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로창고극장의 마법 같은 변신...연극 ‘햄릿, 걷는 인간’이 선사한 전율

[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 나진환 각색·연출 ‘햄릿, 걷는 인간’ - 극장 전체가 무대로...자투리 공간마저 예술이 된 순간 - 회당 단 22명만 입장...평생 잊을 수 없는 멋진 추억의 공연

2026-05-03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연극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삼일로창고극장이 셰익스피어에 의해 아름다운 공간으로 되살아났다!

좀 과장된 표현이지만 주택의 바닥을 파서 창고형 극장을 만든 역사를 아는 필자에게, 개관 이후 여러 차례 리노베이션을 거친 삼일로창고극장이 이처럼 아름답고 멋진 공연장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

관객은 회당 22명 한정이다.

그 한 명이 되어 싱그런 5월의 첫날, 셰익스피어 원작을 나진환 각색 연출로 삼일로창고극장에 올려진 ‘햄릿, 걷는 인간(HAMLET, WALKING MAN)’을 본 것은 평생 잊을 수 없는 멋진 추억이자 공연예술을 사랑하는 행복 그 자체였다.

삼일로창고극장에서 ‘햄릿’을, 그것도 더 확대 창작된 ‘걷는 인간’을 공연한다니!

극단 피악의 인문학적 성찰시리즈의 찐 팬이 된 필자는 나진환 연출로부터 ‘햄릿, 걷는 인간’ 공연 초대를 받고 왜, 어떻게? 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2023년 이해랑예술극장에서 공연된 대작을 무대도 불편하고, 객석도 적은 창고형극장으로 옮긴 이유가 뭘까?

더욱이 ‘걷는 인간’이란 부제를 살리려면 ‘길’이 있어야 하는데 블랙박스형인 창고극장 무대에 어떻게 길을 내 동선을 보여줄 것인지 의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같은 우려는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기우였음이 입증되었다.

평소 필자가 알던 창고극장 안팎의 계단과 자투리 공간들과 출입구, 심지어는 비상구까지 마치 마술처럼 햄릿과 배우들이 걷고 연기하는 길이 된 것이다.

이번 창고극장 공연의 기획과 공간 구상은 나진환 연출이 직접 했으며 디자인까지 맡아 공연의 전체 콘셉트를 재구축했다.

일반적으로 극장 내부에 세트를 세우는 것을 연상하는데, 나진환 무대미술가는 ‘삼일로창고극장 건물 전체’와 ‘건물을 둘러싼 거리와 주변 건축물들과 하늘’까지도 공연에 활용한 것이다.

극장 내 메인무대는 객석을 한쪽 벽으로 몰고 3면과 중앙을 모두 쓸 수 있게 했다.

객석 입구의 경사면 통로를 동선에 포함시켜 왕궁과 광장을 상징하는 2단 구조물을 설치해 왕을 상주케 했다.

곳곳에 불에 그을린 나무들을 세워 폐허의 느낌을 주었고, 벽면에 스크린을 설치해 즉석 영상도 사용했다.

가장 눈에 띈 핫플레이스는 지금껏 방치되었던 극장 내 한쪽 코너의 좁은 공간이었다. 이곳에 십자가를 세워 기도하는 교회와 햄릿의 사유 공간으로 꾸몄는데, 좁은 공간이 감옥처럼 중압감을 자아내 햄릿 한윤춘의 연기가 더 집중을 받았다.

첫 번째 이동 : 잔디마당과 건물 옥상, 선왕의 혼령이 나타나다!

‘햄릿’ 의상으로 관객들과 친숙해진 한윤춘 배우는 공연이 시작되자 “여러분은 여러 죽음을 보게 될 것”이라며 “극장 밖으로 이동해 첫 번째 죽음을 만나보자”고 했다.

관객들은 보초의 안내로 극장 입구의 자투리 잔디밭에 앉거나 선 채로 자리잡았는데, 어디서 배우가 등장하고 무슨 상황이 펼쳐질지 몰라 약간의 긴장과 설렘으로 야외무대를 지켜보았다.

이윽고 살해된 햄릿의 아버지, 선왕의 유령이 나타나는 첫 장면이 이곳에서 펼쳐졌다.

보통은 성채의 지붕에 유령이 등장하는 데 반대로 유령은 계단 밑에 있었고, 햄릿은 건물 맨 꼭대기 난간에 올라가 선왕을 내려다보며 대사를 주고받아 반전의 묘미와 거리감이 주는 공간의 아우라를 실감할 수 있었다.

게다가 유령(백재동)은 팬티만 걸친 벌거숭이로 나타났다. 명동성당의 종탑이 보이는 야외무대에서 나누는 부자의 대화.! 아는 내용을 장소만 바꿨을 뿐인데 이렇게 다른 느낌을 주다니! 5월의 훈풍까지 불어와 몽환적이고 행복한 기분은 필자만 느꼈을까?

다시 극장 안, 클로디어스 왕과 거투루드 왕비의 즉위식.

나진환 연출은 90분간 진행된 1부에서는 원작의 흐름을 충실하게 살려내 셰익스피어 정극을 보는 재미를 안겨주었다. 인문학 성찰을 내세워 고전 작품을 자신의 메소드로 해석해온 나진환의 일련의 작품들은 오브제를 활용한 실험성이 강한데다 장황하게 펼쳐져 관극이 쉽지 않았는데, 제한된 관객만을 대상으로 한 소극장 공연에서 실험은 줄이고 관객을 이동시켜 셰익스피어 극의 매력을 살려내는 데 주력해 재미를 더했고 새로워 보였다.

원작에는 등장인물이 많지만 이번 공연에서는 8명의 배우가 여러 역할을 압축해 심플한데도 전혀 무대가 비어 보이지 않았다.

햄릿 역은 국립극단 출신으로 나진환 연출의 여러 작품에서 어려운 주역을 해온 한윤춘 배우가 맡아 거의 몰아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연기파 배우로 정점에 선 그는 명료한 화술과 절제미를 갖춘 폭발적 에너지로 무대를 자유자재로 누볐다.

거투루드 왕비 역은 서한결 배우가 맡아 두 번째 이동한 야외 공간에서 햄릿과 혈투에 가까운 열연을 펼쳐 ‘거리의 명장면’을 만들어냈다.

클로디어스 왕 역은 유령을 했던 박재동 배우가 맡아 롱코트 의상이 어울리는 큰 체구로 극의 중심을 받쳐주었다.

비극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오필리어 역은 김남은 배우가 맡았는데 전편에 비해 비중이 엄청나게 커졌다. 청순가련형 캐릭터에서 벗어나 자존감 있는 당당한 연기로 연출이 원했던 현대적 오필리어를 상큼한 매력으로 연기했다.

나진환 연출은 원작에 진심을 기울인 1부에서 특히 4인(햄릿, 거투루드, 클로디어스와 선왕, 오필리어)의 캐릭터를 집중 조명했다.

하지만 호레이쇼, 폴로니우스 무덤지기 2를 각기 다르게, 진정성 있게 연기하며 햄릿 한윤춘 배우와 호흡을 맞춘 안성채 배우. 레어티어스, 무덤지기 1역을 파워풀하면서도 경쾌하게 해낸 주인서 배우. 로전크렌츠, 심판장, 보초 2역을 탄력있게 해낸 장진욱 배우. 길던스턴, 보초 1역을 남장으로 멋지게 연기한 임수현 배우. 또 다른 4인방의 멀티 연기와 코러스로서의 앙상블이 ‘햄릿, 걷는 인간’ 두 개의 연극을 연계시키는데 큰 몫을 했다고 본다.

행인들까지 참여한 깜짝 거리극

1부에서의 최대 하이라이트는 두 번째 이동으로, 극장 입구 티켓부스 앞에서 진행된 거투루드와 햄릿, 모자간의 애증이 범벅된 혈투였다.

필자는 층계의 맨 하단에 자리 잡아 물에 흠뻑 젖은 채 몸을 사리지 않은 한윤춘 서한결 배우의 욕조에서의 불꽃 튀는 현장 연기를 실감 100%로 볼 수 있어 기분이 ‘업’되었다.

그런데 같은 시간에 층계 상단의 수조에서 펼친 오필리어의 명장면 명연기를 놓친 점이 아쉬웠다.

서두에 삼일로창고극장이 이처럼 멋진 공간인 줄 이제야 알았다고 했는데, 필자가 본 숱한 이머시브 공연 중에서도 한윤춘 서한결 배우가 펼친 야외 장면은 최고의 압권으로 꼽고 싶다.

명동에서 충무로로 이어지는 삼일로 길은 요즘 관광객들로 붐비는데, 거리 바로 옆에서 영화 촬영 같은 거리극을 행인들과 함께 볼 수 있었다는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욕조와 수조라는 설정을 통해 물방울을 튀기며 전개된 배우들의 수중 연기를 봄밤에 봤다는 것은 행복이었다. 이제 K씨어터도 세계적인 주목을 받을 것으로 기대된다.

10간 휴식 후 극장 안에서 펼쳐진 2부는 ‘걷는 인간’이란 서브타이틀을 위한 나진환의 인문학적인 사유의 창작 무대였다.

무덤지기 2명이 호흡을 마친 무덤 장면은 원작과는 다른 현대적인 사회비판이 강했다.

그리고 이어진 코너의 좁은 교회 공간에서 쇠사슬에 묶인 햄릿이 오필리어 등과 벌인 연기 대결은 “사유하는 인간, 홀로 걷는 인간”에 대한 각색 및 연출자의 또 다른 작품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덤지기 장면부터 걷는 인간 공연의 러닝타임도 너무 길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대목이 없다면 ‘햄릿’이지 ‘햄릿, 걷는 인간’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필자를 비롯한 일부 관객들은 무대를 삼일로창고극장으로 옮기고 건물 전체를 활용한 이번 공연이 원작 ‘햄릿’의 순수한 맛과 멋을 진정성 있게 살린 또 다른 명작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그러자면 휴식 후 무덤 장면과 최후의 결투 장면을 바로 이어 붙여야 했을 것이다.

최후의 결투 장면은 연극 ‘햄릿’의 백미로 꼽혀왔다. 이번 공연에서는 검이 아니라 총과 단도, 맨몸 격투까지 다채롭게 펼쳐져 재미를 더했다. 독이 든 성배는 거투루드 왕비가 마셔 죽는 것은 원작과 같지만, 모든 상황을 알게 된 거투루드가 총을 꺼내 클로디어스를 쏴 죽이는 장면은 새로웠다.

결국 초반 햄릿 역 한윤춘 배우가 말한 모든 죽음을 관객은 목도한 셈이다. 무대 위 인물들이 다 죽었으면 다음은 관객 순서라고 생각하니 먹먹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나진환 연출은 ‘햄릿’의 첫 대사 “너는 누구냐”에 대한 답으로 ‘걷는 인간’을 강조했다.

욕망의 인간, 무지한 인간 그리고 아름다운 인간.

이들은 모두 같은 길을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가는 길이 다르며 그 모습은 더더욱 다르다.

자기가 가는 길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묻는 인간, 그 인간은 그러므로 아름답다.(연출노트)

나 연출은 셰익스피어의 오리지널 ‘햄릿’도 중시하지만, ‘햄릿, 걷는 인간’에서는 인문학의 토양 위에서 21세기 과학문명까지를 접목시키고자 했다.

카프카의 부조리, 괴테의 ‘파우스트’가 등장하고 자코메티의 조각 ‘걷는 인간’도 인용했다.

“고통스럽지만 나는 걸을 것이다.”

이처럼 나진환 연출은 지난 수십 년간 우리는 누구이며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느냐에 천착해 왔다.

주요작품으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 이반과 스메르자코프’, ‘단테 신곡’, ‘대심문관과 파우스트’, ‘파리의 두 여인’, ‘톨스토이 참회록 안나 카레니나와의 대화’, ‘세자매 죽음의 파티’....그야말로 수도승 같은 고행의 작업으로 그만의 성을 쌓아온 것이다.

“이제 환갑이다. 몸이 많이 약해졌다. 그래도 난 여전히 내 길을 갈 것이다.”

그는 연출 노트에 이렇게 소회를 드러냈다.

내친김에 필자의 궁금증을 그의 연출 노트로 정리해 보았다.

-이번에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공연했다.

"왜냐하면 삼일로 창고극장 전체를 ‘햄릿’의 무대로 사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관객 이동이 포함된 이머시브 연극을 표방했는데?

"난  ‘이머시브 연극(Immersive Theater)’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싶지 않다. 이머시브 연극의 형식을 실험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삼일로창고극장의 아름다운 건물 전체를 공연장으로 쓰고 싶기 때문이다."

-좌석도 22석으로 제한했다.

"그로토프스키의 용어를 빌리자면 ‘궁정 배우들’의 연극이 아니라 ‘신성한 배우들’의 연극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중략) 우리들의 영혼을 다루는 신성한 배우가 우리들의 연극의, 목표가 되기 때문이다.

객석 수를 22석으로 제한하니까 우리의 작업을 좋아해 주는 인문학을 사랑하는 관객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았다. 대부분의 공연도 만석이고, 이게 바로 소극장의 미덕이 아닌가! 대극장의 빈 여러 좌석을 보고 있노라면 3달간 땀 흘린 배우들에게 연출가로서 정말로 곤혹스럽고 힘든 일이다. 앞으로도 난 내가 본 세계와 인간을 내 방식으로 무대에 올릴 것이다."

-공연이 너무 길다는 말도 들린다.

"난 다수의 대중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난 ‘인문학을 사랑하는 관객’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이유로 내 연극은 어렵게 보인다. 또한 깊은 사유를 관객에게 요구하고 심지어 공연 시간이 길기도 하다. 그래서 내 아내에게 매번 혼이 난다. 어렵고 긴 연극을 누가 좋아하느냐고. 하지만 어쩌랴. 이것이 내 길이고 연극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