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 시인의 좋은 시 365] 공광규 시인의 '가죽그릇을 닦으며' 중에서
시는 인간 마음속 심상(心像)에서 피어나는 혼불과도 같습니다. 깊은 사유의 내면에서 길어 올린, 짧지만 응축된 언어문학의 보석과도 같은 시의 세계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좋은 시와 함께 조용하지만 반짝이는 하루를 보내시길 바랍니다.
가죽그릇을 닦으며 / 공광규
여행 준비 없이 바닷가 민박에 들러
하룻밤 자고 난 아침
비누와 수건을 찾다가 없어서
퐁퐁으로 샤워를 하고 행주로 물기를 닦았다
몸에 행주질을 하면서
내 몸이 그릇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뼈와 피로 꽉 차 있는 가죽그릇
수십년 가계에 양식을 퍼 나르던 그릇
한때는 사람 하나를 오랫동안 담아두었던
1960년산 중고품 가죽그릇이다
흉터 많은 가죽에 묻은 손때와
쭈글쭈글한 주름을 구석구석 잘 닦아
아름다운 사람 하나를
오래오래 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 '담장을 허물다' (창비, 2013)
공광규 시인은 자연과 인간의 삶을 담백하면서도 깊이 있는 언어로 풀어내며 오랜 시간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시인입니다. 1960년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난 그는 농촌의 풍경과 생활 감각을 바탕으로 작품 활동을 이어왔으며, 1993년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한 이후 꾸준히 자신만의 서정 세계를 구축해 왔습니다. 윤동주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아 왔습니다. 대표 시집으로는 ‘대장간의 유혹’, ‘소주병’, ‘담장을 허물다’, ‘나는 우산이 아니다’가 있으며, 동시집으로는 ‘지구가 귤을 먹을 때’, ‘얼굴 반찬’ 등이 있습니다.
공광규 시인의 시를 읽고 있으면 화려한 수사보다 생활의 체온이 먼저 느껴집니다. 그의 시에는 논밭과 골목, 가족과 노동, 오래된 물건과 계절의 변화 같은 익숙한 풍경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향토적 정서에 머무르지 않고, 평범한 삶 속에 숨어 있는 인간의 고독과 존엄을 조용히 드러냅니다. 또한 낡은 우산이나 빈 소주병 같은 평범한 사물도 인간의 외로움과 시간의 흔적을 품은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합니다. 그래서 그의 시는 크고 거창한 이야기보다 ‘살아간다’라는 행위 자체의 무게를 오래 바라보게 만듭니다.
그의 시는 결국 평범한 하루를 끝까지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조용히 어루만집니다. 그리고 그 따뜻한 시선 속에서 독자들은 자신의 삶 역시 충분히 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