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 오마주 서평 ②] 갈지자로 정주행하는 법
[출판하는 동생들이, 출판하는 언니들에게] - '오늘도, 출판하는 언니들' - '메멘토' 대표 박숙희 편 - '비평연대' 김도경·서민서가 띄우는 헌사
각자도생이 당연해진 시대, 1인 출판사를 창업해 십수 년을 버텨온 30년 업력의 대표 다섯 명이 모여 '오늘도, 출판하는 언니들'(박희선·박숙희·전은정·최지영·이현화, 유유)을 펴냈습니다. 치열하게 자리를 지켜낸 '선배 언니'들을 향해, 현장의 젊은 출판인·비평가 그룹 '비평연대' 10인이 '동생'의 자리에서 헌사와 답장을 보냅니다. 책을 평가하는 서평을 넘어, 매 회 각 대표에게 두 명의 '동생'이 마음을 전하는 특별 기획 '오마주 서평'을 총 5회에 걸쳐 게재합니다. [편집자주]
■ 고개를 마구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김도경(공명 편집자·비평연대)
좋아하는 것은 양손의 손가락을 다 접어도 모자랄 만큼 많았지만 그렇다고 그것들을 사랑하냐고 묻는다면 늘 그렇지는 않았다. 그러니 어려서부터 하고 싶은 일, 되고 싶은 것을 찾는 일에서는 여간 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내 눈에 ‘무엇인가가 된 사람들’이란 결국 품 안에 저마다의 열정을 한 줌씩은 움켜쥔 모습이었고, 그에 비해 나는 무언가가 되기에는 언제나 조금 애매한 것 같다는 열패감을 떨쳐낼 수가 없었으니까. 결국 인생에서 적당히 싫어하는 것과 적당히 좋아하는 것을 무진 솎아낸 끝에 ‘책’과 ‘출판’이라는 단어가 남았다. 그렇게 어찌어찌 출판인이 됐지만 그걸로 그 오랜 방황에 곧장 마침표를 찍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편집자로 일하기 시작하며 이 일이 어떤 일인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더욱 명징하게 알아가고 있는 지금, 어쩌면 사춘기 시절보다 더한 방황의 한복판을 걷고 있는 것만 같다.
무언가를 한다면 꼭 잘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떤 것을 잘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애정이 필요했고 책의 장르마다, 업무마다 그 애정에는 분명한 편차가 존재했다. 아직은 시작하는 단계이니 방황이 불가피한 시점이 아닌가 싶다가도, 만일 이렇게 여기저기 부딪히고 망설이고 멈추는 일이 없이 처음부터 한 방향으로만 올곧게 갔더라면 지금보다 더 확실한 사람이, 잘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을 거란 생각에 조바심이 드는 게 더 큰 요즘이었다. 그런 시기에 박숙희 저자의 '갈지자로 정주행하는 법'을 만났다. 그리고 이 글은 내게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온, 그 어떤 말보다 확실한 응원 같았다.
박숙희 저자는 말한다. 20대 내내 어떤 장르의 책이 맞는지, 어떤 편집자가 되고 싶은지를 정의 내리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고 그 시간 동안 직진하지 못하고 줄곧 갈지자로 걸었다고. 그건 꼭 지금의 나를 관통하는 듯한 문장 같아서 고개를 마구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 자 한 자 따라서 굴러가 본 “모난 돌”의 여정은 갈지자의 걸음과 돌아서 가기, 멈춰 서기의 내력을 낱낱이 보여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그토록 “편파적”이라던 박숙희 대표의 출판 편력기는 방황이라기보단 엄청나게 멋진 모험기처럼 보였다. 내게는 너무나 익숙했고 그래서 더 부끄럽고 불안했던 단어들이 되레 위안이 되어 돌아오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어떤 방식이어도 괜찮으니 계속 걷기만 한다면 결국 그 길목에서 전보다 조금쯤 덜 헤매는 법을 찾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확신을 준다. 그러니 일단은 그처럼 의심 없이 걸어봐도 될 것 같다. 똑같이 걸어도 구불구불하게 걸었다면, 어쩌면 더 먼 곳에 도착한 것이나 다름없을 테니까.
■ 이런 선배와 갈지자로, 춤추듯이 걷고 싶다/서민서(지음미디어 편집부·비평연대)
‘출판이라는 일은 평생 쉬워질 수 없겠구나.’ 새내기 출판인으로서의 소회다. 책을 낼 때마다 새롭고,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 가상의 독자를 끊임없이 상상하고, 때론 그 허구의 독자가 남긴 날카로운 독자평에 지레 ‘마상’을 입기도 한다. 종이 한 묶음을 부여잡고 울고 웃는 나날이다. 내가 만약 한 3년쯤 뒤에 “아, 이제 좀 알겠다! 이렇게 일하면 껌이겠네!”라고 으스대면 누군가 머리통을 후려쳐줄 정도의 인복이 있기를. 그건 분명 고장 난 나침반처럼 떨리지 않는 상태일 테니 말이다.
편집자는 평생 오들오들 떨며 책을 낼 팔자다. 애 둘 셋 낳아봤어도 출산 전 모든 산모가 두려움에 사로잡히듯이, 그리고 그 옆의 산파도 산고를 함께하듯이. 작가 인생의 한 조각을 떼어내 책이라는 그릇에 담아 세상에 내보이는 일인데 떨리지 않을 리 없다. 그래서인지 자신감 넘치는 선배 출판인보다 “나도 아직 잘 모르겠어. 계속 배워야지”라고 말하는 선배들에게 머리를 조아리게 된다. “저도요, 저도요! 이 막막하고 불확실한 책의 바다에서 어떻게 일을 계속할 수 있으셨나요?”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싶다.
메멘토 박숙희 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겐 각자의 ‘필살기’가 있다고. 내는 족족 베스트셀러를 만들 순 없지만 실패를 줄일 순 있다고. 끊임없이 새롭게 밀려오는 트렌드의 파도 속에서 어떤 파도는 훌쩍 올라타 노련하게 서핑하고, 어떤 파도는 미끄러져 넘어가며 항해를 계속해 왔을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중심을 잃지 않되, 책과 책 사이에 맥락을 세우고 불필요한 곁가지를 덜어 내며 ‘코어’ 목록을 다지기. 그러면서 독자와 이어지는 고리를 단단하게 만들기.”
메멘토는 중쇄 비중이 70%가 넘는다. 작지만 단단한 배. 메멘토가 14년이란 긴 시간을 버틴 비법이다. 일렁이는 바다에서 한길로만 갈 수는 없다. 갈지자로 가더라도 계속 나아가기만 한다면 된다. 그럼 우리는 어디에든 가닿게 된다. 이에 더해 박숙희 대표는 출판이라는 망망대해에 섬처럼 떠 있는 출판인들에게 다리를 놓자고 제안한다. 이 막막함을 덜어줄 것은 동료와의 연대, 그리고 낭만뿐이니까. 이런 선배와 갈지자로, 춤추듯이 걷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