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하영 365칼럼] ‘증오’와 ‘혐오’에 대한 경종...연극 '베니스의 상인'
[주하영 평론가의 짧은 단상] - 복수와 자비, 법과 정의, 차별에 관한 셰익스피어의 16세기 고전극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극들은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인물들을 많이 품고 있다. 흔한 대명사처럼 쓰이며 보편화된 이미지로 각인된 인물들 가운데에는 ‘샤일록’이라는 유대인 고리대금업자가 있다.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보거나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빚을 갚지 못할 경우, 살 1파운드를 내놓으라고 한 차용증’과 관련된 재판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계약서에 명시된 위약금 살 1파운드를 심장 가까운 곳에서 베어내겠다고 고집하는 샤일록에게 ‘대신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꼭 1파운드의 살만 취할 것’을 판결함으로써, 샤일록이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다는 결말 또한 사람들이 대부분 알고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 판결이 재판관으로 위장을 한 여성 인물 ‘포셔’의 기지였다는 것과, 극 제목인 ‘베니스의 상인’이 샤일록이 아니라 3천 더컷을 빌린 ‘안토니오’를 지칭한다는 것, ‘희극’으로 분류된 이 작품이 학자들에 의해 손꼽히는 ‘문제작’ 중 하나로 여겨져왔다는 점은 그만큼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베니스의 기독교인들에게 ‘악마의 화신’, ‘개’, ‘악독한 유대인’으로 불리며 조롱과 모욕을 당해온 샤일록은 안토니오에게 ‘증오’를 품고, 빌린 돈의 두 배, 세 배를 갚겠다는 바사니오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 1파운드’만을 고집한다.
유대인이 기독교 아이들을 살해하고 피를 마시는 의식을 행한다는 소문과 편견, 박해가 만연했던 시대에 욕심 많고 잔혹한 ‘악역’의 전형처럼 그려진 샤일록은, 19세기 이후부터 ‘반유대주의’의 맥락에서 재해석이 필요한 인물로 많이 언급되어 왔다.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는, 1596년에서 1598년 사이에 집필된 것으로 추정되는 셰익스피어의 희극 '베니스의 상인'이 막공을 앞두고 있다.
60여 년 만에 ‘샤일록’ 역을 다시 맡은 박근형 배우와 베니스 ‘공작’ 역의 신구 배우를 필두로 오경택 연출이 각색을 맡은 연극 '베니스의 상인'은 희극성을 부각하고 ‘베네치아 카니발’을 염두에 둔 볼거리를 추가한 특징이 있다.
오경택 연출은 프로그램북에서, 희극으로 분류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질문들”이 담겨 있는 이야기임을 강조하면서, “누가 옳은가를 단정하기보다는 왜 그런 선택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들여다보는 데 집중했다”라고 피력했다.
또 “선과 악으로 단순히 구분되지 않는” 인물들을 “각자의 욕망과 모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복합적인 인간”으로 바라봤다면서, 안토니오를 좀 더 부각시키고 제시카를 다르게 해석하는 시도를 했음을 덧붙였다.
극은 단식과 속죄의 기간인 사순절을 앞두고 일탈이 허용되고 즐길 권리가 부여되던 ‘베네치아 카니발’의 하이라이트인 ‘천사의 비행(Volo dell’Angelo)’으로 시작된다.
산 마르코 광장 종탑에서 ‘천사’가 와이어를 타고 하늘을 걷듯이 광장 바닥으로 내려오는 상징적 퍼포먼스를 출발로, 가면을 쓴 배우들이 객석 통로를 지나 무대에 오르며 노래를 부르는 ‘프롤로그’의 삽입은, 베니스인들이 지나가는 샤일록을 둘러싸고 집단으로 괴롭히는 장면을 보여준다.
자신을 조롱하면서 위협을 가하는 무리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와 혼비백산해 발걸음을 옮기는 샤일록의 모습은 극이 향하는 시선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샤일록이 어떤 괴롭힘을 당해왔는지 인지하게 된 관객들이 그를 비난하기에 앞서 연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극의 마지막에 삽입된 ‘에필로그’ 역시 가면을 쓴 무리들이 등장해 ‘축제(카니발)’임을 강조하는데, 고양이 가면을 쓴 사람들은 홀로 남겨진 안토니오를 에워싸고 춤을 춘 뒤 풀어준다.
에필로그는 동성애가 엄격하게 금지되었던 르네상스 시대 베니스에서 축제 기간 동안 고양이 가면이나 여성 복장을 하고 신분을 숨긴 채 성별 규범을 무너뜨리고 동성 간의 만남을 가졌던 배경을 드러냄으로써, 안토니오의 행보가 바사니오를 향한 ‘사랑’에 기반하고 있었음을 암시하게 된다.
원작에 없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삽입은 반유대주의 논쟁을 피하고 바사니오와 안토니오, 포셔의 삼각관계를 중심에 두는 21세기 재해석 버전들을 염두에 둔 선택으로 보인다.
오경택 연출은 베니스 시민의 생명을 해하려고 한 죄로 재산을 몰수당한 샤일록이 기독교로 개종하라는 안토니오의 요구에 따라 의식을 거행하는 장면과, 이후 지팡이를 짚고 홀로 베니스를 떠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누군가의 종교마저 강요하는 법의 공정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 위함이다.
또 안토니오와 포셔가 서로 스쳐 지나가거나 포셔가 안토니오를 잠시 응시하는 짧은 장면들을 배치하고, 두 사람에게 공통으로 주어진 ‘우울하다’는 대사를 강조해, ‘바사니오’의 사랑을 두고 경쟁하는 구도를 드러낸다.
바사니오가 안토니오를 구해준 재판관에게 포셔가 절대 빼지 말것을 당부한 ‘반지’를 건네주고, 추후 포셔가 자신이 바로 변장한 재판관이었음을 고백하면서 반지를 되돌려주는 장면은, 안토니오가 바사니오의 결혼을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한다.
포셔는 반지를 남편인 바사니오에게 직접 돌려주지 않고, 먼저 안토니오에게 건넨 뒤 바사니오에게 전달하도록 하는데, 반지를 달라고 했던 재판관의 요구에 궁극적으로 응하도록 만든 사람이 다름 아닌 안토니오였기 때문이다.
아내의 당부를 떠올리며 반지를 줄 수 없다고 양해를 구하던 바사니오는 안토니오의 말 한마디에 망설임 없이 반지를 재판관(변장한 포셔)에게 건넨다.
영문학자 알렉산더 레거트는 폴져 셰익스피어의 ‘해설’에서, 포셔가 반지를 안토니오에게 전달하도록 하는 설정이 “안토니오가 자신이 배제된 결혼 관계를 공고히 하는 상징적 교환에 동참”하도록 만든다고 설명한다.
막대한 재산을 남긴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금, 은, 납으로 된 세 개의 상자 중 올바른 하나를 선택한 청혼자와의 결혼만 가능한 ‘가부장적 사회 구조’에 갇힌 포셔는, 매우 적극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는 셰익스피어의 능동적인 여성 인물로 해석되곤 한다.
청혼자들이 상자를 선택하는 장면은 많은 웃음을 낳도록 희극성을 극대화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바사니오를 본 적이 있는 포셔는 바사니오가 상자를 선택할 때 악사를 배치해 노래를 통해 힌트를 알려준다.
원작에서 운율을 통한 암시와 언어유희가 돋보이는 노래는 우리말 번역으로 드러내기에는 한계가 있기에 포셔의 하인들의 제스처와 액션으로 코믹하게 표현된 특징이 있다.
포셔가 시녀 ‘네리사’와 함께 재판관과 서기로 남장을 하는 장면도 상당히 희극적으로 연출함으로써, 당대 여성에게 부과된 사회적 제약을 ‘변장’이라는 수단을 통해 극복하고 넘어서는 포셔의 적극성과 대담함을 강조한 측면이 있다.
또 다른 여성 인물인 샤일록의 딸 ‘제시카’ 역시 창문조차 마음대로 내다보지 못하게 하는 아버지의 ‘가부장적인 횡포’에서 벗어나고자, 베니스의 기독교 신사 ‘로렌조’와 도망치는 적극적인 인물로 해석되곤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샤일록의 폭군적인 면모를 강조할 필요가 생기는데, 오경택 연출은 현대 관객이 불편하게 여길 만한 셰익스피어의 대사들을 삭제한 것으로 보인다.
대신 아버지의 돈과 보석을 챙겨서 ‘사랑’과 ‘자유’를 찾아 떠나는 맥락과 베니스를 떠난 뒤 느끼는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추가했다. 오경택 연출은 제시카가 로렌조와 함께하면서 누군가의 ‘아내’로만 불릴 뿐 자신의 이름을 잃었음을 인지하는 대사를 부여한다.
전체적으로 희극성이 강조된 오경택 연출의 '베니스의 상인'은 샤일록의 하인이었다가 바사니오의 하인이 되는 ‘랜슬럿’의 역할을 크게 확대했는데, 원작에서 바사니오의 친구 그라티아노와 결혼하게 되는 네리사의 서사는 랜슬럿과의 결혼으로 변경되었다.
웃음 속에 날카롭고 불편한 ‘진실’을 담아내는 ‘광대’ 역할의 랜슬럿은 원작보다 훨씬 부드러운 캐릭터로 전환된 특징이 있다. 현대인에게 불편함을 안겨줄 수 있는 대사와 장면들을 덜어낸 때문으로 보이는데, 객석 통로를 통해 무대에 오르는 랜슬럿은 관객과 소통하면서 거리를 좁히고 ‘유희’로서의 연극을 강조하게 된다.
이러한 유희성이 극이 품은 비극적 요소와 주제적 핵심, 사유의 기회를 줄이는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셰익스피어 극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들을 끌어당기는 효과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비평가이자 극작가인 에리크 니칸데르는 '아트 퓨즈'에 기고한 글에서,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이 다른 고전보다 더 일찍 “시대의 필터”를 거칠 필요가 요구된 작품임을 피력한다.
노골적으로 돈만 밝히면서 음모를 꾸미는 ‘악당’에서 반유대주의적 증오 속에 복수하도록 내몰린 ‘타자’이자 ‘이방인’으로 변화를 겪은 샤일록에 대한 해석은 여전히 재구성과 재해석이 요구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유대인에 대한 편견을 반영하고 있으면서도 샤일록에게 “유대인에게는 눈이 없소? 손도 오장육부도 감각도 애정도 열정도 없소?”로 시작되는 긴 명대사를 안겨주고, 기독교인들의 노예 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하도록 만든 셰익스피어의 의도 또한 꾸준히 논의되어왔다.
사실 인종과 종교라는 틀을 빼고 보면, 안토니오가 샤일록을 향해 침을 뱉고 모욕을 쏟아내는 ‘혐오’와 그런 안토니오를 향해 복수하려는 샤일록이 보이는 ‘혐오’는 크게 다르지 않다.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기반한 기독교적 사고를 대변하는 무역 상인 안토니오와, 토지 소유나 관직 진출 등 사회 여러 분야에서 배제된 유대인으로서 이자를 받는 고리대금업(금융업)에 종사하게 된 샤일록이 서로 반목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자로 이윤을 추구하는 샤일록은 물건을 저렴하게 사서 비싸게 파는 무역업 또한 자신의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지적한다. 결국 입장이 다른 각자가 서로를 향해 쏟아낸 비난과 증오의 화살은 불리한 상황에 놓인 각자를 향해 되돌아간다. 안토니오의 위기도, 샤일록의 파멸도 모두 스스로가 자신에게 부여한 ‘귀결’인 셈이다.
연극 '베니스의 상인'이 현재의 우리에게 남기는 메시지는 ‘증오’와 ‘혐오’에 대한 경종, 그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8월 9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