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 시인의 좋은 시 365] 이홍섭 시인의 ‘터미널 1’
시는 인간 마음속 심상(心像)에서 피어나는 혼불과도 같습니다. 깊은 사유의 내면에서 길어 올린, 짧지만 응축된 언어문학의 보석과도 같은 시의 세계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좋은 시와 함께 조용하지만 반짝이는 하루를 보내시길 바랍니다.
터미널 1 / 이홍섭
젊은 아버지는
어린 자식을 버스 앞에 세워놓고는 어디론가 사라지시곤 했다
강원도 하고도 벽지로 가는 버스는 하루 한 번뿐인데
아버지는 늘 버스가 시동을 걸 때쯤 나타나시곤 했다
늙으신 아버지를 모시고
서울대 병원으로 검진 받으러 가는 길
버스 앞에 아버지를 세워놓고는
어디가시지 말라고, 꼭 이 자리에 서 계시라고 당부한다
커피 한 잔 마시고, 담배 한 대 피우고
벌써 버스에 오르셨겠지 하고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그 자리에 꼭 서 계신다
어느새 이 짐승 같은 터미널에서
아버지가 가장 어리셨다
-'터미널' (문학동네, 2011)
이홍섭 시인은 강릉의 바다와 산,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시로 기록해 온 시인입니다. 1965년 강릉에서 태어나 1990년 ‘현대시세계’ 신인상을 통해 등단했으며, 이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도 당선되며 시인과 평론가의 길을 함께 걸어왔습니다
하지만 그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화려한 이력보다도 그의 시가 지닌 따뜻한 시선입니다. 이홍섭 시인의 시에는 늘 사람이 있습니다. 고향 강릉의 바다와 산, 골목길과 시장, 터미널에서 가족과 이웃이 그의 시 속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그래서 그의 시를 읽다 보면 마치 강릉의 어느 오래된 길을 천천히 걷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특별한 사건이 없어도 좋습니다. 평범한 하루, 낡은 풍경, 나이 들어가는 부모의 모습에서도 그는 삶의 깊은 의미를 발견해 냅니다.
이홍섭 시인의 시를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불교적 사유입니다. 무산 조오현 스님의 유발상좌를 지낸 그는 삶의 덧없음과 인간 존재의 한계를 직시하면서도 허무에 머물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연민과 이해, 그리고 화해의 가능성을 노래합니다. 그의 시가 독자들에게 오래도록 따뜻한 여운을 남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대표 시집으로는 ‘강릉, 프라하, 함흥’, ‘숨결’, ‘가도 가도 서쪽인 당신’, ‘터미널’, ‘검은 돌을 삼키다’, ‘네루다의 종소리’ 등이 있습니다. 특히 첫 시집 ‘강릉, 프라하, 함흥’은 고향과 역사, 기억을 교차시키며 주목받았고, ‘터미널’은 떠남과 귀향, 삶의 경계를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홍섭 시인의 시는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도 인간다운 삶의 가치를 잃지 않으려는 노력의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작품에는 자연과 사람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살아 있으며, 독자들에게 잠시 걸음을 늦추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조용한 위로와 깊은 성찰이 필요한 순간, 이홍섭 시인의 시는 오래도록 마음 곁에 머무는 한 편의 풍경이 되어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