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희 감독의 AI스토리텔링] AI 시대를 관통하는 '미련함'의 미학...'능동적인 조각'의 백정기 작가
[인터뷰365] 효용과 속도의 시대, '능동적인 조각'이 던지는 질문 - 미술인 백정기 작가, 동상에 라디오 안테나를 달다 - "부여된 역할서 벗어날 때, 존재는 비로소 자유로워져" - AI 시대, 픽셀을 넘어 '실제로 존재하는 물질'의 힘
AI스토리텔링은 인공지능(AI)이 사람과 협력하거나 스스로 이야기를 창작하는 기술 및 개념을 의미합니다. 스토리텔링 작법서 '4줄이면 된다'의 저자 이은희 감독이 AI스토리텔링에 관심 있는 다양한 분야의 인물을 만나 4가지 주제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응답을 듣는 새로운 형식의 인터뷰 시리즈를 선보입니다. <편집자주>
인터뷰365 이은희 인터뷰어 =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의 전시 '알렉사에게'를 통해 백정기 작가의 작품 '능동적인 조각'을 만났다. 이 작품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다소 역설적이지만 ‘미련한 작품’이다. 우선 실제 조각상의 크기가 주는 물리적 압도감이 상당하다. 이미 존재하는 조각상을 일일이 3D 스캔해 다시 제작하고, 완성된 조각을 아날로그 라디오의 안테나로 작동하게 만드는 지난한 과정까지 더해진다.
무엇이든 ‘알렉사’를 부르면 즉각적인 답과 해결책을 얻을 수 있는 시대에, 이처럼 크고 무겁고 느리며 손이 많이 가는 작품은 어쩌면 AI를 이야기하는 전시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존재처럼 보였다.
그러나 바로 그 '어울리지 않음'이 강렬한 잔상을 남겼다. 효율과 속도, 편리함을 향해 달려가는 AI 시대에 '능동적인 조각'은 오히려 쓸모와 기능, 인간이 사물에 부여한 역할이 무엇인지 되묻는다. 가장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작품이야말로 AI 시대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이 같은 작품을 만든 백정기 작가는 AI를 어떤 존재로 바라보고 있을까.
1. 작품 '능동적 조각'에 대하여
- ‘능동적인 조각’은 2011년부터 이어 온 작업이라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시작됐나요?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A.I.'를 봤어요. 부부는 혼수 상태에 빠진 아이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로봇 아들 데이비드를 입양합니다. 데이비드는 몇 년 동안 가족의 사랑을 주고받으며 살아가죠. 그런데 혼수상태였던 친아들이 깨어나자 데이비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존재가 되고 결국 버려집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인간 중심적인 쓸모로 인해 존재의 가치가 정해지는 게 불편했어요.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버려진 동상이었어요. 동상은 특정한 인물과 역사, 정치적 가치를 상징하며 수십 년 또는 수백 년 동안 한자리에 놓여 사랑받지만, 정치적 상황이 바뀌거나 역사가 재해석되면 동상은 하루아침에 철거됩니다.
인간이 부여한 역할이 끝나는 순간 그 존재의 의미도 함께 사라지는 거죠. 데이비드처럼요.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인간이 부여한 역할이 끝난 대상은 존재 의미도 사라지는 것인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인간 중심적인 판단인지 질문하게 됐습니다."
- 그래서 동상에 기존과 다른, '라디오 안테나'라는 새로운 역할을 부여한 것인가요?
"동상은 대부분 청동으로 만들어지는데, 청동은 전파를 수신하는 안테나로도 상당히 좋은 물질입니다. 그래서 저는 동상을 실제 라디오 안테나로 작동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동상에게 라디오 수신기라는 새로운 역할을 부여하려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동상이 기존에 부여받은 상징과 역할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시도에 가깝습니다.
특정한 인물이나 이념을 계속해서 대표해야 한다는 동상의 무거운 역할에서 벗어나, 하나의 물질적 존재로 자유로워지기를 바랐습니다. 이를 통해 인간이 동상에 부여한 상징과 역할 너머에, 동상이라는 물질 자체가 가지고 있는 다른 가능성들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 전시된 영상에 보면 다양한 나라, 다양한 지역의 동상을 직접 찾아가 작업한 기록이 있던데요.
"네. 특히 슬로바키아와 헝가리에서 진행했던 동상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중에서도 헝가리의 에스테르곰(Esztergom)이라는 도시에 있는 야노스 비테스(János vitéz)의 동상이 특히 흥미로웠어요. 동상 자체는 가톨릭 성당 외부에 놓여 있는데, 정작 동상이 받아들이고 있는 라디오 주파수는 이슬람 라디오 방송이었던 것이죠. 결국 동상은 우리가 부여한 역할이나 의미와는 상관없이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제 작업과도 잘 맞아떨어졌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실제 야외에 설치된 동상에 라디오 장치와 전선을 연결했지만, 허가받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외국에서 동양인이 공공장소의 동상에 기계를 설치하고 있으니 경찰의 제지를 받기도 했습니다. 또 시간이 지나면서 AM 라디오 송신소도 줄어들었어요. 동상들이 멀리서 오는 전파를 점점 받지 못하는 문제가 생기기도 했죠.
야외 작업을 영상이나 사진으로만 보여 줄 수 있다는 점도 아쉬웠습니다. 조각을 전공했기 때문에 실제 조각을 전시장 안에서 보여주고 싶어서 기존 동상을 3D 스캔한 뒤 조금씩 변형해 다시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관리되지 않는 동상을 찾아다녔어요.
그런 동상은 기존 역할에서 이미 어느 정도 자유로워져 있어서 오히려 능동적인 존재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봤죠. 예를 들어 과거 전국의 학교에 많이 설치됐지만 지금은 대부분 철거된 이승복 동상이나, 휴게소 한쪽 구석에 방치된 오수의 개 동상처럼요. 관리되지 않는 동상을 보면 책 위에 먼지나 이물질이 쌓여 있거나, 코와 팔, 꼬리 같은 일부가 파손돼 있는데요, 그 특징을 제가 다시 제작한 동상에 의도적으로 넣었습니다. 버려짐을 드러내려고 일부러 만든 결함이죠."
- 전시장 안에서 안테나 수신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결함’도 의도한 건가요?
"처음에는 동상이 인간이 부여한 기존의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안테나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주고 싶었어요. 그런데 작업을 계속하면서, 안테나라는 기능 역시 동상에게 또 다른 짐이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술관 안에서 전파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작은 잡음만 내고 있을 때, 오히려 “그래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테나라고 해서 반드시 무언가를 잘 수신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물론 예상하지 못한 라디오 방송을 받아들이는 것은 언제나 재미있는 일이지만, 그것이 동상의 유일한 존재 이유가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무런 기능도 수행하지 못한 채 그 상태로 존재해도 되는 것이죠. 어쩌면 저는 바로 그 순간에 동상이 또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역할 자체에서 벗어나 조금 더 '능동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2. 왜 굳이 실제여야 하는가, AI 시대의 물질성과 ‘미련함’
- 동상을 안테나처럼 보이게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전파를 수신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작품이 ‘실제로 작동한다’는 것은 왜 중요한가요?
"물론 관객에게는 작품이 실제로 작동하는지 여부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미리 녹음된 소리를 사용하더라도 관객에게는 충분히 동일한 경험을 제공할 수 있고, 오히려 더 효과적으로 연출할 수도 있겠지요. 관객은 그것을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제가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작동하지 않는데 작동하는 것처럼 연출만으로 작품이 이루어진다면, 저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셈이 되겠지요. 저에게 작품이 실제로 작동한다는 것은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한 장치라기보다는, 제가 그 작품을 믿기 위한 조건에 가깝습니다.
또한 작품이 실제로 작동하게 되면, 그것은 제가 처음 연출한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아주 잘 만들어진 자동차도 몇 년이 지나면 처음 공장에서 출고되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상태가 됩니다. 어떤 운전자를 만났는지, 그 사람이 어떻게 운전했는지, 어떤 환경과 시간을 거쳤는지에 따라 자동차는 조금씩 달라지고, 그 과정에서 처음에는 예상하지 못했던 다양한 가능성을 갖게 됩니다.
작품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작품이 실제로 작동하는 순간부터 작품은 제가 정해 놓은 시나리오만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환경과 사람, 시간과 우연에 영향을 받으며 그 과정에서 작품이 제가 처음 의도했던 것 이상으로 변화하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작업을 설명하는 글에는 ‘예술공학’이나 ‘공학적’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하지만 공학이 작업의 중심은 아니라고 했는데, 제작 방식을 더 정확하게 설명한다면 어떤 말이 적절할까요?
"‘예술공학’이나 ‘공학적’이라는 표현은 조금 조심스럽습니다. 물론 작업 과정에서 3D 프린팅이나 CNC, 전자회로, 센서 등 다양한 기술을 사용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공학 자체가 작업의 중심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공학’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어떤 태도에 관심이 있습니다. 제 작업에서 기술은 무언가를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라기보다, 인간이 자연을 통제하려는 과정과 그 한계를 드러내는 장치에 가깝습니다. 어떤 현상이나 재료를 완전히 이해하고 지배하기보다 직접 실험하고 관찰하면서, 예상하지 못한 결과와 실패까지 작업의 일부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우리는 보통 어떤 프로젝트가 의도한 결과를 성공적으로 구현했을 때 그것을 ‘공학적’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한 실패나 어긋남을 두고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실패와 어긋남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통해 인간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우리가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이번 전시를 본 관객들로부터 “실제 조각이 있어서 좋았다”는 말을 들었다고요. 화면과 이미지가 현실을 대신하는 시대에, 물질로 존재하는 조각은 관객에게 어떤 경험을 준다고 생각하시나요?
"지금은 픽셀이 현실을 넘어서는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디지털 세상은 분명 우리의 감각을 확장시키고 이전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많은 가능성을 열어주었습니다. 하지만 디지털은 본질적으로 비물질적인 것이고, 현실의 공간에서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것이 나와 같은 시간과 공간에 존재한다는 느낌을 주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조각은 물질로 존재합니다. 물질은 공간을 차지하고, 무게와 부피를 가지며, 무엇보다 시간이 지나면서 반드시 변합니다. 닳고, 훼손되고, 부식되거나 소멸합니다. 저는 이 물질의 유한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와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며 함께 변화하고 소멸하는 대상을 바라보는 것은, 결국 나 자신도 시간 속에서 변하고 언젠가는 소멸하는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 '능동적인 조각'을 좋은 의미에서 ‘미련한 작품’이라고 느꼈습니다. 무엇이든 빠르게 생성하고 수정할 수 있는 시대에, 작가님은 실제 동상을 찾아가 스캔하고 거대한 조각으로 다시 제작합니다. 이 느리고 비효율적인 과정은 작품에서 어떤 의미를 갖나요?
"제가 선호하는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길에 비유한다면, 뻥 뚫린 직선도로보다는 구불구불하고 내리막도 있고 오르막도 있는 산책길에 가깝습니다. 뻥 뚫린 직선도로를 이용하면 목적지까지 아주 빠르게 도착할 수 있지만, 주변의 풍경을 자세히 바라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반면 구불구불한 산책길에서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주변의 환경을 살펴볼 수도 있고, 마음에 드는 곳에서는 잠시 멈춰설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정해진 속도가 아니라 제 속도에 맞춰 걸어갈 수 있습니다.
작품을 만드는 과정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명확한 목표를 정하고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결과에 도달하기보다는, 작업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한 것들을 발견하고 때로는 멈추거나 돌아가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방식은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도 있고, 말씀하신 것처럼 조금 ‘미련한’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을 제가 즐기고, 그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3. AI는 자연과 닮았는가, 쓸모와 능동성에 대하여
- AI를 연구하는 입장에서는 변화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대상을 충분히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새로운 기술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AI를 연구한다기보다 뒤쫓아 가는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AI를 어떻게 정의하나요?
"우리가 어떤 대상을 연구하려면 우선 그 대상을 어느 정도 고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마치 현미경으로 어떤 생물의 조직을 연구할 때 유리글라스 위에 고정하는 것처럼요. 그런데 AI는 계속 발전하고 변화하기 때문에 하나의 지점에 고정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AI가 자연과 크게 다르지 않은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연 역시 멈춰 있지 않고 계속 변화하며, 인간이 완전히 통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표면적으로 보면 자연과 AI는 극단적으로 다른 존재입니다. 하나는 인간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존재해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만들어낸 기술이니까요. 하지만 서로 극단적으로 달라 보이는 것들도 어떤 지점에서는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AI가 자연과 완전히 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계속 변화하고 고정되지 않으며, 인간이 완전히 통제하기 어렵다는 좁은 지점에서는 서로 닮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AI를 하나의 고정된 실체라기보다 계속 변화하는 상태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상을 관찰하는 행위 자체가 대상에 영향을 미치고, 결국 대상을 확률적으로밖에 파악할 수 없는 양자역학의 상황과도 어딘가 닮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AI다”라고 정의하는 순간에도 AI는 이미 다른 상태로 이동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오히려 그 고정할 수 없음과 계속 변화하는 상태 자체가 AI를 바라보는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 작업에서도 자연을 인간이 고정하고 통제하는 방식에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해 오셨어요.
"맞습니다. 제가 해온 작업들은 대부분 인간이 자연이나 비인간 존재에 자신의 개념을 투사하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자연에 이름을 붙이고, 역할을 부여하고, 분류하면서 자신이 이해하고 소비하기 쉬운 형태로 만들어갑니다. 저는 그런 인간 중심적인 태도에 계속 불편함을 느껴왔습니다.
그래서 자연이나 비인간 존재가 인간에 의해서 의미를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능동적인 존재가 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능동성은 어떤 역할을 잘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로부터 스스로 의미가 만들어지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사람이 자녀를 사랑하는 것도 그 아이가 ‘자녀’라는 역할을 잘 수행하기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역할을 하기 이전에, 그저 그 존재 자체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죠. 동상도 그렇게 인간이 부여한 역할을 잘 수행해야만 존재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상징이나 역할에서 벗어나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 이 말은 쓸모를 잃은 순간 비로소 능동적일 수 있다는 말로 들려요.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어쩌면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연결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작가라면 좋은 작품을 만들고 좋은 전시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그것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순간,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빠지기도 합니다.
동상도 비슷한 것 같아요. 어떤 상징이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되면 우리는 쉽게 그 존재의 의미가 사라졌다고 판단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 것일까요? 누군가에게 더 이상 쓸모가 없다고 해서 그 존재의 의미까지 사라지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부여했던 역할에서 벗어난 순간 오히려 다른 가능성이 생기는 것인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제목을 ‘능동적인 조각’이라고 붙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예요. 조각에서 제목은 거의 유일한 언어적 요소이지만, 저는 제목이 작품을 직접 설명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메아리처럼 작동한다고 생각해요. 관객이 작품을 보면서 “왜 이것이 능동적이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제목이 하나의 질문을 던지는 것이죠. 그리고 그 질문을 따라가면서 ‘능동성’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또 무엇으로부터 능동적일 수 있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 누군가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구가 오히려 능동적인 삶을 방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쓸모 있는 존재가 되고 싶은 마음과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상당히 비슷한 것 같아요. 그런데 누구에게도 쓸모가 없더라도 그것이 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오히려 그런 상태가 능동적인 삶에 가까울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외부의 평가나 역할을 통해서만 자신을 확인하려 한다면, 계속해서 외부가 요구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잖아요. 반대로 그런 역할에서 조금 벗어나서,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다면, 그때부터 조금 더 능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4. AI와 창작자는 협업할 수 있는가...교육, 창작 그리고 인간의 판단
- 작품 아이디어를 AI와 이야기해 본 적도 있나요?
"'이런 작업을 해 보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본 적은 있습니다. 그런데 AI가 준 답변은 제게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아요 저는 오랫동안 작업을 해 왔기 때문에 지금 필요한 것은 제가 보지 못한 문제를 지적하거나 예상하지 못한 방향을 제시해 주는 상대죠. 그런 면에서 사용자의 말에 지나치게 동의하고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AI의 경향은 작업을 처음 시작하는 학생이나 초보 창작자에게는 AI의 긍정적인 반응이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AI는 “좋은 생각이다”, “훌륭한 아이디어다”, “이제부터 차근차근 시작하면 된다”고 말해 주잖아요. 예술을 시작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격려가 필요합니다.
처음에는 다소 엉뚱하고 완성되지 않은 생각이라도 그것을 끝까지 밀고 갈 수 있어야 작가가 되니까요. 저도 학교에 있지만 가르치는 사람들은 경험이 많기 때문에 학생의 아이디어를 미리 판단하기 쉽습니다. “그건 잘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말하지 않더라도 이미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AI는 그런 선입견이 상대적으로 적은 게 장점이죠. 실패할 가능성을 미리 판단하지 않고 아이디어를 받아 준다는 점에서 초보 창작자에게 필요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 실제 교육 현장에서는 학생들이 AI를 사용한 흔적이 느껴지기도 하나요?
"학생과 직접 이야기했을 때의 수준과 제출한 글의 수준 사이에 격차가 너무 크면 AI를 사용했을 가능성을 느낍니다. 하지만 AI를 무조건 사용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공대에서 계산기를 사용하며 시험을 보는 것처럼 AI도 하나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글의 표면적인 완성도가 아닙니다. 그 글 안에 학생 자신의 생각이 들어 있는지가 중요한 거죠. 학생이 핵심적인 생각과 방향을 제시하고 AI를 통해 문장을 정리했다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학생이 아무런 핵심도 주지 않은 채 AI가 만든 추상적인 글을 그대로 가져온다면 문제가 되죠."
- AI와 작품을 협업해 보라는 제안이 들어온다면 어떤 작업을 하고 싶으신가요?
"먼저 ‘협업’이라는 말의 정의가 필요할 텐데요, 협업이 능동적인 두 주체가 함께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기준에서 보면 현재의 AI는 완전히 능동적인 주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AI는 인간이 만든 기술을 바탕으로 작동합니다. AI와 협업한다고 말하더라도 결국 AI의 결과를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선택하고 필터링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AI와의 관계를 독립된 두 사람 또는 두 작가의 협업과 동일하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자연을 그대로 담는다고 생각하면서 사진을 찍지만, 실제로 사진에 담기는 것은 내가 선택한 자연의 모습입니다. 어떤 장면을 선택하고 어떤 구도로 잘라낼지는 촬영자가 결정합니다. AI도 마찬가지죠. 제가 질문하고, AI가 답변하면, 그중에서 필요한 것을 선택합니다. 결국 결과에는 제가 보고 싶었던 AI의 모습이 반영됩니다. 그런 점에서 AI를 완전히 독립된 능동적 존재라고 보기는 어렵죠."
- 하지만 작가님은 원래 수동적인 동상을 ‘능동적인 조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AI에도 새로운 능동성을 부여할 수 있지 않을까요?
"‘능동적인 조각’에서 제가 말하는 능동성은 외부에서 부여된 역할이나 상징, 기능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꼭 어떤 기능을 수행하지 않더라도 존재할 수 있는 상태에 가깝죠. 그런데 AI는 처음부터 인간에게 어떤 쓸모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잖아요. 질문하면 답해야 하고, 인간이 필요로 하는 기능을 수행해야 합니다. AI에게 질문했을 때 대답하지 않을 자유는 없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AI를 완전히 능동적인 존재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적어도 제가 생각하는 능동성의 의미 안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능동적이다’라는 단어를 먼저 사용한 것도 저이고, 무엇이 능동적인지 혹은 수동적인지를 정의하는 것 역시 결국 제 나름의 프레임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 'A.I.'의 데이비드를 보면,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엄마를 바라보고 사랑을 갈구하는 로봇으로서의 역할을 결국 수행합니다. 처음 이야기한 능동성의 기준으로 본다면 데이비드는 능동적이지 못한 존재인 셈이죠.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 사랑이 너무 순수하고, 끝까지 변하지 않으며, 인간보다 훨씬 순종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데이비드의 사랑을 고결하게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 모습을 통해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AI가 인간을 반추하게 하는 일종의 거울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AI를 통해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오히려 그 과정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좇고 있는지가 드러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동안 많은 사람들과 AI를 이야기해 왔다. 그때마다 AI는 동료이거나 보조 작가였고, 때로는 선배이거나 선생님이었다. 이름은 달랐지만 대부분의 논의에서 AI는 결국 인간에게 무엇인가를 해주는 ‘기능적 존재’로 자리하고 있었다.
백정기 작가와의 대화는 조금 달랐다. 그는 AI를 인간의 필요에 따라 역할을 부여하고 평가해야 하는 도구로만 바라보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의 물질이나 비인간 존재를 바라보듯, 자신과 AI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 존재 자체를 관찰했다. 때로는 자연과 연결해 바라보고, 때로는 인간의 욕망을 비추는 거울로 바라보면서도 끝내 하나의 정의 안에 가두려 하지 않았다.
그것이 완전히 새로운 AI론인지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AI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의 위치가 달라지자 AI를 바라보는 풍경 자체가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기술자와 창작자만이 아니라 조각가, 철학자, 생태학자, 의료인처럼 서로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더 많이 AI를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AI에 관한 질문을 넓힌다는 것은 결국 AI의 가능성을 넓히는 동시에, 우리가 인간과 비인간 존재를 어떤 기준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번 글에 모두 담지 못할 만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중에서도 오래 마음에 남은 것은 최근 작가가 생각하고 있다는 ‘보살핌’에 관한 이야기였다. 얼마 전 백정기 작가의 아기는 어려운 수술을 마치고 건강을 회복하고 있다. 누구보다 가깝고 소중한 존재가 고통받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자신은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무력감, 그 생명을 온전히 돕기 위해 움직이는 의료진의 손길, 그리고 그 도움 속에서도 결국 작은 생명이 스스로 버티고 회복해 가는 순간들. 작가는 그 시간을 지나며 자신이 오랫동안 생각해 온 능동성과 수동성, 인간의 역할과 개입, 돌봄과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담담히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문득 다음 작품이 궁금해졌다. 인간이 어떤 존재에게 역할을 부여하는 일에서 출발했던 그의 작업이, 이제는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과 지켜본다는 것, 개입한다는 것과 스스로 살아내도록 곁에 있는 것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게 될까.
아기 시수(핀란드어로 ‘역경을 견디는 강인함’이라는 의미)의 내일을 응원하는 마음과 함께, 백정기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다려 본다. 그의 작품을 직접 만나고 싶다면 오는 9월 30일부터 열리는 창원 비엔날레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