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선 시인의 시로 보는 세상 풍경] (56) 파란이끼산에서 다양한 생명의 비법을 배우다
인터뷰365 홍찬선 칼럼니스트 = 인생은 줄이다. 어느 줄을 잡고 어느 줄에 서느냐에 따라 삶이 많이 바뀐다. 직장이나 결혼 같은 큰일뿐만이 아니다. 순간, 순간의 선택도 줄이다.
매헌산악회의 ‘제116차 정기산행’으로 강원도 횡성(橫城)의 청태산(靑苔山)에 가서 5개 팀으로 나누어 둘레길을 걸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산불을 예방하기 위해 정상까지 가는 등산로가 5월15일까지 폐쇄되고, 숲 해설가 5명이 10~20명씩 팀으로 나눠 인솔했다. 그때 가장 오래된 분으로 여겨지는 해설가 팀에 들어갔다.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은 곧 드러났다.
잣나무 잎에 숨은 족도리풀꽃을 만나다
다른 팀이 먼저 떠난 뒤에도 우리 팀은 출발하지 않았다. “어서 가자”는 팀원들의 재촉에도 양충섭 해설가는 “주어진 시간에 걸을 수 있는 만큼 걷게 하겠다”며 여유만만이었다. 서둘러 출발하는 대신 주위에 핀 민들레와 제비꽃 등을 찍어서 자신에게 보여달라고 했다.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민들레를 찍어 보여주니, 사진을 확대해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팀원 모두의 사진 촬영이 끝난 뒤에 말했다.
“사진 찍을 때 초점을 잘 맞춰야 좋은 사진이다. 초점이 맞지 않으면 사진을 확대했을 때 사진이 깨진다. 그러면 사진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
좋은 가르침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알려주었다. 그리곤 60~70살 먹은 아름드리 잣나무 아래로 갔다. 누런 잣나무 낙엽이 쌓인 곳에 멈춰서 하트 모양을 한 잎이 2개 있는 풀을 가리키며 “이게 무슨 풀인지 아느냐?”고 묻는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자 잎을 옆으로 밀고 그 아래에 보라색 꽃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꽃 모양이 족두리를 닮았다고 해서 족도리풀꽃이라고 부른다. 하트 모양의 잎 2개 사이에서 꽃 한 송이가 피는데, 엄마 아빠의 사랑으로 아기가 태어나는 것과 비슷하다”는 말에 모두가 “와~”하며 탄성을 뱉었다.
“이 꽃은 화려하지도 않고 향기도 없어 씨앗을 퍼트리기 위해 개미를 이용한다. 씨 앞에 하얗고 말랑말랑한 지방 덩어리인 엘라이오좀을 분비해 개미가 엘라이오좀을 애벌레에게 먹이려고 씨를 물고 가서 퍼트리도록 하는 것”이라는 친절한 설명이 뒤따랐다. 나중에 다른 팀에게 족도리풀꽃 얘기를 했더니, 자기들은 보지 못했다며 부러워했다.
엄마와 딸의 사랑이
함께 살다 궁녀가 되어 헤어져야 했던
사무치는 그리움이
하늘에서 다시 만나
뒷마당에서 보라꽃으로 태어났습니다
우람한 잣나무 아래
수북한 잣잎을 뚫고
하트 모습으로 자라난
연두 잎 2개 사이에서
수줍은 듯 눈웃음만 보냅니다
큰 누나 시집갈 때 썼던 족두리
집사람 시집올 때 썼던 족두리처럼
사랑은 세심한 마음으로
겸손하게 다가가 몸을 숙이고
정성껏 봐야 한다고 알려줍니다
벌과 나비를 꼬드기는 색과 향기가 아니라
하얗고 말랑말랑한 지방덩어리, 엘라이오좀으로
개미를 불러 씨앗을 퍼트리는 지혜로
가래를 삭이고 기침을 멈추고 신경통을 줄이는
세신(細辛)의 깊고 넓은 모녀의 정입니다
- 홍찬선, ‘족도리풀꽃’ 전문.
양 해설가의 설명은 이어졌다. 잣나무와 소나무를 구별하는 방법이었다. “잣나무 껍질은 물고기 비늘처럼 생겼고, 소나무 껍질은 거북이 등껍질과 비슷하다. 소나무 잎사귀는 2개인데, 잣나무는 5개다. 소나무에는 솔방울이 달리고 잣나무에는 잣송이가 달리는데, 잣송이 하나에 잣이 120개가 열린다.” 그는 잣나무에 얽힌 재밌는 얘기도 들려줬다. “옛날에 과거에 낙방한 선비가 공짜로 주막에서 밥 먹고 잠도 잔 비결”이라는 말에 모두가 귀를 쫑긋 세웠다.
“과거에 낙방한데다 노자도 다 떨어져 빈털터리가 된 선비가 주막에 들렀다. 주막에 가는 길에 산에서 잣을 한 움큼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주막에 도착한 선비는 주모에게 자기 옷을 가리키며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주인이 ‘오시오’라고 했다. 오라고 했으니 방에 들어가 잣을 꺼내 무엇이냐고 묻자 ‘자시오’라고 하는 것 아닌가. 잠 잘 자고 아침에 일어나 떠날 채비를 하고 갓을 가리키며 무엇이냐고 하자 ‘가시오’로 해서, 아무런 일 없었다는 듯 갔다”는 얘기였다.
아낌없이 주는 뽕나무와 야누스 벌깨덩굴
잣잎 사이로 앙증맞은 조그만 꽃이 피어있다. 개별꽃이다. 그런데 어느 꽃은 그냥 하얗고, 어떤 꽃은 까만 점이 있다. 암꽃과 수꽃인가 했는데 그게 아니란다. “까만 점이 있는 꽃은 아직 수정하지 않은 것이라서 벌과 나비를 유혹하기 위해 더 이쁘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수정된 것은 더는 벌과 나비가 필요 없어 하얗게 변해 씨앗을 키우는 데 전력을 기울인다. 이런 색의 변화는 병꽃도 마찬가지란다. 수정되기 전의 꽃은 연두빛인데, 수정된 것은 주황색을 띤다”고 했다. 동백꽃이 수정되면 스스로 참수하듯 싱싱한 꽃을 땅으로 떨어뜨리는 것과 비슷하다. 참으로 자연의 신비다.
양 해설가가 손에 무슨 꽃처럼 보이는 것을 잡고 물었다. 잎이 작아 무엇인지 정확히 구별되지 않았다. 도토리나무 꽃처럼 보이기도 하고, 뽕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무도 맞추는 사람이 없자 “뽕”이라고 대답하며 설명한다. “이 열매가 자라서 까맣게 익으면 맛있는 오디입니다. 뽕잎은 누에가 먹고 비단을 만들고요, 줄기 껍질은 상백피, 뿌리 껍질은 상근피로 약재로 쓰입니다. 뿌리에는 상황버섯이 자라니, 뽕나무는 뿌리부터 열매까지 버릴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 옆에 자작나무가 보였다. 양 해설가의 설명이 이어졌다.
“자작나무는 태우면 껍질에 기름이 많아 자작자작 소리를 낸다고 해서 자작나무라고 합니다. 추운 지방에서 자라기 때문에 기름기가 많고, 기름기가 있어 불꽃이 오래갑니다. 결혼식 올리는 것을 ‘화촉을 밝힌다’고 하는데 화촉(樺燭)의 화(樺)가 바로 자작나무지요. 나무껍질에 기름기가 많아 그림을 그리면 오래가고, 편지를 쓰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산에 가서 오르기에만 정신 쏟으면 들을 수 없는 얘기들이다. 길가에 취나물처럼 보이는 풀이 노란 꽃을 피우고 있다. 참으로 예뻤다. “저게 취나물처럼 보이지만 동의나물입니다. 독이 있어서 산나물로 여기고, 뜯어 반찬으로 먹으면 응급실에 실려 갈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모르는 게 병’은 동의나물을 취나물로 여기고 먹는 일일 것이다.
그 옆에 노란 꽃이 애기똥풀 같기도 하고 동의나물 같기도 한데 피나물이라고 한다. 줄기에서 나오는 액이 피처럼 붉다고 해서 피나물이라는 이름을 얻었단다.
“야누스가 무슨 뜻인지 아시지요?”
양 해설사가 갑자기 질문했다. 보라색 꽃이 핀 식물 앞에서였다. 잎이 들깨잎처럼 보였다.
“두 얼굴을 가진 신, 아닌가요?”
“맞아요. 그런데 식물에도 야누스가 있다는 얘기 들어보셨나요?”
“아니요.”
“이게 바로 식물의 야누스로 불리는 벌깨덩굴입니다.”
“왜 야뉴슨데요?”
“꽃이 필 때는 서 있는데, 수정이 되면 땅으로 기어 줄기에서 뿌리를 내려 번식하거든요.”
“…”
명상 휴식터로 변신한 화전민 터
청태산(靑苔山, 1194m)이란 이름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하사했다고 한다.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뒤 관동지방에 있던 5대조 목조(穆祖)의 묘포 성묘 가던 중 횡성군 둔내면 삽교리에서 쉬었다. 이끼가 많이 낀 커다란 바위에 앉아 휴식하면서 점심을 먹었다. 파란 이끼와 아름다운 산세를 보고 청태산이란 휘호를 내렸다. 일제강점기 때 청태산(靑太山)으로 바뀌었는데, 다시 청태산(靑苔山)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이곳은 화전민이 살던 곳이었다고 한다. 요즘은 화전(火田)이 없어졌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숲에 불을 놓아 밭을 일궈 농사지으며 사는 화전민이 꽤 많았다. 잣나무 숲에 물소리와 바람 소리와 새소리를 들으며 어깨를 짓누르는 시름을 모두 내려놓으라고 명상터를 만든 곳 옆에 화전민터가 남아 있다.
돌로 울타리를 쳐놓은 흔적을 보니 그때의 힘들었을 삶이 떠오른다. 그들의 삶을 바람에 날리듯, 어깨를 짓누르는 삶의 흔적을 내려놓는다. 청태산의 오월은 메마른 삶에 다시 생기를 불어넣는 천연치료제였다. 산행은 좀 아쉬웠지만, 양 해설사에게서 들은 ‘꽃과 나무의 생명학’은 그 어느 강의보다 유익했다. 산행이 다 끝났을 때 나무로 만든 곰 인형 가족이 활짝 웃으며 또 오라고 인사해주었다.
오월엔 청태산에 가자
파아란 이끼로 가득 덮인 산자락에
하늘 높이 뛰어오른 잣나무 아래에 누워
어깨 짓누르는 삶의 무게를 내려 놓고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에
욕심과 미움과 미련을 떠내려 보내자
내려놓으면 가뿐하고
흘려보내면 산뜻하고
비우면 즐거워지는 것
다소곳이 고개 숙인
새색시의 족두리에서 겸손을 배우고
솔솔 부는 솔바람에 사랑을 띄우자
오월은 새로 시작하는 달
청태산 이끼를 스승 삼아
기지개 활짝 펴고 새날을 맞이하자
- 홍찬선, ‘청태산의 오월’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