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평 - 새로운 서평] 바다는 그대로인데 外
[비평연대] 유희선·맹준혁·김미향의 500자 서평
젊은 문화비평가와 출판전문가들의 커뮤니티인 '비평연대'에서는 숏폼 콘텐츠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500자 내외의 '매우 짧은 연대 서평'의 형식을 고안했습니다. 2030세대 지식인 특유의 빛나는 감각으로 제시되는 다양한 책들을 통해 지식의 최전선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편집자주]
■ 바다는 그대로인데 (박서녕 지음, 위즈덤하우스, 2026)
지긋지긋했던 장소가 한 사람으로 인해 아름답게 바뀌어 보인 적이 있는지. ‘바다는 그대로인데’는 그 경험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 소녀(혹은 소년)는 이사 온 바닷가 마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요란한 소리, 짠 내음, 까슬한 모래까지. 어느 날 듬성듬성 바위가 깔린 바닷가에서 주인공은 파도처럼 제멋대로인, 바다 냄새가 나는 아이를 만난다.
이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장면에 부연이 없다. 간결한 독백 위아래로 번지는 한낮의 물그림자며 절벽, 나뭇잎 틈 햇살과 해 질 녘의 바다로 더할 나위 없이 충분하고 충만하다. 수채화 풍경 속에서 아이들이 서로에게 물드는 과정은 독자의 눈에도 투명하게 비친다. 이제 주인공에게 바다는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바다는 그대로인데’... 신발을 털어도 남아 있는 모래처럼 책장을 덮어도 제목을 곱씹게 된다. 추억은 한 장소의 채도와 명도를 바꾼다.
환한 여운에 잠겨 저자의 전작을 사러 온라인 서점에 ‘박서녕’을 검색해 보았는데 놀랍게도 이 작품이 그의 데뷔작이었다. 2026년이 아직 넉 달 남아 있지만 ‘바다는 그대로인데’는 올해 내가 만난 가장 훌륭한 그림책이리라 자신한다. 지난주에 첫 작품을 출간한 작가의 팬이 이제 막 된 나로서는 박서녕 선생님의 두 번째 그림책을 하염없이 기다릴 일만 남았다.(유희선 / 출판마케터·비평연대)
■ 왕의 심리학 (한민 지음, 시크릿하우스, 2026)
역사를 들여다보면 문득 왕도 결국 누군가의 부모이자 자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 책은 당쟁과 정치 논리로만 소비되던 영조, 사도세자, 정조의 이야기를 ‘가족의 심리’라는 렌즈로 다시 비춰주는 책이다.
사실 책의 내용만큼 눈길을 끄는 것은 저자의 이력이다. ‘멸종위기 1급 토종 문화심리학자’라는 점도 인상적이고, 역사를 좋아하는 심리학자가 성격과 관계로 조선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3대의 부자(父子) 관계를 파헤쳤다는 점도 흥미롭다.
출생의 콤플렉스를 극복하려 편집증적 통제에 매달린 영조, 아버지의 지나친 기대에 짓눌려 끝내 마음이 무너진 사도세자, 그리고 그 비극을 목격하고도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옭아매는 완벽주의자가 되어야 했던 정조. 책을 읽다 보면 임오화변이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소통하지 못한 한 가족의 가슴 아픈 실패로 다가온다.
이번 책은 영조, 사도세자, 정조 편이다. 저자가 들려줄 다음 왕들의 심리 분석도 기대된다.(맹준혁 / 출판편집자·콘텐츠기획자)
■ 일본 요괴 도감 101 (잭 데이비슨 지음, 강은정 옮김, 최준란 감수, 공명, 2026)
'일본 요괴 도감 101'은 갓파, 텐구처럼 익숙한 요괴부터 쓰노한조라는 세면대 요괴, 사람을 공격하는 이불 보로보로톤, 열매에 사람 얼굴이 나타나는 나무 진멘주까지 기묘한 존재 101종을 소개한다. 일본 민속을 연구해온 잭 데이비슨은 각각의 생김새와 능력,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려주는 한편, 사람들이 왜 이런 존재를 상상했는지 흥미롭게 설명한다.
동물이나 물건이 변신한 요괴, 자연현상에서 태어난 괴물, 죽은 뒤에도 이 세상을 떠나지 못한 유령 등 요괴를 성격에 따라 나누어 이해하기 쉽다. 일본 에도 시대 우키요에의 전설 호쿠사이와 구니요시의 옛 목판화부터 현대 작가의 그림까지 250여 점의 시각 자료도 풍성하다.
'이누야샤', '나루토',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다면 익숙한 캐릭터들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찾아보는 재미가 크다. 일본 요괴를 처음 만나는 독자에게는 친절한 안내서이고, 창작자에게는 새로운 이야기와 캐릭터를 떠올리게 하는 아이디어 도감이다. 일본통인 한국외국어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최준란 교수가 감수를 맡아 국내 독자들이 일본의 요괴 문화와 콘텐츠적 의미를 이해하도록 도와 신뢰를 높였다.(김미향 / 출판평론가·에세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