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 시인의 좋은 시 365] 허수경 시인의 ‘포도주 한 병’
시는 인간 마음속 심상(心像)에서 피어나는 혼불과도 같습니다. 깊은 사유의 내면에서 길어 올린, 짧지만 응축된 언어문학의 보석과도 같은 시의 세계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좋은 시와 함께 조용하지만 반짝이는 하루를 보내시길 바랍니다.
포도주 한 병 / 허수경
아마도 그 병 안에 우는 사람이 들어 있었는지
우는 얼굴을 안아주던 손이 붉은 저녁을 따른다
너는 아주 돌아올 듯 망설이며
우는 자의 등을 방문했다가 막 떠났는데
낡은 외투를 그의 등에 슬쩍 올려주며 막 떠났는데
그때 그는 네가 다녀간 걸 눈치챘을까?
그랬을 거야,
저렇게 툭툭, 털고 다시 가잖아
오므려진 손금처럼 어스름하고 가냘픈 길
그 길, 부셔서 마침내 사윌 때까지 보고 있어야겠네
이제 붉은 물은 내 손금 속에서
해, 달, 바람의 뒤안이 되어 흐르겠다
- '만일 그대가 나보다 먼저 간다면' (난다, 2026)
허수경 시인(1964~2018)은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뒤 1987년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하였습니다. 1992년 독일로 건너가 뮌스터대학교에서 고대근동고고학을 연구하며 박사학위를 받았고, 머나먼 이국의 땅에서도 끝내 모국어를 놓지 않은 채 시를 써 내려갔습니다.
그의 시는 개인의 외로움에 머물지 않고 사라진 문명과 역사 속 인간의 흔적을 탐구하였으며, 고고학자의 시선과 시인의 감수성을 결합하여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하였습니다. 독일에서의 긴 생활은 그의 시에 깊은 이방인의 감각을 더해 주었고, 고향과 집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작품 곳곳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대표 시집으로는 ‘슬플 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혼자 가는 먼 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등이 있으며, 동서문학상·전숙희문학상·이육사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허수경 시인의 8주기를 맞아 난다 출판사 김민정 대표의 편집으로 유고 시집 ‘만일 그대가 나보다 먼저 간다면’이 출간되었습니다. 지난 6월 9일 그의 생일에 맞추어 나온 이 시집을 기념하여 후배 시인들과 독자들은 혜화동에 모여 시를 필사하고 낭독하며 그의 삶과 문학을 조용히 되새겼습니다.
시인은 이제 우리 곁에 없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오늘도 살아 있습니다. 먼 타국에서 모국어로 써 내려간 그의 문장은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따뜻한 울림을 남기며, 서로를 향한 연대감을 일깨워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