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 시인의 좋은 시 365] 이해인 시인의 ‘비 내리는 날’

2026-04-23     김지수 칼럼니스트

시는 인간 마음속 심상(心像)에서 피어나는 혼불과도 같습니다. 깊은 사유의 내면에서 길어 올린, 짧지만 응축된 언어문학의 보석과도 같은 시의 세계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좋은 시와 함께 조용하지만 반짝이는 하루를 보내시길 바랍니다.

비 내리는 날 / 이해인

잊혀진 언어들이 
웃으며 살아오네

사색의 못가에도 
노래처럼 비 내리네

해맑은 가슴으로 
창을 열면

무심히 흘려버린 
일상의 얘기들이

저만치 내버렸던 
이웃의 음성들이 
문득 정답게
빗속으로 젖어 오네

잊혀진 기억들이 
살아서 걸어오네

젖은 나무와 함께
고개 숙이면

내겐 처음으로 
바다가 열리네
  
- '민들레의 영토' (카톨릭출판사, 2026)

이해인 시인은 1945년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나 1964년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 입회했습니다. 1976년 종신 서원을 하며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를 발표했고, 2026년에는 출간 50주년 기념판으로 새롭게 독자들을 만났습니다. 이번 기념판은 단순한 복간을 넘어 삶과 신앙 이야기, 애장품 등을 함께 담아 시집의 의미를 한층 깊고 넓게 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젊은 시절과 현재의 수도 생활을 엮은 신간 산문집 '해인의 바다'를 통해 자신의 문학과 영성의 시간을 다시 한번 독자들에게 따뜻하게 펼쳐 보였습니다.

지난 2026년 4월 11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50주년 기념 북토크 현장에서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다정히 마주하며 정성껏 사인을 건네는 모습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습니다. 그렇게 쌓인 정성과 사랑으로 써 내려간 시는 교도소에 있는 독자에게도, 먼 해외의 독자들에게도 전해지며 종교를 넘어 잔잔한 위로와 평화를 건네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바다와 소나무가 보이는 해인선방에서 이어질 시를 많은 독자들이 조용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기다림 속에서, 이해인 수녀님의 시는 오래도록 우리 곁에 따뜻한 희망으로 머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