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천 년 전 대서사시에 생명력 불어넣은 영화 '오디세이'...첨단 영상으로 펼쳐낸 탄탄한 스토리의 힘
[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디세이' - 스케일과 완성도, 명배우들의 최상의 연기...탄탄한 이야기 구조 돋보여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기원전 8세기 호메로스가 현대에 환생했다고 할 만큼 위대한 서사 작가였다.
8월 13일 용산 CGV 아이맥스관에서 가족들과 함께 본 놀란 감독의 '오디세이'는 3시간 동안 필자의 영혼을 사로잡은 위대한 걸작이었다.
영상으로 그려낸 과거 3천 년의 장엄한 역사이자 AI 시대 인류에게 던지는 진솔한 메시지였다.
예매가 앞쪽 좌석이어서 전편을 아이맥스로 촬영한 영상미와 음향의 진수를 온전히 느끼지는 못했지만, 올 로케로 담아낸 현장의 생생한 아우라는 전편을 압도했고, 제작진의 집념과 협업에 경외감(敬畏感)이 들 정도였다.
개봉 전에 수많은 관련 콘텐츠와 인터뷰가 넘쳐났고, 전문가 비평도 관객 리뷰도 홍수를 이뤄 필자는 '오디세이'에 대한 저널리즘 리뷰는 하지 않을 생각이다. 보는 이에 따라서 느낌과 관점이 다를 수 있는 만큼 거기에 내 일부 생각이 별 보탬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다.
다만 필자가 느낀 두 가지는 남겨 공유하고 싶다.
첫째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각색 능력에 탄복했다는 점이다.
그리스 시대의 호메로스가 쓴 대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는 서양 문명의 근원이자 모든 학문과 예술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고전 중의 고전이지만 대중적이지는 않았다.
국문학을 전공한 필자도 대학 시절에 도서관에서 두어 차례 대여했다가 완독을 못 했던, 필독서라는 걸 알면서도 보편화되지는 못했었다. 이야기가 워낙 방대한 데다, 신(신화)과 인간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이해가 쉽지 않았던 때문이다.
그런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이 3천 년 전의 전쟁과 귀향(歸鄕)에 관한 이야기에 현대 인간을 향한 위대한 메시지(교훈)가 있음을 간파하고, 이를 오늘의 이야기로 재구성했다.
아버지가 아들을 무릎에 앉혀놓고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 흥미진진하게 스토리를 펼쳐가면서 그 안에 인간의 오만과 탐욕, 그 결과가 주는 징벌적 응보까지 곁들인 자신의 메시지까지 담아낸 것이다.
놀란 감독이 최고의 배우를 캐스팅하고 촬영부터 소품에 이르기까지 전 스태프들의 몰입으로 영화의 기술과 미학을 최고 수준으로 업그레이드시켰다는 데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그런데 필자는 이 영화의 최대 미덕은 제작 전 각색 단계에서 "이야기(스토리)의 구조"를 탄탄하게 구축했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는 기원전 문명시대에서 대대로 전해지는 이야기를 호메로스가 집대성했다는 설도 있다. 사실 여부를 떠나 구전(口傳)으로 전해져 온 무용담과 신의 뜻을 거슬러 온갖 수난 끝에 고향에 닿는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담아낸 대서사시인 것이다.
신화와 인간의 사건들이 뒤섞인 고전을 호메로스는 신(神) 중심으로 기술했다면 놀란 감독은 인간 중심으로, 그것도 요즘의 인공지능이 아닌 자연의 변화 속에서 견뎌온 인간의 천성을 전통적인 기법으로 펼쳐냈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놀란 감독은 첫 장면에서 래퍼(음유시인)의 노래로 '한 인간(人間)'의 이야기를 예고하고 이를 회상(回想) 형식으로 펼쳐냈다.
오디세이의 지략으로 목마 작전을 펼쳐 트로이를 함락시키는 역사 속 순차적 기술이 아니라 칼립소(샤를리즈 테론)의 질문과 마녀 키르케(사만다 모턴)의 조언 등으로 여정을 들려주면서, 아타카 왕국에서 청혼자들에게 시달리는 아내 페넬로페(앤 해서웨이)와 아들 텔레마코스(톰 홀랜드)의 현재도 보여주는 서술 방식을 택한 것이다.
놀란 감독은 영화에서의 회상 기법(플래시백)으로 복잡다단한 옛이야기를 조곤조곤 현대의 관점에서 보여줌으로써 사전 지식 없는 관객들도 이해할 수 있게 영화를 만들었다. 이야기가 재밌는데 그걸 어마무시한 초대형 초강력 영상으로 보여주니 감탄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둘째는 영화는 자본과 기술, 마케팅 등으로 이루어지는 문화상품이지만 놀란 감독의 '오디세이'는 기술집약적인 고도의 테크닉뿐 아니라 인문학과 역사와 철학적 접근으로 이뤄낸 예술의 개가라는 점이다. 거대한 자본이 움직이는 할리우드 영화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세계 관객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보편성과 특별성을 강조해왔다.
이 영화의 제작자이자 기획자인 엠마 토머스는 놀란 감독의 부인이고, 프로듀서 겸 각본가로 활동하는 조너선 놀란은 동생이자 역사학 전공자이다.
이들은 미국에서 활동하지만 영국 출신들이다. 주인공 맷 데이먼, 요즘 인기가 치솟는 톰 홀랜드, 앤 해서웨이, 샤를리즈 테론 등 배우들의 경력도 만만치 않다. 놀란 감독은 인기와 역량에 더해 어려운 고전도 현대적으로 해석해 낼 수 있는 인문학적 소양의 맨파워로 진용을 짠 것이다.
이들은 놀란 감독의 지휘 아래 스튜디오가 아닌 현장에서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지는 생생한 실감 영상을 만들어냈다. 영화의 소재나 기획도 중요하지만 이 영화의 프로듀서, 감독, 배우들의 인터뷰 영상을 보면서 접근 및 제작 방식도 참고할 점이 많았다. 특히 박찬욱 감독과 놀란 감독의 대화는 영화의 속살을 보는 것 같은 짜릿함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