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하영 365칼럼] 타인을 향한 ‘선함’이 나에게로 돌아오는 이야기...뮤지컬 'ROGER'(라져)
[주하영 평론가의 짧은 단상] - 2025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신작 선정작 - 항공 및 해상 '관제' 소재 창작뮤지컬
심층 문화 비평 칼럼 <앨리스 박사의 문화로 보는 세상풍경>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주하영 칼럼니스트가 또 하나의 새 칼럼 <주하영 평론가의 짧은 단상>을 선보입니다. 짧은 형식 속에 담긴 자유롭고 날카로운 문화적 통찰을 기대해 주세요. [편집자주]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 위로는 때로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오곤 한다. 낯선 이가 건넨 따뜻한 한마디에 마음을 채우던 복잡한 감정이 내려앉고 녹아내리는 경험을 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타인을 향한 공감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이해한다.
두 명의 의학자 앤서니 마자렐리와 스티븐 트리지악이 쓴 책 '삶이 고통일 땐 타인을 사랑하는 게 좋다'에 따르면, 힘든 일을 겪을 때 다정한 위로가 기분을 나아지게 만드는 것은 “진심 어린 위안이 실제로 진통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서로의 고통을 ‘뇌’로 느낄 수 있으며, 뇌는 “타인의 힘듦이나 고통 앞에서 그 모습을 도와야 할 기회”로 인식한다. “따뜻한 위로는 양방향으로 작용”하는데, 타인에게로 흘러간 위로는 의식하지 못하는 새에 자동으로 되돌아오고, 타인과 나 자신 모두에게 유의미한 도움을 주게 된다.
‘관제탑’과 ‘등대’라는 다른 공간에 있는 두 인물이 무전을 통해 우연히 연결되며 서로에게 ‘위로’를 건네는 이야기인 뮤지컬 '라져(Roger)'가 막공을 앞두고 있다.
‘2025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신작 선정작’인 뮤지컬 '라져'는 활주로가 내려다보이는 공항의 높은 관제탑에서 주파수로 소통하며 항공기의 움직임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관제사’라는 직업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김정민 작가는 프로그램북 ‘인사말’에서, “보이지 않는 주파수처럼 공항을 오가는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지만, 기꺼이 모두의 길잡이가 되어주는 관제사의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다”라고 설명한다.
비대면으로 이루어지는 ‘관제’의 특성상 근무 시간 내내 목소리에만 집중하는 인물의 대척점에는, 하늘이 아닌 바다를 관제하는 ‘등대’와의 무전 교신이라는 작곡가 성찬경의 아이디어가 더해졌다.
우연히 맞춰진 주파수를 통해 두 사람이 목소리를 나누게 되고, 매일 밤 같은 주파수 안에서 ‘관제 수업’으로 만나는 가운데 서로를 알아가는 이야기는 ‘상실’과 ‘상처’를 딛고 함께 ‘성장’하는 주제로 완성되었다.
1분에 한 대씩 비행기가 이착륙하는 뉴욕 JFK 공항에서 15년간 근무해 온 관제사 ‘스카일러’는 하루 20대의 비행기가 운행하는, 바다에 인접한 마이애미 지역 델레이 공항으로 전근을 온다.
그는 관제사 한 명이 홀로 관제실을 담당하는 델레이 공항의 한적함에 당황한다. 마지막 편 항공기 운항 관제를 마친 스카일러는 새벽 4시까지 관제할 비행기도 없이 혼자 머문다는 사실을 어색해한다. 관제실에 10명이 넘게 근무하는 JFK 공항에서 일에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살아온 스카일러에게는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스카일러는 한 달 뒤에 있을 재판을 위해 아직 공개되지 않은 블랙박스 음성을 분석하기로 한다. 조종사의 ‘메이데이’에 응답하는 관제사의 마지막 말이 무슨 뜻인지 해독할 수 없어 답답해하는 스카일러는 변호사로부터 21년 전 사고 이후 사라진 항공관제사가 마지막으로 휴가를 간 곳이 ‘올드비’라는 내용의 전화를 받는다.
인터넷으로도 검색되지 않는 올드비가 실재하는 곳인지 의심하는 순간, 무전기에서 누군가가 갑자기 적합하지 않은 용어로 해상 관제를 시작한다. 무선국을 구분하는 식별 부호인 ‘콜사인(Call sign)’을 밝혀야 한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자신이 오가르라는 휴양도시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불법 관제로 해양경찰에 신고하겠다면서 오가르가 어디인지 검색하던 스카일러는 올드비가 바하마 지역 오가르와 인접한 곳임을 알게 된다. 항공관제를 하면서도 비행기를 타지 못하는 스카일러는 배편을 알아보지만, 허리케인 시즌이라 바하마로는 배가 운항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한편, 관광객이 없어 소멸을 향해가고 있는 섬 오가르에 리조트를 세우고 싶어 하는 스물다섯 살의 청년 ‘디디’는, 배로 섬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상 관제를 한 일에 불같이 화를 내는 ‘주파수 속 목소리’에 오히려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다음날 같은 주파수로 연결을 시도한 디디는 스카일러에게 ‘관제 수업’을 해달라고 부탁한다. 단번에 거절한 스카일러는 디디에게 올드비라는 지역에 관해 묻고, 눈치가 빠른 디디는 자신에게 관제를 가르쳐 주면, 스카일러를 돕겠다고 제안한다.
매일 밤 지정된 주파수에서 만나 관제에 사용되는 ‘포네틱 코드(Phonetic Alphabet)’를 공부하고, 기본적인 응대 방식과 책임, 개념에 대해 학습하는 과정은 관객에게도 흥미로운 정보가 된다.
잡음이 많이 들리는 상황에서 무선 교신 내용을 확실히 구분할 수 있도록 B, C, D와 같은 알파벳을 ‘브라보, 찰리, 델타’로 읽는 포네틱 코드는 오랜 시간의 연구와 시행착오를 거쳐 완성된 실제 업무에 활용되는 소통방식이다.
관제의 실수는 엄청난 사고와 피해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관제는 반드시 정해진 코드로 정확한 소통을 하고, 상대방의 말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복창’을 통해 확인하는 ‘리드백(Read Back)’과 상대방의 말을 잘 이해했다는 뜻의 ‘라져(Roger)’로 마무리된다.
디디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관제하듯 대화하면 어긋날 일도 없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자꾸 바하마 사투리가 튀어나오는 통에 매번 스카일러에게 지적을 받는다. “표지판도 신호등도 없는 하늘 위에서 길을 찾는 방법은 단 하나, 관제사의 목소리를 믿는 것”이라는 점은 정해진 규칙을 지켜야 할 중요성과 관제사의 책임을 강조한다.
주파수를 통해 목소리로만 만나는 두 사람의 수업은 점점 서로를 가깝게 만든다. 해상사고로 부모님을 모두 잃은 디디는 동생들을 돌보며 아버지 역할까지 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어느 날 오가르를 찾아온 일레인과 사랑에 빠져 함께 리조트를 성공시키는 꿈을 꾼다.
한편, 21년 전 이해할 수 없는 무리한 착륙 시도로 모두를 죽음으로 몰고 간 항공기 조종사인 아버지로 인해 끝없는 비난과 고통 속에 죄인으로 살아야 했던 스카일러는, 이혼 후 1년째 아들을 못 보고 있다.
아버지의 무죄를 밝히기 위한 재판을 준비하는 스카일러의 선택은 세간의 주목을 받고, 가족들은 모두 그에게 그만할 것을 종용한다. 하지만 디디는 20년이라는 시간을 의문과 고통 속에 견뎌야 했던 스카일러가 얼마나 외로웠을지, 관제탑에서 하늘을 바라볼 때마다 어떤 마음이었을지를 이해한다.
만나본 적도 없이, 주파수에 맞닿은 목소리로만 대화를 나눠 온 디디의 위로는 홀로 세상 모두와 맞서고 있다고 느꼈던 스카일러에게 ‘빛’으로 다가와 등대처럼 불을 밝힌다.
뮤지컬 '라져'는 스카일러가 쫓는 항공기 사고의 숨겨진 진실과 디디가 올드비를 방문해 찾아낸 관제사, 그리고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비상 상황을 연결한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견하게 되는 무죄의 증거, 복수와 끝없는 응징을 통해 고통을 보상받겠다는 스카일러의 분노는 디디가 정비 불량으로 인한 배 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난 뒤 어떤 일을 겪었는지와 연계된다.
디디는 스카일러에게 분노와 원망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사고로 인해 20년간 멈춰졌던 삶에서 벗어나 자신만을 위한 길을 갈 것을 조언하지만, 스카일러는 듣지 않는다. 하지만, 20년간 기다려온 순간과 ‘메이데이’를 외치는 조종사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관제실 사이에서 스카일러의 선택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스카일러가 어떤 관제사인지를 입증한다.
뮤지컬 '라져'는 타인을 돕고자 하는 인간, 용서가 불러오는 선한 영향력, 위로가 만들어내는 따뜻함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재난이 닥쳐올 때 달려가 도움을 주기 위해 애쓰고, 역경을 이겨내려고 서로 힘을 모으며, 비극을 막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인간의 본성…. 스카일러와 디디, 바다 위에 떠 있는 배들의 연대와 협력은 위험에 처한 수많은 생명을 구한다.
또 이들이 행한 타인을 돕는 선택은 죄책감 속에 무너져가던 또 다른 타인이 진실을 말하는 용기를 발휘하도록 만든다. 접점이 없던 사람들은 우연과 친절, 공감, 타인을 위한 선택의 고리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닿는 관계로, 용서와 화해, 희망, 포용의 단계로 나아간다.
타인에게로 흘러간 따뜻함이 나에게로 되돌아와 모두를 구하는 이야기, 주파수로 맞닿은 인연이 운명처럼 빚어내는 ‘선함’이 차가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위로’로 다가오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5월 31일까지 NOL 서경스퀘어 스콘 2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