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평 - 새로운 서평] 보이저 · 반우울 外

- [비평연대] 이솔림·배희주·김상화·김수연의 500자 서평

2026-05-08     김리선 기자

젊은 문화비평가와 출판전문가들의 커뮤니티인 '비평연대'에서는 숏폼 콘텐츠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500자 내외의 '매우 짧은 연대 서평'의 형식을 고안했습니다. 2030세대 지식인 특유의 빛나는 감각으로 제시되는 다양한 책들을 통해 지식의 최전선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편집자주] 

■ 보이저 (노나 페르난데스 지음, 조영실 옮김, 가망서사, 2025)

1973년 칠레. 별이 밝은 아타카마 사막에서 반체제 혐의자 스물여섯 명이 처형당했다. 훼손된 시신은 흩어졌고, 남은 사람들은 조각 하나라도 찾기 위해 사막을 맨손으로 뒤졌다. 어쩌면 그곳에 없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손이 주름지고 부르틀 때까지.

칠레의 역사를 꾸준히 기록해온 소설가 노나 페르난데스는 국제앰네스티로부터 한 통의 연락을 받는다. 그들은 사막에서 사라진 사람들의 이름을 별에 붙이려 한다.

“어떻게 하면 그 스물여섯 명의 사람들이 잊히지 않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그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을까요?” (24쪽)

저자가 어릴 적 어머니는 별을 두고 말했다. 저 반짝거림은, 그곳의 작은 사람이 나를 잊지 말라고 보내는 작은 신호라고. 그 말을 들려주던 어머니는 이제 간질로 의식이 드문드문 끊긴다. 기억으로 이루어졌으나 필연적으로 기억을 잃을, "땅의 사람들“이 바라고 애쓰는 작은 일들이 '보이저'의 검고 흰 페이지를 타고 유려하게 펼쳐진다.

저 멀리 까마득한 하늘에서 여기 있다고, 잊지 말라고 손짓할 사람들의 모습을 책을 덮고도 자꾸만 그려보게 된다. 그 반짝임이 유독 뭉클하게 느껴지는 건, 우리가 이미 쉽게 사라지지 않는 이름들을 함께 불러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이솔림/출판편집자·비평연대)

이솔림<br>

반우울 (다이라 고겐 지음, 서교책방, 2026)

좋아하는 음악이 예전만큼 설레지 않고,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어도 집중하기 어려운 순간이 찾아오곤 한다. 우울증인가 싶다가도 일상을 무탈하게 보내고 있는 자신을 보면 그저 기분 탓이라며 넘기기도 한다.

일본의 25년 차 정신과 전문의 다이라 고겐은 이러한 심리 상태를 우울증과 우울감 사이에 머물러 있는 ‘반우울’이라고 정의한다. 이 책은 현대인 5명 중 1명이 겪고 있다는 반우울 상태를 스스로 점검해 보고, 그 상태에서 벗어나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차분히 안내한다.

“열심히 해왔지만 끝까지 버티지 못하는 자신을, 괜찮지 않은데 괜찮은 척하는 자신을 보듬어주세요. 여러분의 마음 그 자체를 소중히 하는 데 눈길을 돌려주세요. 그런 다음 쉬엄쉬엄 해도 좋으니, 몇 번이고 돌아보아도 좋으니 진정한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바랍니다.”

운전을 잘하는 사람은 액셀과 브레이크를 적절히 사용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항상 앞으로 나아갈 필요는 없다. 더 멀리 나아가기 위해서는 쉬는 법도 중요하다는 것. 인생에는 분명 나만의 속도가 있다.(배희주/출판마케터·비평연대)

배희주<br>

도쿄 킷사텐 도감(엔야 호나미 지음, 서하나 옮김, RHK코리아, 2026)

킷사텐. 1920년대 일본에서 처음 등장한, 가벼운 식음료와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던 찻집을 말한다. 그중에서 술과 유흥을 팔지 않고 순수하게 차와 다과만 대접하던 킷사텐을 일본 사람들은 '킷사(喫茶, 차를 마시다)' 앞에 '준(純, 순수한의 순)'을 붙여 "준킷사"라 불렀다. 1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일본 곳곳에서 주민들의 사랑방이 되고 있는 준킷사. 그중 도쿄의 아름답고 특색 있는 준킷사 18곳을 담아낸 책이 바로 '도쿄 킷사텐 도감'이다.

킷사텐에는 레트로한 분위기, 간단한 식음료, 그리고 켜켜이 쌓인 시간이 있다. 커피도 전통 방식 그대로 드립으로만 내려 주는 이곳은 '오래됐으나 낡지 않은' 다방. 책은 이 매력 가득한 킷사텐을 총 4장으로 나눠 소개한다. 향수가 느껴지는 킷사텐부터 호화찬란한 킷사텐, 음악을 즐길 수 있는 킷사텐, 한껏 개성이 빛나는 킷사텐까지. 읽다 보면 당장에라도 도쿄로 날아가 킷사텐 한구석에서 시폰케이크에 진한 홍차를 홀짝이고 싶어진다. 개인적으로는 비엔나커피를 일본 최초로 내놓기 시잔한 곳이라는, 진보초 책거리 안 '라도리오(ラドリオ)' 킷사텐에 가장 먼저 가 보고 싶다.

킷사텐을 국내에 소개한 책은 이전에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이 책이 특별한 이유는 저자가 '엔야 호나미'이기 때문. 엔야는 건축가로 일하며 찾아온 번아웃을 목욕탕으로 극복한 후 그간 다녀온 목욕탕들을 특수건축도법으로 담아낸 '목욕탕 도감'(수오서재, 2023)으로 한국에 소개된 바 있는 작가다. 이 책은 엔야의 그 두 번째 도감으로, 그가 "준킷사 도해(純喫茶図解)"라는 제목으로 웹에 연재한 글에 살을 붙이고 새로운 글을 더해 만들어졌다. '건축전공자'와 '화가' 그리고 '동네 주민'의 눈으로 엔야가 담아내는 도쿄 킷사텐의 정취는 이 책의 두말할 것 없는 백미다.

오래된 찻집은 다른 말로 '살아남은' 찻집. 도쿄에 간다면 긴 세월을 통과하며 단골과 유대를 쌓고, 개성 있는 메뉴를 만들고, 품을 들여 공간 곳곳을 유지·보수해 오랜 시간 살아남은 공간, '킷사텐'에 한 번쯤 방문해 보면 어떨까. 나는 일단 엔야 호나미가 발품 들여 콕 찝어 준, 이 책 속 킷사텐들부터 가 볼 거다.(김상화/출판편집자·비평연대)

김상화<br>

레이어링(브만남(김주황) 지음, 위즈덤하우스, 2016)

제품력 하나로 성공하기 힘든 시대다. 소비자는 브랜드의 많은 부분을 본다. 회사의 이야기와 가치관 같은 내면적인 부분부터, 그것을 어떻게 시각화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필요한지까지. 이제 브랜드는 ‘이 제품은 좋습니다’ 에서 ‘이것을 쓰는 당신은 이런 사람입니다’까지 도달해야 한다. 도서 '레이어링'은 그런 브랜드가 되기 위해 쌓아올림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저자 김주황(브만남)은 다양한 브랜드를 디렉팅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현장에서 얻은 인사이트를 이 책에 담아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브랜딩에서의 레이어링을 3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는 점이다. 브랜드의 가치관을 정하고, 그에 맞는 컨셉과 제품으로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소비자의 페르소나를 구체적으로 설정하는 것과 달리, 이 책은 브랜드 자체를 소비자에게 도움이 되는 인물로 설정한다. 역설적으로 그것이 소비자를 가장 정확하게 겨냥하는 방법이다.

결국 이 책은, 브랜딩이란 겉모습부터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바깥으로 차근차근 쌓아가는 작업임을 보여준다. 그렇게 쌓아올린 브랜드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김수연, 출판마케터, 비평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