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관객 참여형 연극 '내게 빛나는 모든 것', 아버지 역 체험기
[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관객 참여형 연극 '내게 빛나는 모든 것', 아버지 역 체험기
  •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승인 2021.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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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객과 대화 형식으로 연극 진행...감정과 울림 느껴져
- 관객이 이웃 같은 느껴지는 따뜻한 무대
- 관객이 연극에 참여하는 '이머시브 씨어터'로 주목
연극 '내게 빛나는 모든 것'/사진=정중헌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요즘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에서 공연(~2022년 1월 2일)중인 영국 작가 던컨 밀란 작, 문새미 연출의 '내게 빛나는 모든 것(Every Brilliant Thing)'은 관객 참여형 연극으로 젊은 층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국립극단 등 큰 무대에서 주목받은 신예 백석광 정새별 이형훈이 돌아가며 무대에 서는데 이날 배우는 '조씨 고아'에서 아들 역을 했던 이형훈이었다.

최근 대학로에 관객이 연극에 참여하는 이머시브 씨어터가 늘고 있는데, 관람한 적은 있어도 참여해 보진 않았다. 그런데 사전에 전혀 내용을 모르고 간 공연에서, 그것도 젊은 여성 관객들 앞에서 즉흥 연기를 하게 되어 일순 당황했지만 많이 떨리지는 않았다. 그 체험을 공유하기 위해 리뷰 형식으로 정리해 보았다.

사각의 링처럼 관객을 앉게 한 블랙밖스 극장에서 배우는 평상복 차림 그대로 조명을 켜논 채로 관객과 대화 형식으로 연극을 풀어나갔다. 입장 전 이 연극의 석재원 프로듀서를 만났는데 혹시 배우가 역할을 부탁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는데 “아무리 이머시브씨어터가 유행이라지만 설마 나에게까지...”라며 일축해 버렸다. 80명 가까운 관객이 4면에 앉았는데 90%가 20~40대 여성 관객들이고 남자는 몇 안되는데 70대는 나 혼자였다.

'렁스'를 쓴 던컨 밀란이 2013년 영국에서 초연한 이 작품을 한국에서는 2018년 연강홀에서 개그맨 남녀가 공연해 화제를 모았다는데 난 생판 내용을 모르고 객석 앞줄에 앉았다.

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
연극 '내게 빛나는 모든 것'/사진=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

이야기는 주인공의 7살 때부터 시작됐다. 아버지는 서재에서 음악을 듣는 과묵한 분인데, 엄마는 세상이 살기 싫은 자살 충동의 우울증 환자였다. 일곱 살 역을 천진하게 해내는 이형훈은 자기보다 나이 많은 애완견의 임종을 위해 수의사를 만나러 간다. 1인극이니 수의사 역도 본인이 하겠지 했는데 A열 여성 관객에게 수의사를 부탁했다. C열 여성 관객의 털외투를 빌려 개를 만들어 안은 상태에서 관객 수의사는 볼펜으로 안락사 시키는 연기를 해냈는데 그게 어색하지 않고 죽음과 슬픔에 대한 감정을 일게 했다.

그런 꼬마가 아빠 차를 타고 엄마의 병원으로 가는 장면을 말하면서 사방을 두리번 거리더니 고령자인 내게 아빠를 해줄 수 있겠냐고 부탁하는게 아닌가. 순간 나 밖에 할 사람이 없다고 체념, 시키는대로 운전석에 차문을 열고 파이프 담배 피는 연기를했다. 아무래도 아빠 역은 안되겠는지 대사를 바꿔서 하자고 했다. 이형훈이 아빠 대사를 하고 아들인 나는 “왜”만 반복하는 연기였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그래도 내용을 듣고 감정을 담아 “왜”를 연기했는데 관객 호응이 느껴졌다.

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
연극 '내게 빛나는 모든 것'/사진=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

필자는 아마추어들에게 연극을 체험케 하는 생활연극협회를 만들기 앞서 용산 주민들이 하는 '나의 살던 고향은 용산(원제: 우리읍내)'에서 무덤에 묻힌 노역을 한 적이 있었다. 무대를 체험하기 위한 데뷔였는데 대사 몇 마디 하는데도 진땀을 흘렸었다. 그래도 연극 만드는 일을 해와선지 갑자기 역을 맡고도 떨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주인공이 대학에 들어가 연애를 하더니 결혼에 골인한다. 연인 역 샘도 D열 여성이 맡아 무대로 나와 멋진 프로포즈 연기를 펼쳤다.그런데 결혼식 장면이라며 필자에게 주례사를 해주겠냐고 했다.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는데 마이크를 쥐어 주고 무대에 나와 진짜 주례사를 연기해야 했다. 횡설수설 중에도 “인생은 날씨 같아서 변화무쌍하다. 좋을 때도 있지만, 나쁠 때도 있다”는 얘기를 했는데 우연히도 스토리가 이혼으로 흘러 한숨을 내쉬었다.

연기를 하고 나니 관객들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 공연 보러 가도 관객에게 관심 없었는데 이 모노드라마에선 관객을 참여시켜 함께 연기하니 관객도 배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객이 함께 해야 비로소 완성되는 연극인데, 그게 좀 어긋나고 어색해도 관객들은 박수쳐주며 수용해 가족이 되어가는 느낌을 갖는 것이다. 남성 관객에게 전자피아노 몸체를 들게 한 후 연주하면서 노래하거나, 즉석 도서관 분위기를 내기 위해 관객들에게 책을 빌리는 등 자연스럽게 참여를 유도하니 생판 모르던 관객도 멋져 보이고 한 배에 탄 느낌까지 드는 것이었다.

이 연극의 핵심은 “내게 빛나는 모든 순간”을 기록하는 리스트(목록)에 쓰여지는 메시지다. 7살 때 아이스크림, 줄무늬 양말 같은 일상 속의 물건들 이름을 종이에 써서 엄마의 관심을 끌려던 꼬마는 성장하며 겪는 모든 순간의 빛나는 것들을 적어 나가므로써 우울증 걸린 엄마의 삶을 구원하려 하지만 엄마는 끝내 죽음을 택하고 만다. 주인공은 그 아픔까지도 리스트화 하면서 연애하고 결혼하고 이혼하면서 리스트 넘버는 무려 100만번째에 달한다.

중간 중간 음악이 나오고 휴대폰 같은 소품도 등장하지만 후반 텅빈 무대에 젊은날 모았던 리스트 뭉치가 펼쳐지면서 무대가 꽉 차는 변화를 안겨준다. 그 뭉치 속에는 관객이 입장 전 ‘자신의 가장 빛나는 것’을 쪽지에 적은 것도 있는데 배우가 그중 몇 개를 읽어주기도 했다.

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
연극 '내게 빛나는 모든 것'/사진=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

사람은 누구나 가장 빛나는 순간, 가장 아름다웠던 기억,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가지고 있는데 작가는 그것들을 유난스럽지 않게 희곡으로 구성했고, 이형훈 배우는 애써 연기하지 않는 생활언어로 조그조근 관객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자살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직선적 메시지도 들어있지만, 그 보다는 누구를 위해 또는 누구와 함께 빛나는 것들을 기록하는 것은 일기와 또 다른 삶의 동력이자 자신의 카타르시스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1인극은 갈등이 있는 소재도 아니고, 배우가 힘들여 연기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울림을 주는 이유는 성장통을 지나 자신의 생으로 이어지는 쪽지 메시지와 관객 참여라는 편안한 방식으로 인생의 가치를 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연극 홍보물에 “마술같다”는 문구가 있는데 관객이 주인공이 되어 작품에 동화되거나 직접 연극에 참여함으로써 아우라 그 이상의 마술 같은 체험을 안겨주기 때문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연극 '내게 빛나는 모든 것'/사진=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

필자는 이날 이형훈 배우의 새로운 면모를 보았다. 4각의 링에서 4면의 관객을 배려하며 움직임과 시선을 안배하여 연기하기가 쉽지 않은데 시종 편안하게 90분을 이끌었다. 알고 보니 그는 한예종 연기과 출신으로 '오만과 편견', '보도지침' 등에서도 멋진 연기를 보였고, 뮤지컬과 정극, 코미디까지 고루 소화하는 유망주였다.

필자는 석재원 프로듀서를 알게 되어 이 연극을 보게 되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정동환 배우가 출연했던 '하이젠버그,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였다. 그는 이 작품의 제작자였다. 대학로에는 유능한 여성 피디들이 몇 있는데 석재원은 그 중에서도 평판이 높다. 이들은 작품 선정에서부터 시장조사, 관객 성향 파악까지 전문성을 살린 기획으로 흥행에도 확률이 높은 편이다. 코로나로 관객 모으기가 쉽지 않은 시점에서 젠더 프리로 남녀 세 배우를 등장시켜 관객을 모으고 있는 것도 그의 능력이다.

연극이란 거창한 메시지, 스펙터클한 무대, 기가 막힌 반전이 있는 재미도 있지만 이 작품처럼 소품임에도 관객과 함께 생각과 느낌을 나누며 사소하지만 행복을 느끼게 하는 형식도 있는 것이다. 내가 연극 속의 배우가 되어 연기를 하다니, 경품 한번 안 맞더니 웬 행운인가.

 

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을 지냈다. 현재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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