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 시인의 좋은 시 365] 안희연 시인 ‘야광운’
시는 인간 마음속 심상(心像)에서 피어나는 혼불과도 같습니다. 깊은 사유의 내면에서 길어 올린, 짧지만 응축된 언어문학의 보석과도 같은 시의 세계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좋은 시와 함께 조용하지만 반짝이는 하루를 보내시길 바랍니다.
야광운 / 안희연
여름아, 반찬이 쉽게 상하는 계절이 되었어
이런 계절이 되어서야
겨우 답장을 한다
종이와 펜은 넘쳐나는데 마음이 도착 하지 않아서
겨우의 자리에 많은 것들을 고이게 만들었어
겨우의 자리는 어떤 곳일까
모든 것엔 제 자리가 있고 그건 결코 슬픈 일이 아니지만
어쩐지 겨우는 영원토록 제자리만 맴돌 것 같고
겨우, 기껏, 고작, 간신히, 가까스로……
내가 사랑하는 부사들을 연달아 적으며
그것들의 겨움을 또한 생각한다
여름아, 왜 어둠을 말할 땐 내린다거나 깔린다는 표현을 쓸까
어제는 야광운을 찍은 사진을 봤어
야광운의 생성 조건은 운석이 부서진 가루와 초저온이래
부서짐과 추위의 결과로 우리가 마주 하게 된 것
그것들을 아무 죄의식 없이 아름답다고 말해도 되는 순간이 올까
상한 반찬을 버리면 깨끗한 식탁을 가질 수 있을까
방은 거울로, 거울은 겨울로 이어진다
여름 한낮에도 수시로 길을 잃는 이유
거대한 바위 아래 깔려 있는 기분
절대로, 도무지, 결단코, 기어이, 마침내, 결국……
그런 말들은 다독여 재우고
여름아, 이제 나는 먼 것을 멀리 두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
내가 나인 것을 인정하는 사람으로
- '당근밭 걷기' (문학동네, 2024)
안희연 시인은 "슬픔을 가장 따뜻한 언어로 번역하는 시인"입니다. 2012년 창비 신인시인상으로 등단한 이후 첫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로 신동엽문학상을 받으며 한국 문단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후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당근밭 걷기’를 펴내며 자신만의 시 세계를 꾸준히 확장해 왔습니다. 현재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창작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의 시를 처음 읽으면 문장이 예뻐서 먼저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그러나 오래도록 곁에 남는 것은 상처를 바라보는 태도입니다. 그의 시는 우리 마음속 깊이 숨어 있는 외로움과 상처를 조용히 응시합니다. 슬픔을 애써 지우거나 극복하려 하기보다, 그 곁에 함께 머물며 상처 또한 삶의 일부임을 다정하고 섬세한 언어로 들려줍니다. 그래서 그의 시를 읽고 나면 위로를 받았다기보다, 누군가 내 마음을 먼저 이해해 준 것 같은 따뜻한 여운이 남습니다.
난다의 시금치당 시(詩)파티에서 만난 안희연 시인의 대담 또한 그의 시처럼 부드럽고 다정했습니다. 차분한 말투와 진심 어린 답변은 독자들이 그의 이야기에 끝까지 귀 기울이게 했고, 듣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감싸주었습니다. 앞으로도 안희연 시인이 들려줄 새로운 시와 이야기가 많은 독자들의 마음에 오래 머물기를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