상처로, 기대와 실망, 선망과 애증, 강압과 독선, 이기심과 헌신, 열정과 무관심으로 상반된 한 사람의 ‘진실’은 무엇에서 찾을 수 있을까?

‘배우-제작자’의 전통을 지키며 45년 동안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더 많은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 연극이 주는 감동을 지역 곳곳에 전파하기 위해 모든 ‘헌신’을 다한 배우의 ‘모순’은 존재의 의미를 퇴색시킬까?

연극 '더 드레서 '포스터 컷. 선생님 역의 배우 송승환과 노먼 역의 오만석, 김다현./사진=국립정동극장

국립정동극장에서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의 공습 폭격이 이루어지는 가운데에서도 연극 공연을 굳건하게 이어나갔던 영국 배우 ‘도널드 울핏’의 드레서로 일한 작가의 경험을 다룬 연극 ‘더 드레서’가 공연 중이다.

연극계에서 일하고픈 꿈을 안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17살 때 런던으로 온 하우드는 영국 왕립연극원(RADA)을 거쳐 1953년부터 1958년까지 도널드 울핏의 의상을 담당하는 개인 ‘드레서(dresser)’로 일하게 된다.

하우드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집에서 보내주던 생활비가 끊겨 어려움에 처했을 때 지인의 소개로 울핏의 셰익스피어 극단에 들어갈 수 있었고, ‘리어왕’ 공연 당시 폭풍 장면에서 훌륭한 무대 효과음을 만들어 낸 자신을 울핏이 “예술가”라고 표현한 이후부터 개인 드레서로 일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이 일화는 연극 ‘더 드레서’의 주인공 ‘노먼’이 드레서로 일하게 된 배경에 그대로 반영된다.

연극 '더 드레서'공연 장면./사진=국립정동극장
연극 '더 드레서'공연 장면. '선생님(송승환)'은 끊임없이 연극 공연을 위해 달려온 인생에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인지한다. 허무와 죽음, 고통과 두려움 앞에서 삶의 무게와 피로함을 토로하면서도 선생님은 무대를 포기하지 못한다./사진=국립정동극장

극중 ‘선생님’을 그림자처럼 따르며 보필하는 드레서 ‘노먼’은 극작가 하우드의 경험을 반영한 인물이지만 성격적으로는 배우 폴 스코필드와 톰 코트니의 드레서로 일했던 사람들의 다양한 측면을 조합한 허구적 인물이다.

‘선생님’의 모델이 된 울핏의 경우, 연극을 향한 열정과 강렬한 몰입 연기, 순회극단을 이끄는 배우-제작자로서의 어려움, 권위와 독선, 모순 등 많은 부분이 적용된 것은 사실이지만 하우드는 “울핏은 단 한 번도 무대에 오르는 것을 주저한 적이 없었다”고 강조한다. 하우드에 따르면, ‘선생님’은 울핏 외에도 로렌스 올리비에와 존 마틴 하비와 같은 명배우들의 여러 측면이 담겨 있다.

하우드는 연극 ‘더 드레서’에 극중극으로 등장하는 셰익스피어의 ‘리어왕’과의 연계성을 묻는 질문에 “극작 당시 염두에 둔 것은 ‘폭격’과 ‘폭풍’의 유사성과 리어왕의 딸들에 상응하는 여성 인물을 창조하는 것 뿐”이었다고 설명한다.

연극 '더 드레서'공연 장면./사진=국립정동극장
연극 '더 드레서'공연 장면. 전쟁의 '폭격'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 등장하는 '폭풍'과 상응한다. '선생님(송승환)'은 공습을 알리는 사이렌 속에서도 셰익스피어의 힘으로 히틀러에게 맞설 것을 '노먼(김다현)'에게 말한다./사진=국립정동극장

말년에 이르러 삶의 허무와 대면하게 되고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폭풍 속을 헤매며 울부짖는 ‘리어’의 모습은 ‘선생님’과 분명 닮아있다. ‘더 드레서’의 선생님은 독일군의 폭격에 흔들리는 극장 안에서 의지를 잃고 주저앉기도 하고, 공습을 알리는 사이렌 속에서 셰익스피어의 힘으로 히틀러에게 맞서겠다고 분노하기도 하며, 옷을 벗어던지면서 폭격이 멈춘 거리를 미친 듯 헤매고 하늘을 향해 울부짖기도 한다.

비평가들은 ‘리어왕’의 광대와 노먼 사이의 유사성에 대해서도 언급하지만 작가인 하우드는 배우들과 연극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힘든 삶’과 “연극은 반드시 지속되어야만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을 뿐 특별히 문학적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다고 덧붙인다.

하지만 2015년 BBC TV 영화 제작에 참여한 각색자이자 감독인 리처드 이어는 ‘리어왕’에서 리어가 광대를 ‘거울’ 삼아 자신의 정체성을 비추어보듯 분명 노먼을 통해 선생님의 자아가 드러나는 측면이 있고, 광대가 리어의 어리석음에 충고를 더하듯 노먼 역시 선생님과의 관계에서 유사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연극 '더 드레서'공연 장면./사진=국립정동극장
연극 '더 드레서'공연 장면.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공연을 준비하던 '선생님(송승환)'은 갑자기 무어인 '오셀로'의 분장을 시작하고, 이를 발견한 '노먼(김다현)'은 아이를 달래는 어머니처럼 선생님의 검은 분장을 닦아내기 시작한다./사진=국립정동극장

연극 ‘더 드레서’는 1942년 겨울, 영국을 향한 독일군의 폭격이 정점에 달했을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전쟁 중에도 지방과 도시를 순회하며 셰익스피어 전문 극단을 힘겹게 운영하고 있는 ‘선생님’은 227번째 ‘리어왕’ 공연을 앞두고 있다. 16년 동안 선생님 곁에서 의상과 메이크업, 대사 점검 및 폭풍 장면 무대 효과 등 소소하고 작은 일들을 도맡아 온 ‘노먼’은 갑자기 정신이 나간 듯 보이는 선생님으로 인해 공연이 취소될지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여 있다.

공습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와 폭격에 흔들리는 극장 안이지만 관객들은 명배우 ‘선생님’의 ‘리어왕’을 보기 위해 객석을 가득 채우고 있다. 시장에서 “미친 노인”처럼 울부짖으며 뛰어 다니는 선생님을 병원에 모셔다 드린 노먼은 선생님이 짓밟은 모자와 외투를 바닥에 펼쳐 놓은 채 닦고 있다.

연극 '더 드레서'공연 장면./사진=국립정동극장
연극 '더 드레서'공연 장면. 16년 동안 '선생님(송승환, 왼쪽)' 곁에서 의상을 담당하는 개인 '드레서'로서 온갖 작은 일들을 맡아 온 '노먼(오만석)'은 갑자기 정신이 나간 듯 보이는 선생님으로 인해 공연이 취소될지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인다./사진=국립정동극장

‘리어왕’에서 막내딸 코딜리아 역할을 하고 있는 ‘사모님’은 의사가 선생님에 대해 “밧줄 끝에 다다랐음을 본인이 인지하게 되었다”고 진단했음을 노먼에게 전달한다. 사모님과 무대 감독 맷지는 “리어가 없는 리어왕 공연은 불가”함을 외치며 공연 취소를 알리려 하지만 노먼은 한사코 선생님의 뜻이 아닐 것이라며 두 사람을 말린다.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맷지의 말에 노먼이 답한다.

“왜 그래야 하는데요? 난 한 번도 살면서 무언가를 직시해 본 적이 없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공연은 지속되어야 한다고 맞서는 노먼에게 맷지는 “덧없는 희망”이라는 병에 걸렸음을 지적한다. 그 순간 묵직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선생님이 분장실로 들어선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안녕!’이라고 인사를 건네는 선생님은 모든 일을 그만 둘 시점은 자신만이 정할 수 있다면서 공연을 준비할 것을 주장한다.

연극 '더 드레서'공연 장면./사진=국립정동극장
연극 '더 드레서'공연 장면. 20년 동안 선생님과 공연을 함께 해 온 무대 감독 맷지(이주원)는 전쟁의 공습 폭격 속에서도 순회극단 공연을 끊임없이 이어온 고단함에 지친 '선생님(송승환)'이 정말로 무대에 오를 수 있는 것인지를 확인하고자 한다. 드레서인 '노먼(김다현)'은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강하게 주장한다./사진=국립정동극장

하지만 노먼과 단 둘이 남겨진 뒤 흐느껴 울기 시작한 선생님은 폐렴을 심하게 앓으면서도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공연을 이어갔던 때보다도 현재가 더 심각한 상황이라고 말한다.

더 이상 내어 줄 것이 없는 자신을 향해 독사들이 달려들고 자꾸만 앞으로 나아갈 것을 재촉한다면서 짊어진 짐들이 너무 무거워 이제는 좀 쉬고 싶다는 선생님은 “오늘 밤 무대에 올라 내 삶을 단축시킨다고 누가 신경이나 쓰겠어?”라고 외친다.

이해하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 사람을 위해 연기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노먼은 객석이 가득 찼음을 언급하면서 선생님의 자리는 다름 아닌 ‘무대’임을 확신한다.

노먼은 시시각각으로 괴팍스레 변하는 선생님의 태도를 바로잡고, 연기해야 할 인물이 아닌 다른 인물의 분장을 하고 다른 작품의 대사를 외우는 등 불안정한 선생님의 정신과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때로는 아양을 떨고 때로는 엄격하게 맞서는 노먼에 대해 한 미국 평론가는 “아이를 올바르게 행동하도록 하려는 유대인 어머니와 같다”고 분석했는데, 하우드는 이를 긍정한다.

연극 '더 드레서'공연 장면./사진=국립정동극장
연극 '더 드레서'공연 장면. 분장을 마친 뒤 다시 예전의 활기를 되찾은 '선생님(송승환)'을 바라보면서 '사모님(양소민)'은 드레서 '노먼(김다현)'의 성과에 놀라움을 표한다./사진=국립정동극장

하우드는 ‘드레서’의 역할이 단순히 보조자에 머무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배우에게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고, 공연과 관련된 모든 일정을 관리해야 하며, 많은 내밀한 것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연극 ‘더 드레서’에는 배우에게 무언가를 묻고자 할 때 누구든 드레서를 먼저 거쳐야 하는 상황이나 무대 위에 오르기 전 긴장을 풀기 위해 배우가 하는 터무니없는 사소한 행동들을 알고 있는 드레서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노먼은 사모님도 모르는 “삶의 유일한 기념비가 될 자서전”을 쓰려는 선생님의 계획을 알고 있고, 사모님은 며칠 전부터 이상 행동을 보이는 선생님의 비밀스러운 사건들을 노먼에게만 털어놓는다.

맷지가 오랫동안 선생님을 마음에 품어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도 노먼이고, 주인공을 꿈꾸는 신입 배우인 아이린(Irene)의 위험한 도발과 선생님의 부적절한 행동에 대해 인지하고 있는 것도 노먼이다. 국내 공연의 경우, ‘아이린’이라는 인물은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연극 '더 드레서'공연 장면./사진=국립정동극장
연극 '더 드레서'공연 장면. "삶의 유일한 기념비가 될 자서전"을 쓰기 시작했다는 선생님의 말에 헌정사를 읽던 '노먼(김다현)'은 자신의 이름을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다./사진=국립정동극장

극중 인물들은 모두 선생님을 향해 특정한 ‘감정’을 품고 있다. 사모님은 선생님을 ‘원망’한다. 한 곳에 머물지 않는 순회극단에서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어울리지도 않는 젊은 역할을 하며, 추운 열차에서 밤을 보내고, 밤늦게 차가운 음식을 먹으며, 끝도 없이 짐을 싸고 의상을 꿰매는 삶에 지친 사모님은 말한다.

“오늘 밤 커튼콜 때 은퇴하겠다고 발표해!”

공연을 계속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의무’라고 주장하는 선생님을 향해 사모님은 분노하며 외친다.

“고집 세고 잔인한, 이 무례한 이기주의자야!”

극단에 남아있는 유일한 젊은 배우 옥슨비는 선생님을 향해 ‘불만’을 표출한다. 스타 배우 중심으로 모든 것을 맞추는 극단을 유지하며 다른 배우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고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일에 지쳐버린 선생님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새롭게 극단을 세우기로 결심한 옥슨비는 선생님을 향해 “시대에 뒤떨어진 위선자”라는 비난을 남긴다.

반면, 동성애 문제로 구속된 배우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 처음으로 ‘광대’라는 큰 역할을 맡게 된 제프리는 선생님에게 ‘감사’를 표한다. 더 이상 꿈을 품을 수 없다고 생각한 나이에도 ‘기회’가 주어지고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전쟁이라는 괴물은 자신의 손자를 비롯한 많은 젊은이들을 군인으로 데려가 버렸지만 나이 든 배우에게 순회공연을 다니며 여러 지역을 보고 느끼며 관객들과 호흡할 수 있는 ‘기적’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연극 '더 드레서'공연 장면./사진=국립정동극장
연극 '더 드레서'공연 장면.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227번째 공연하기 위해 무대로 향하는 '선생님(송승환)'은 독일군의 폭격에 의지를 잃고 주저 앉기도 하지만 '노먼(오만석)'에게 자신을 부축할 것을 명령하고 코딜리아 역을 맡은 '사모님(정재은)'과 광대 역의 '제프리(송영재)'와 함께 다시 전진한다./사진=국립정동극장

가장 오랜 시간 무대를 함께 해 온 맷지는 배우로서의 경력이 모두 담긴 기사 스크랩북과 명배우 에드먼드 킨에게 물려받은 반지를 건네는 선생님을 향해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가치 있는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선생님을 남몰래 지켜보던 안타까운 마음에 보상을 받을 수는 없었지만 “필요한 사람”으로 항상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맷지 만큼은 아니지만 역시 오랜 시간 선생님의 곁을 지킨 노먼은 가장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다. 존경과 열망, 사랑과 미움, 선망과 원망, 분노와 슬픔... 노먼의 삶에 선생님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드레서의 존재는 배우인 선생님이 있어야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공연 직전에 대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선생님을 독려하는 일도, 폭풍 장면을 위한 강풍기를 돌릴 사람이 없을 때 선생님 대신 도움을 요청하는 일도, 인터미션 때 바에서 관객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듣고 선생님에게 반응을 전달하는 일도 모두 노먼에게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일이다. “난 도움이 필요해”라고 말하는 선생님이 매일 밤 공연을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보좌하는 노먼은 “누군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에서 삶의 이유를 찾은 사람”이다.

남겨진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인지한 선생님은 노먼의 미래를 걱정하지만 노먼은 고독과 고통,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암흑과 허무를 토로하는 선생님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 예민하고 감성적이며 쉽게 상처받는 “작은 사람”으로 자신을 규정하는 노먼은 현실이 아닌 ‘환상’으로의 도피를 통해 삶을 견뎌온 사람이다.

연극 '더 드레서'공연 장면./사진=국립정동극장
연극 '더 드레서'공연 장면. 드레서인 '노먼(오만석)'의 삶에 배우인 '선생님(송승환)'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현실이 아닌 '환상'으로 도피하는 삶을 살아온 노먼은 극단 안에서만큼은 '외로움'을 피할 수 있기에 현재에 만족한다./사진=국립정동극장

또, 충분한 대접을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극단 안에서만큼은 혼자 있는 ‘외로움’을 피할 수 있기 때문에 현재에 만족하는 인물이다. 노먼에게 삶은 “버티고 견디는 것”이고, 고독함을 잊게 해 주는 잠깐의 망각을 위해 ‘술’로 도피하더라도 반복적으로 계속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노먼은 그 어떤 극적인 종말이 아닌,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짧은 순간에 그 누구도 인식하지 못한 ‘죽음’에 이른 선생님의 ‘끝’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게다가 자신을 ‘친구’로 생각해왔다면서 자서전의 헌정사에 단 한마디도 감사의 말을 남기지 않은 선생님에게 분노를 느낀다.

갑작스럽게 다가온 절망, 서운함, 분노, 원망, 그리고 공허와 박탈 앞에서 노먼은 공격적으로 변한다. 노먼은 목요일에 돌아가신 선생님으로 인해 주급을 다 받지 못할 것을 걱정하고, 앞으로 살 길이 막막해진 자신의 신세를 염려한다. 선생님의 마지막을 슬퍼하며 리어왕의 외투를 덮어주는 맷지를 향해 노먼은 말한다.

“난 이 사람에 대해 좋게 말해 줄 생각이 없어! ... 난 누구 앞에서도 말하지 않을 거야. ... 우린 모두 각자의 슬픔이 있어. 사람이 작을수록 슬픔은 커지게 마련이지. 당신은 선생님을 사랑했지? 난 어떨 것 같아? 여기는 죽을만한 장소가 아니야. 나에게 친구가 있었는데...”

복잡한 감정을 쏟아내는 노먼의 조리 없는 외침 사이로 연극의 막이 내린다.

연극 '더 드레서'공연 장면./사진=국립정동극장
연극 '더 드레서'공연 장면. '노먼(오만석)'은 선생님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또, 자신을 '친구'로 생각한다면서 자서전의 헌정사에 단 한마디도 감사의 말을 남기지 않은 선생님에게 분노한다./사진=국립정동극장

‘더 드레서’는 삶과 인간, 관계 속에 자리하는 ‘모순’을 노출한다.

망각을 두려워하면서도 지친 삶의 끝에 “필요한 건 망각”이라고 외치는 모순, 스스로 선택한 길을 가면서 누군가가 몰아붙인 삶을 힘겹게 살고 있다고 말하는 모순, 감사의 빚을 갚겠다고 하면서 이름조차 남기지 않는 무심함의 모순, 점점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하면서도 해결책을 찾기보다 외면을 선택하는 모순, 무엇보다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대한 모순...

기억은 감정이다. 함께 공유한 시간과 공간 속에 남겨진 생각의 교환, 채색된 감정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준다. 누군가를 기억하는 일은 그를 향한 감정을 소환하는 일이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그를 향한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다.

선생님의 말처럼,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은 누군가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는 일일 것이다. 나에게 좋은 감정을 품은 사람이 전하는 ‘나의 이야기’, 그것보다 더 값진 것이 있을까? 2022년 1월 1일까지 국립정동극장.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하영
주하영
jhy021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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