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평 - 새로운 서평] 300개의 단상 · 한국이 싫어서 外
[비평연대] 공혜리·이솔림·김수연·배희주·김상화의 500자 서평
젊은 문화비평가와 출판전문가들의 커뮤니티인 '비평연대'에서는 숏폼 콘텐츠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500자 내외의 '매우 짧은 연대 서평'의 형식을 고안했습니다. 2030세대 지식인 특유의 빛나는 감각으로 제시되는 다양한 책들을 통해 지식의 최전선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편집자주]
■ 300개의 단상(세라 망구소 지음, 서제인 옮김, 필로우, 2022)
바야흐로 숏폼의 시대다. 10년 전, 지금의 숏폼을 닮은 ‘숏‘ 텍스트가 있었으니 바로 세라 망구소의 '300개의 단상'이다. 책 전체가 300개의 단편적 구절로 이루어져 있어 끝까지 읽지 않아도, 뒤죽박죽 읽어도 상관없다. 그래서 책을 읽는 데에 부담이 없다. 길이도 짧고, 직설적으로 쓰여 있는 덕에 부담 없이 언제든 덮을 수 있고 언제든 펼 수 있다.
작가는 여성, 학생, 중년의 사회가 부여한 모습을 경쾌하게 깨부순다. 그리고 당당하게 ‘그냥‘ 세라 망구소로 살아가고 있음을 말한다.
책 속에 모여있는 글은 작가가 여러 생각 중 고르고 고른 이야기일 것이다. 책을 펼치면 릴스를 넘겨보듯 무작위로 나오는 작가의 흥미거리를 골라보는 재미가 있다. 다만, 이 책에는 숏폼에는 없는 빈 공간이 있다. 작가는 말한다.
“빈 공간은 최소한 지금까지 무언가가 이야기되었다는 것, 무언가가 마무리되었다는 것, 내가 잠깐 멈춰서 지금까지 읽는 걸 소화하고 평가해도 좋다는 걸 알려준다.”
숏텍스트처럼, 숏폼 시대에도 빈 공간이 생긴다면 어떨지 생각해 볼 일이다.(공혜리 / 비평연대)
■ 만들어진 뿌리 (소피 베시 지음, 주명철 옮김, 여문책, 2026)
어떤 개념은 너무 빠르게 일상에 스며들어 마치 오래된 진실처럼 받아들여진다. ‘유대-기독교’라는 표현도 그렇다. 역사학자이자 ‘지중해의 양심’이라 불리는 소피 베시는 바로 그 익숙함을 의심한다. 오늘날 정치와 언론에서 흔히 쓰이는 이 표현이 언제, 어떤 맥락에서, 누구를 배제하며 오늘의 의미를 갖게 되었는지 추적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가 새로운 정체성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유대-기독교'라는 개념은 힘을 얻었다. 기독교적 반유대주의의 긴 역사는 충분히 성찰되지 못한 채 급히 봉합되었고, 공공연한 '타자'였던 유대인은 문명의 기원으로 편입되었다. 그와 함께 서구는 새로운 경계선을 그었고, 저자는 그 과정이 이슬람을 문명 밖으로 밀어내는 새로운 배제 체계를 낳았다고 말한다.
‘유대-기독교’라는 개념은 많은 사람에게 편리했다. 서구 정치인도, 극우 세력도, 이스라엘 권력도 저마다의 목적에 맞게 이 언어를 꺼내 들었다. 저자는 은폐, 병합, 축출, 배제와 같은 정확한 언어로 해석을 밀고 나간다.
“필요할 때마다 역사는 왜곡되었다”라는 저자의 말처럼, 역사는 지나간 사실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끊임없이 다시 쓰인다. 정체성과 문명의 이름으로 배제와 폭력이 정당화되는 지금, 소피 베시의 해부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향한다.(이솔림 / 출판편집자·비평연대)
■ 한국이 싫어서 (장강명 지음, 민음사, 2015)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 말이 이제는 질린다. 안다. 그래봤자 지구의 어느 땅이라는 것을. 하지만 지금 밟고 있는 곳이 나와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때, 낙원이 정말 중요할까.
'한국이 싫어서'는 평범한 한국인 여성 ‘계나’가 한국을 떠나 호주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다. 계나는 금융권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가난한 집과 성향이 한국과 맞지 않는다며 호주로 떠난다. 하지만 호주에는 한국보다 더 한 일들이 기다린다. 커튼으로 나눈 방 아닌 방, 반복되는 이사, 어느 한 군데에 정착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른다. 그럼에도 계나는 호주에서의 삶을 좋아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이 모든 게 계나의 선택으로 다져진 삶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가진 게 없어도 행복해질 수 있어. 하지만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행복해질 순 없어. 나는 두려워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남자 친구에게 계나는 이렇게 말한다. 계나는 주어진 것에 순응하기보다 어떻게 살 것인지 선택했다. 이민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선택이 영향을 미친 삶의 무게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장강명의 글을 읽고 있으면 이민이 더욱 어렵다는 것이 체감된다. 그럼에도 독자 눈에 계나가 편안해 보이는 것은, 자신이 선택한 삶을 마음껏 살아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누군가는 이 책을 읽고 자신의 길이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릴 것이다. 도망친 곳이 낙원일 필요까지는 없다. 전보다 낫기만 하다면.(김수연 / 출판마케터·비평연대)
■ 휴식 찾기의 기쁨 (유보라 지음, 북스톤, 2025)
몸이 한계에 다다랐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꿈에서 해결해야 할 일들이 계속 나타나거나, 평소보다 외부의 반응과 사람들의 말에 유독 예민해질 때. 그야말로 숨이 벅찬 순간들이다. 당장 내일 출근해야 하는 일요일 밤, 이번 주말에 뭘 했는지 되돌아보면 희미하게 기억이 나지 않을 때가 있다. 시간의 밀도가 낮으면 기억마저 흐려진다는 걸 몰랐다.
우리는 늘 효율적으로 성장하고 빨리 나아가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살아간다. 잠시도 쉬지 못한 채 인정받기 위해 쉼 없이 달린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스스로에게 더 좋은 시간을 내주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휴식 찾기의 기쁨'은 셀프케어 플랫폼 '라이프컬러링'의 유보라 대표가 나만의 방식으로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법을 담은 책이다. 거창한 휴식이 아니라 주말 아침에 느긋하게 차를 한 잔 마시거나 좋아하는 음악 한 곡을 온전히 듣는 일처럼 일상 속 작은 쉼을 권한다.
“휴식에도 제철이 있다면 그건 바로 오늘, 지금일 거예요. 오늘의 휴식을 내일로 미루면, 일상은 금방 상해버리니까요.”
뉴스레터 '제철휴식'의 소개 문구처럼 나를 위해 매일 잠깐의 숨 쉴 틈을 만들어주는 건 어떨까? 나에게 작은 성취감을 주는 일들, 힘이 되는 일들, 쉽게 기분 전환이 되는 일들은 무엇일까. 내 목소리를 듣기 위해 주파수를 세밀하게 맞추고 중심을 찾아가는 시간. 당신의 삶에서 스스로를 돌보는 시간은 얼마나 자리하고 있는가.(배희주 / 출판 마케터·비평연대)
■ 어떤 여행을 하고 싶니? (믹 잭슨 지음, 존 브로들리 그림, 김지은 옮김, 봄볕, 2024)
잠들기 전, 침대맡에서 아이에게 읽어 주기 좋은 여행 그림책. 여행을 단순히 '타지로 놀러 가는 일'이 아닌, '한 생명의 삶'에 비유해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구 위의 온 생명이 꾸려 가는 저마다의 여행길이 얼마나 총천연색으로 다양한지 선 굵은 판화체 그림으로 시원시원하게 보여준다.
"움직인다는 건 작은 탐험이야. 넌 지금껏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곳으로 가고 있는 거야."
말 거는 화자의 목소리를 따라 한 장씩 책장을 넘기다 보면 독자는 뜨거운 열기구 속을, 해안가 투어버스 속을, 두더지가 굴을 파는 땅속을, 터널을 막 벗어난 기차 속을, 꽁꽁 언 호수 위를 걷게 된다. 겨울이면 한 해의 긴 여행을 마치고 동면하는 겨울잠 동물들과 꽃과 꽃 사이를 매일같이 왱왱 날아다니는 꿀벌 등 우리 주변 동생물의 각기 다른 여행 방식도 꼼꼼히 알린다. 오크통을 타고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뛰어내려 살아남은 최초의 여성 애니 에디슨 테일러와 세계 최초로 무동력 글라이더를 만든 독일 기술자 오토 릴리엔탈의 이야기도 스치듯 언급한다.
화자는 온갖 존재들의 다양한 여행길을 보여준 후 이윽고 독자에게 묻는다. "넌 어떤 여행을 하고 싶니?" 그리고 덧붙인다. 꾸준히 탐험하는 것만이 여행이 아닌, "가끔 가만히 서서 세상이 흘러가는 걸 지켜봐도 좋"다고. 어떤 여행은 아예 떠나지 않는 게 더 행복할 수도 있다고 말이다. 휴가철이 도래한 요즘. 여행 전날 밤 아이와 함께 읽으며 여행의 의미에 대해 수다를 떨어 봐도 좋겠다. 물론 여행 계획이 없어도 괜찮다. 깊은 밤, 그림책으로 시작하는 책수다는 아이에게도 양육자에게도 그 자체로 작은 여행이 되어 줄 테니.(김상화 / 출판편집자·비평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