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 시인의 좋은 시 365] 이영춘 시인의 ‘사라지는 것은 아름답다’
시는 인간 마음속 심상(心像)에서 피어나는 혼불과도 같습니다. 깊은 사유의 내면에서 길어 올린, 짧지만 응축된 언어문학의 보석과도 같은 시의 세계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좋은 시와 함께 조용하지만 반짝이는 하루를 보내시길 바랍니다.
사라지는 것은 아름답다 / 이영춘
여름 날 한 바탕 소나기가 지나간 후
새 파란 잎파리들이 칼날처럼 일어서
하늘하늘 세상만물과 교감하고 있을 때,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새벽 눈 밭에
새 발자국 몇 개
볼우물처럼 웃고 있을 때,
고요한 한밤의 정적을 깨며
하늘을 가로 지르고 있을 때,
그대 처음 만나 환상의 꽃을
피우던 자리에서 그 꽃무늬 따라
홀로 슬픔을 지우고 있을 때,
지나간 모든 것은 참으로 아름답다.
- 시선집 '들풀' (북인,2009)
강원도 봉평에는 들판을 걷다가 문득 풀 한 포기와도 오래 이야기를 나눌 것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이영춘 시인입니다. 그는 봉평의 자연을 벗 삼아 자랐으며,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교육대학원에서 공부한 뒤 1976년 ‘월간문학’을 통해 문단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이후 중·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 동안 시를 써왔습니다. 현재는 후학들의 시 창작을 지도하며 강원 지역에서 열리는 여러 문학상의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시집으로는 ‘시시포스의 돌’, ‘슬픈 도시락’, ‘봉평 장날’, ‘노자의 무덤을 가다’, ‘『따뜻한 편지’, ‘오늘은 같은 길을 세 번 건넜다’, ‘참회록을 쓰고 싶은 날’ 등 17권을 펴냈습니다. 그는 무심히 지나치기 쉬운 풍경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자연을 통해 인간의 외로움과 희망을 들여다봅니다. 또한 사회적 약자들의 삶과 그들이 남긴 흔적을 담담한 시어로 기록해 왔습니다.
그의 문학적 성취는 여러 문학상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윤동주문학상, 고산문학대상, 난설헌시문학상, 천상병귀천문학대상, 김삿갓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봉평 장날’로 고산문학대상을, ‘따뜻한 편지’로 김삿갓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이영춘 시인의 시를 읽다 보면 시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들꽃과 장날의 풍경, 계절의 변화, 평범한 사람들의 안타까운 슬픔까지 시로 옮겨온 그의 작품은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삶과 사람을 오래 바라본 시인의 눈에는 작은 풍경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 마음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가 봉평의 들판에서 오래 바라보았던 것은 풀 한 포기가 아니라, 그 곁을 지나온 사람들의 삶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