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하영 365칼럼] 인간의 마음과 삶, 죽음에 관한 질문...연극 '뼈의 기록'

[주하영 평론가의 짧은 단상] - 천선란 작가 ‘로봇 3부작’ 시리즈 마지막 이야기 연극화 - 예술의전당×할리퀸크리에이션즈 공동 기획 작품

2026-05-10     주하영 칼럼니스트

심층 문화 비평 칼럼 <앨리스 박사의 문화로 보는 세상풍경>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주하영 칼럼니스트가 또 하나의 새 칼럼 <주하영 평론가의 짧은 단상>을 선보입니다. 짧은 형식 속에 담긴 자유롭고 날카로운 문화적 통찰을 기대해 주세요.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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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 인간에게 죽음은 차가움과 두려움, 어두움으로 감각된다. 그렇다면 감각을 생물학적으로 경험할 수는 없는 안드로이드 로봇에게 죽음은 무엇으로 인식될까? 인간과 다른 몸을 가졌으나 인간의 행동을 모방하고, 인간을 꼭 닮은 기계인 안드로이드 로봇에게 죽음, 상실, 애도의 슬픔, 아름다움과 같은 추상성은 어떻게 인지되는 것일까?

실제 인간의 ‘의식’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사고방식을 학습하고, 감정을 탐지하며, 상황에 적합한 반응을 인간과 유사하게 시뮬레이션하는 안드로이드 로봇에게 죽음이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사라지는 것들이 품는 슬픈 아름다움의 무게를, 허무할 정도로 가볍지만 동시에 한없이 무거운 죽음이 불러오는 상실의 감정을 안드로이드 로봇에게 이해시키는 것이 가능할까?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는, “죽은 자의 시간을 돌리는 존재”로 만들어진 안드로이드 장의사 ‘로비스’의 눈을 통해 바라본 인간의 삶과 죽음을 그린 연극 '뼈의 기록'이 막공을 앞두고 있다.

'천 개의 파랑'으로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을 수상한 천선란 작가의 ‘로봇 3부작’ 시리즈의 마지막인 동명 소설을 무대화한 작품 '뼈의 기록'은, 안드로이드 장의사 ‘로비스’ 역할의 배우와 영안실에서 로비스가 만나게 되는 모든 인물을 연기하는 ‘1인 다역’의 배우가 펼쳐 보이는 2인극이다.

2085년, 폐허가 된 지구를 떠나는 인류 행성 이주 프로젝트의 마지막 우주선을 발사하는 뉴스를 영안실에서 홀로 지켜보는 안드로이드 장의사 로비스의 장면으로 시작하는 연극은, 수미상관 구조를 이루며 과거로 되돌아가 현재에 이르는 로비스의 삶을 보여주는 구성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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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소설에는 없는 ‘행성 이주 프로젝트’라는 설정은 기후 위기에 대한 인식과 함께 행성이라는 자연 또한 ‘죽음’으로 향할 수 있다는 예외 없는 진실을 상기시킨다.

지하에 있는 영안실에서 죽은 이들의 시신을 정결하게 닦고 정리하며 수의를 입히고, 고인의 마지막 존엄을 지키기 위한 목적으로 설계된 안드로이드 로봇 로비스 역시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는 못한다.

폐기가 확정된 채 홀로 남아있는 로비스는 다른 행성에서의 삶에 희망을 품고 떠나는 마지막 우주선 발사를 바라보며, 오랜 시간 인간의 ‘죽음’과 마주한 뒤에 얻은 깨달음을 조용히 읊조린다.

“죽음이란 모두에게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모두에게 다르며, 볼 수 없는 존재의 삶을 끊임없이 보고 있는 뼈의 아름다움과 같은 것이로구나!”

원작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그대로 옮긴 로비스의 대사는 긴 여운을 남긴다. 층고가 낮은 긴 박스 형태로 무대 위에 구현된 영안실에 앉은 채로 좁은 창문으로 우주선이 사라진 하늘을 바라보며, 어둠 속에 마지막을 맞이하는 로비스의 모습은 ‘입관’과 ‘매장’을 연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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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뼈의 기록'은 침묵과 차가움, 무거움의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장한새 연출에 따르면, “작품의 중요한 정서는 ‘적막함’”이기 때문에 “영안실이라는 공간이 지닌 차가움과 고요함을 유지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로비스가 자신을 ‘친구’라고 부르며 매일 저녁 수어(手語)로 대화를 나누던 청소노동자 ‘모미’의 시신이 놓인 안치 베드를 끌고 우주 발사대가 있는 항공우주국을 향해 생전 처음 밖으로 향하는 장면에서는, 막혀있던 좁은 무대를 뒤쪽으로 열어 넓고 깊게 확장함으로써, 우주로 향하는 로비스의 ‘모험’과 ‘성장’을 표현했다.

직접 수어로 대화를 나누는 모미와 로비스의 장면은 로비스의 “기억이 축적된 데이터 박스”이자 “길고 좁은 관”을 연상시키는 차가운 영안실 벽에 두 사람이 대화하는 내용이 글자로 투사되도록 함으로써, 관객들이 읽을 수 있도록 연출되었다.

로비스가 모미와의 대화를 통해 손으로 만들어 보이는 나비의 날갯짓, 마음이 하는 일, 아름다움의 의미, 꿈에 대해 알게 되는 장면들은 LED 조명과 프로젝션 맵핑을 활용해 영상과 이미지를 투사하는 미디어 파사드 기법으로 단조로울 수 있는 무대에 조용한 ‘신비로움’을 더했다.

특히 로비스가 염을 행하는 시신은 사망자의 이름을 안치 베드에 투사하는 방식을 적용했는데, 염이 끝나고 화장장으로 향하게 되면 글자들은 마치 흙으로 돌아가는 육체를 상징하듯 먼지처럼 흩어져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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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사고로 화상을 입은 탓에 뜨거운 것을 싫어하는 80대 노인 모미 역의 배우는 장례식장을 관리하는 ‘무영’을 비롯해, 자살한 동생의 유가족으로 영안실을 찾은 우주비행사 ‘첼’, 아홉 살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은 엄마 ‘수연’, 89세의 무연고자 주인이 죽은 뒤 남겨진 가정용 안드로이드 ‘박동구’를 연기한다.

영안실 문이 열고 닫힐 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등장해 각기 다른 상황에 놓인 인물들을 연기하는 장면은 빠르게 전환된다. 로비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 위를 떠나지 않고 자리하는데, 이는 전체 극이 로비스의 삶의 기록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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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뼈의 기록'은 원작이 던진 질문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죽음을 모르는 안드로이드가 어떻게 상실로 고통받는 유가족들을 위로할 수 있는지, 육신의 부패가 생태계에 이바지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호흡하는 자의 특권”임에도 왜 인간들은 외면하려고 하는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은 어떻게 의지의 발현을 통해 행동으로 구현되는지, 죽음이 왜 소멸이 아니라 어딘가로 돌아가는 것으로 여겨지는지와 같은 질문들은, 안드로이드 로봇의 시선을 통해 인간이라는 존재를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도록 만든다.

망자와 남겨진 이들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도록 모든 것에 의문을 품고, 사고 흐름의 산출물을 되새기도록 만들어진 로봇 로비스는 대화와 경험, 사유를 통해 성장하고 깨달음을 얻는 인간과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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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일부인 인간의 신체를 바라보는 로비스의 시선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신체가 연약하고 취약하지만은 않음을, 수억 개의 세포들이 작용하며 생이 다할 때까지 끊임없이 성장하고 변형되는 뼈를 소유한 ‘강인함’을 갖고 있음을 인지하도록 만든다.

감정과 마음을 갖고 있으며, 꿈을 꾸고, 상상력을 발휘하는 인간은 ‘죽음’이라는 미지의 현상을 두려워하고, ‘아름다움’을 정의한다.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묻는 로비스에게 답하는 모미의 설명에는 프랑스 철학자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의 ‘숭고함의 미학’이 적용된다.

손으로 만들어 보이는 나비는 그림자로는 똑같아 보이는 ‘동일성’을 갖지만, 결국 같은 나비가 아니라는 ‘차별성’과 결코 진짜가 될 수 없다는 ‘불가능성’을 갖는다.

로비스는 자신에게 “아름다움은 뼈와 같다”라는 결론을 내리는데, 모든 인간이 몸속에 갖고 있지만 삶 속에서 저마다 형태가 다르게 변하고 존재함에도 볼 수 없는 불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로비스는 죽음 또한 아름다운 것인지를 묻는다. 죽음 역시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귀결이지만 각자 다르게 겪으며, 늘 존재하지만 외면하기에 볼 수 없고, 경험한 후에는 전달할 수 없는 불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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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 다니엘라 루스는 'MIT 로봇 수업'에서, 로봇과 인공지능을 연구할수록 “인간에 대한 존경심”을 품게 되며, “우리 자신에 대해 배워야 할 점이 아직 많다는 것을 깨닫는다”라고 피력한다.

연극 '뼈의 기록' 역시 죽음을 마주하는 장의사 로봇의 삶을 무대로 경험하는 관객들이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삶에 대해, 죽음에 대해 배워야 할 것이 많음을 인식하도록 만든다.

로봇을 연기하는 배우를 바라보면서 인간과 로봇의 차이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로봇이 겪는 인간적인 삶을 바라보면서 자연뿐 아니라 기계도 피할 수 없는 ‘필멸’을 인식하는 관객은 ‘마음’이란 무엇인지, ‘삶’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생명’이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루스는 “가장 발전된 기계 지능이라고 해도 지혜, 지식, 이해력은 갖추지 못하”며, “불확실성이나 예상치 못한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로 로비스처럼, 뜨거움을 싫어한 모미를 떠올리며 차가운 우주로 떠나보내기 위해 시신을 훔쳐 도망치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스스로 판단해 ‘마음’을 인지하고 따를 수 있는 기계 지능은 불가능한 것일까? 기계를 바라보면서 인간적 감정을 대입해 해석하는 일라이자 효과(Eliza Effect)에 불가한 것일까? 2085년, 우리에게는 어떤 미래가 펼쳐질까? 5월10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