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의 진수 보여준 '다 내 아이들'...극단 백수광부 30주년 기념작

[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 아서 밀러의 사회극을 이성열 연출이 현실로 재조명 - 박완규 길해연 권다솔 배우 등 명품 연기...감동 이끌어

2026-08-23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내 가족을 위한 일이라도 그게 수십, 수백 명을 죽이게 된다면 과연 온당한 일인가?

미국의 극작가 아서 밀러가 1947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한 ‘All My Sons’가 극단 백수광부 30주년 기념으로 기획된 ‘다 내 아이들’이란 공연을 관람하며, 왜 지금 우리 현실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까?

세련된 현대 무대에서 펼쳐지는 오늘의 이야기인데 왜 희랍 비극 같은 장중함과 비장함이 느껴지는 걸까? 분명 한 가정의 비극인데도 왜 희랍극에서 받았던 비극의 교훈과 카타르시스가 온몸을 전율시킬까?

20세기 초중반 미국의 대표적인 극작가들인 아서 밀러, 테네시 윌리엄스, 에드워드 올비 등은 왜 영화나 뉴미디어가 아닌 전통적인 연극 형식을 고수했을까?

8월 22일 오후에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이성열 연출의 '다 내 아이들'을 관람하며 여러 생각들이 맴돌았다.

연극의 존재 이유, 연극의 힘, 연극의 역할 등이 새삼 떠오를 만큼 강한 임팩트를 받은 것이다.

탄탄한 구성의 희곡, 어느 한 곳 허술함이 없는 세련된 연출, 명불허전 명배우들의 전율을 일으키는 명연기, 극단 백수광부의 30년 신뢰가 어우러진 무대는 연극이 주는 재미와 감동이 미려와 아무리 AI를 외쳐도 연극은 영원하리라는 확신을 갖게 했다.

지난해 이 공연을 놓쳐 이번에는 티켓 오픈을 하자마자 예매를 했다.

이성열 연출에 대한 기대도 컸지만 근래 뜸했던 박완규 배우의 ‘미친 연기’를 보기 위해서였다. 역시 박완규 배우는 기대 이상이었고 길해연 권다솔 배우와의 앙상블도 일품이었다.

사실 아서 밀러의 ‘All My Sons’를 공연으로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대표작 ‘세일즈맨의 죽음’이나 ‘시련’이 현대 고전에 속하는 명작이라면 이 작품은 ‘사회적 책임’을 다룬 초기작으로 이미 명성을 얻었는데, 이제야 본 것이다.

1947년 뉴욕 브로드웨이 초연은 거장 감독 엘리아 카잔이 연출해 공연도 성공을 거두었고 뉴욕비평가상을 수상했다.

2차 대전의 승전국인 미국은 막대한 무기를 팔아 부를 축적했다. 아서 밀러는 그 와중에서 생긴 한 기업인의 양심과 책임의 문제를 한 가족을 통해 신랄하게 그려냈다.

자수성가한 사업가 조 켈러(박완규)는 전쟁 중 군용 전투기 부품 납품으로 성공을 거두지만 출하 직전 발견된 부품의 결함을 묵인한 탓에 21명의 조종사가 추락해 전사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전쟁 중 이런 사례는 비일비재 했겠지만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현실을 아서 밀러는 한 가정에서 사회 전체의 문제로 파고들었다.

우리도 현대화 과정에서 대형 사고가 빈번했다. 이성열 연출이 “159 이태원 304 맹골수도”로 표현한 참사의 책임 규명이 되었는지도 의문이다.

그뿐인가? 하루에 수도 없이 사건 사고가 발생하나 진상규명은 더디고 책임 소재 역시 모호하기만 하다.

아서 밀러가 던진 이 연극의 화두는 “가족을 위해서라면 잘못해도 되느냐”이다. 이 말은 “나라와 국민을 위해서라는 미명하에 부정, 부패, 비리를 저질러도 되느냐”로 확대할 수 있다.

특히 위정자들은 자기들만의 집단을 위해서라면 백성들이 피해를 보는 것쯤은 예사로 여기는 사례를 우리는 매일 목격하고 있다.

무대디자인(이송이)은 심플하면서도 많은 것을 시사했다.

한 가정의 보금자리인 집의 벽에 길게 금이 간 것이다. 그리고 희랍극의 성문처럼 통로가 하나 있을 뿐이다. 무대 중앙은 이웃들과 소통하는 광장의 역할을 했고 배우들의 등퇴장은 자유로웠다.

조 켈러의 가족은 부인 케이트(길해연)와 큰아들 크리스(권다솔), 둘째 아들 래리는 마지막 비행 이후 의문의 실종 상태이다. 엄마인 케이트는 3년이 되어 가지만 래리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켈러의 집에 래리의 애인이자 동업자의 딸인 앤 디버(박희정)가 크리스와 결혼하기 위해 오면서 핼러윈 파티를 준비하며 단란했던 가정에 풍파가 일기 시작한다. 앤의 오빠인 존 디버(송유준)는 수감된 아버지를 대신해 조 켈러의 과거 비리를 폭로한다.

이 극에서 중심인물은 큰아들 크리스이다.

그는 아버지 조 켈러를 존경하고 사랑하며, 전쟁에서 돌아온 후에도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가려 한다. 그런데 아버지의 비리를 알게 되면서 핏줄과 정의 사이에서 번민한다.

아들 크리스가 아버지의 불의에 대해 항의하자 조 켈러가 답하는 다음의 대사가 이 작품의 핵심이다.

”그 모두가 우리 가족, 너를 위해 한 것이다.“

조는 아들이 가족이고, 사업도 가족의 미래라고 항변하지만, 크리스는 그 여파로 21명의 청춘들이 죽은 책임을 묻는다.

아서 밀러는 이 작품에서 가족에 대한 책임과 사회에 대한 책임을 서로 분리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아버지 조 켈러는 극의 후반부에 “내 자식”을 내세우다가 마지막에는 전쟁터에서 죽은 21명의 젊은 조종사들까지도 자신의 아들이었다(제목의 ‘다 내 아이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대사를 하는 박완규 배우의 눈에 눈물이 흘렀고, 온 신경을 집중시킨 얼굴은 일그러졌다.

이 대목이 필자에게는 ‘최고의 명장면’이었다.

또한 공연을 보면서 아서 밀러의 ‘진실 캐기’ 극작술에 탄복했다.

양파 껍질 벗기듯이 하나씩 진실을 보여주다가 마지막에 둘째 아들 래리의 친필 유서 공개로 절정을 이루는 것이다.

이해랑연극상을 수상한 이성열 연출은 한국의 대표적 연출가로서 주목할 만한 작품을 많이 발표했지만 특히 아서 밀러의 ‘다 내 아이들’에서 어디 하나 빈틈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되면서도 완성도 있는 무대를 보여주었다.

무엇보다도 1940년대 미국의 이야기를 2026년 현재의 한국 이야기처럼 현실감 있게 연출한 점이 돋보였다. 공연을 보면서 정치가, 기업가들이 보면 느낄 것이 참 많겠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내 편, 내 집단만 챙기면 된다는 사회 각계의 비상식적 행위들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작가와 연출의 메시지가 강하게 와닿았다.

두 번째는 배우들의 앙상블 연기와 미장셴이 뛰어나다는 점이다.

길해연 박완규의 연기파 조합에 극단 백수광부의 탄탄한 연기술이 조화를 이뤄 연극의 멋과 맛을 한껏 살려내고 감동까지 몰고 갔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세 번째는 스태프들과의 협업이 잘 맞았다는 점이다.

이미 언급했듯 극의 아우라를 함축한 무대디자인(이송이)이 작품과 조화를 이뤘고, 심도가 깊은 김창기의 조명, 극의 감정을 가슴으로 전달한 한응원의 음악, 현대와 희랍극을 조화시킨 이수원의 의상 등이 밀러의 메시지를 더욱 승화시켰다.

이제 배우들의 연기에서 받은 감동을 말하고 싶다.

기록을 보면 1947년 엘리아 카잔 연출의 초연 이후 여러 차례 공연됐는데 그때마다 연출가와 출연 배우들의 연기가 화제에 올랐고 수상했다.

이야기는 켈러 가족과 디버 남매의 인물 5명이 끌어가지만 아서 밀러가 배치한 이웃들도 눈으로 보는 캐릭터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이웃인 베일리스 부부의 남편 짐(이산호)은 의사이고 아내 수(김민선) 역시 미국 중산층을 대표하는 캐릭터다.

점성술을 하는 프랭크 루비(이형우)와 미소 천사인 리디아 루비(박성원) 부부도 켈러 가족과 소통이 잘 되는 부르주아들이다. 전쟁놀이하는 소년 비트(박제훈)는 전쟁을 비판하며 극에 여유를 불어넣는 캐릭터이다.

필자가 가장 주목한 배우는 박완규였다.

2018년 손진책 연출의 ‘돼지우리’의 파멜 역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던 박완규 배우는 이근삼 작 ‘국물 있사옵니다’, 정의신 작 ‘넓은 하늘에 무지개를 보면 내 마음은 춤춘다’에서도 탁월한 개성 연기를 보였다.

최근 주목할 작품에서 그를 만났지만 감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는데 이번 ‘다 내 아이들’에서 보인 조 켈러 연기는 다시금 소름이 돋을 만큼 명연이었다. 가정과 자식들을 위해 피나는 노력으로 자수성가한 그가 아들로부터 정의와 책임을 추궁당하자 눈물로 방어하다가 끝내 무너지고 마는 회한의 연기를 가슴이 저미도록 온몸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게 래리(둘째 아들)가 하고 있는 말 아니면 뭐야? 맞아. 래리는 내 아들이지. 그런데 얘한테는 다른 아이들도 다 내 아이들이었나봐.”

이 대사를 하는 박완규 배우는 평생 가족을 사랑한 아비로서의 진정성뿐 아니라 뒤늦게 책임을 통감한 양심의 아픔을 절절하게 토해내는 열연으로, 그의 인생작에 또 하나의 ‘전설’을 추가했다.

이해랑연극상 등 굵직한 연기상을 수상한 길해연 배우도 적역을 맡아 호연했다.

연기 잘하는 배우이나 비슷한 캐릭터로 이미지가 겹치는 경향이 없지 않았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둘째 아들을 향한 진한 모정 연기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실종된 아들을 기다리는 아픔, 누가 뭐라해도 아들이 살아있다는 신념, 때로 신경질적이고 냉정한 성깔 연기를 보이다던 그가 아들의 육필 편지에 오장육부를 쥐어짜는 오열로 무너지는 혼신의 연기는 이 무대의 백미였다.

큰아들 크리스 역을 맡은 권다솔 배우는 몇 년 전 ‘아르카디아’라는 작품에서 본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다섯 명의 배우 중 중심 캐릭터를 맡아 부모인 박완규 길해연뿐 아니라 애인인 앤 역 박희정, 앤의 오빠 존 역의 송유준과의 연결 고리 역할을 해냈다.

배우의 조건을 갖춘 외모지만 크리스라는 다중적이고 강렬한 개성의 캐릭터를 해내기에는 다소 약하지 않나 라고 생각했는데 기우였다. 극단 백수광부에서 다진 배우답게 상황을 끌어가는 순발력과 힘이 있었고, 사랑하고 존경하나 미워하고 저주해야 하는 어려운 감정 연기를 부드러운 톤으로 그러나 강하게 해냈다.

앤 역의 박희정 배우는 이 양파까기같은 진실게임에서 키를 쥔 캐릭터를 추리극처럼 매력 있게 연기했다. 동생 래리의 애인에서 형 크리스의 애인이 되어 케이트의 견제를 받지만 당당하게 자신의 소신을 밀고 가는 야무진 연기를 해낸 것이다.

수감된 아버지를 대신하여 진실을 폭로하는 존 역의 송윤준 배우 역시 이 연극의 핵심 인물로 한 가정을 파탄으로 이끄는 마성의 캐릭터인데 파워가 좀 약한 면이 없지 않았다.

이 연극은 비극에서 교훈을 얻는 희랍극과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는 미국 현대 작가 아서 밀러가 연극의 원형에 바탕하고 있다는 의미기도 하다. 극작술 역시 화평-거짓-의심-죄책감-폭로-진실-파국이라는 비극의 형식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연극은 영화 등 여러 매체와 분명 다른 고유한 언어와 연극만의 아우라가 있음을 극단 백수광부 이성열 연출의 역작 ‘다 내 아이들’에서 확인했고, 연극의 본령인 감동과 카타르시스까지 느낄 수 있었던 행복한 관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