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 시인의 좋은 시 365] 문정희 시인의 ‘분홍 스토리’
시는 인간 마음속 심상(心像)에서 피어나는 혼불과도 같습니다. 깊은 사유의 내면에서 길어 올린, 짧지만 응축된 언어문학의 보석과도 같은 시의 세계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좋은 시와 함께 조용하지만 반짝이는 하루를 보내시길 바랍니다.
분홍 스토리 / 문정희
상점 여주인이 불쑥 곁으로 다가왔다
투먼역* 앞 문방구점
북한 아이가 쓰던 헌 물감 12색
그중 유독 폭 파인 분홍색을 보고 있을 때
추억 사진관에 걸린 누나의 옷고름을
소월 시인의 진달래꽃을 떠올리고 있을 때
관두라요!
갑자기 상점 여주인이
매의 발톱처럼 물감을 채 갔다
곁에 있던 청년이 웃으며 말했다
아시죠? 영변에는 진달래보다
핵이 피었다네요
바로 다리 건너 저쪽
이 나라 시인으로 시를 쓸 때마다
늘 뭔가 빠진 강박관념
이렇게 써도 온전치 않고
저렇게 써도 죄책감 같은 흥정 같은
노스(North)! 내 모국어의 절망과 희망
북한과 중국 국경 사이
유독 분홍색만 다 닳은 물감을 만지며
내 안의 녹슨 순정이
무어라 말을 잇지 못해 버벅이고 있을 때
투먼역 앞 어느 문방구점에서
내 손에서 분홍을 뺏어 가고 있을 때
*북한과 중국 국경 사이의 지명.
- ‘늑대처럼 싱싱하게 울고 싶었다’ (민음사, 2026)
6·25전쟁 76주년에 읽는 문정희 시인의 ‘분홍 스토리’는 건너지 못한 땅과 ‘영변 약산의 진달래꽃’이 더 이상 꽃이 아닌 핵으로 존재하는 현실을 담아낸 시입니다. 분단이 남긴 깊은 상처와 그리움을 통해 모국어로조차 다 담아낼 수 없는 분단국가 시인의 비애를 섬세하게 보여줍니다. 이처럼 문정희 시인의 시는 시대와 개인의 상처를 함께 품으며 삶의 균열을 정면으로 마주해 왔습니다. 이러한 시적 태도는 그의 시 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힘이기도 합니다.
문정희 시인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뜨거워지는 시인입니다. 많은 시인이 원숙함 속으로 스며들 때에도 그는 여전히 사랑을 노래하고 세상을 향해 질문을 던집니다. 1969년 등단 이후 반세기 넘게 사랑과 욕망, 여성의 몸, 자유와 존재의 문제를 깊이 들여다봐 온 그는 단순한 위로보다 상처와 고독의 한가운데를 통과하며 인간이 끝내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묻습니다. 그래서 그의 시는 강렬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남깁니다.
올해 출간한 열일곱 번째 시집 ‘늑대처럼 싱싱하게 울고 싶었다’는 이러한 그의 현재를 압축한 작품입니다. 시인은 “광활한 폐허에 이르렀다”고 말하며 상처와 환멸, 시간의 무게를 바라봅니다. 그러나 그 폐허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자리입니다. 늑대의 울음처럼 거칠고 솔직한 목소리로 삶을 다시 긍정합니다.
여고 시절 첫 시집을 펴낸 뒤 57년 동안 시를 써 온 그는 최근 문학전문 블로그 모임 ‘고급놀이’가 마련한 북토크에서 “자신만의 언어로 삶을 꾸려온 것에 감사하다”고 말해 큰 박수와 공감을 받았습니다.
자유롭고 싱싱하게 울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문정희 시인의 시 세계를 천천히 따라가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그 안에서 삶의 상처마저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으로 바뀌는 순간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