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리 블루스’ 상황서 드러나는 따라지 인생의 아픔...연극 ‘블루 초코 블루스’
[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 권영준 작, 윤광진 연출 ‘블루 초코 블루스’ - 난장판 상황을 감동으로 전환시킨 '연극의 맛' - 김종칠 배우 등 출연자 3명의 화려한 개인기 볼만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그래 이 맛이야! 이게 연극이지!!“
4월 3일 개막, 19일까지 대학로 씨어터 쿰에서 공연되는 공연제작센터의 '블루 초코 블루스'는 제목 그대로 인생 실패자 셋이 모여 술 마시며 벌이는 '난리 블루스'다.
그런데 뭐 이래하던 연극이 술주정과 욕설이 난무하면서 관객을 웃기게 하더니 이내 눈물을 그렁이게 상황이 반전했다.
”그래, 이런 게 연극 보는 맛이지!“ 하는 감탄이 절로 날만큼 배우들의 연기에 물이 오르면서 관객을 웃프게 했다.
‘블루 초코 블루스’는 권영준 작가의 희곡이 시니컬하면서도 단단했고, 놀이처럼 펼친 윤광진 연출의 리얼리즘 무대가 섬세한 데다 김종칠 최민혁 박승희 세 배우의 케미와 개인기들로 난장판 상황을 감동으로 변화시켰다.
권영준 작가는 ‘그리고 바다를 오르다’로 지난해 제62회 동아연극상 희곡상을 수상했다.
필자는 보지 못했지만 ‘꽃님 이발관’ ‘나, 옥분뎐傳!’ 등 여러 작품을 윤광진 연출로 무대에 올렸고, 희곡집 ‘립笠, 명鳴!’에 소설도 쓰고 연출도 하는 다재다능한 작가다.
루저들의 애칭처럼 느껴지는 ‘블루 초코 블루스’는 권영준 작가의 초기작이라는데, 자료를 보면 작의가 재미있다.
쇼팽의 ‘에튜드’,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 파가니니의 ‘카프리스’처럼 연기자가 부담을 가지면서도 기량을 뽐낼 수 있는 소품을 올리고 싶어 이 작품을 썼고 ‘배우를 위한 연습곡’이란 부제를 달았다는 것이다.
이번 공연을 관람하며 필자는 1975년 상영된 황석영 원작, 이만희 감독의 영화 ‘삼포 가는 길’과 KBS ‘TV문학관’에 방영했던 김홍종 연출의 ‘삼포 가는 길’(1981년 방영)이 떠올랐다. 영화는 김진규 문숙 백일섭 배우가, 드라마는 안병경 차화연 문호장 배우가 출연했다. 세 명의 소외된 인물들이 동행하는 이 로드무비는 인간적 연민과 상실의 아픔을 안겨주었다.
연극 ‘블루 초코 블루스’에는 전직 카바레 제비 출신 노숙자 김주연(김종칠), 사법고시 실패에 따른 중압감으로 가출한 고시중(최민혁), 가수를 꿈꾸는 술집 아가씨 수은(박승희)이 나온다.
셋은 변두리 달동네 놀이터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 신세를 털어놓더니 술잔을 주고받으며 난리법석을 떤다. 싸우고 욕하고 웃고 노래하며 거친 삶을 살아온 역정에 스민 아픈 속내를 조금씩 드러낸다.
초반에는 찌질하게 느껴지던 이들의 소동이 시간이 흐를수록 우습지 않게 다가왔다. 지금은 비닐을 덮고 노숙하는 처지이지만 이들도 꿈과 희망이 부풀었던 화양연화의 세월도 있었다.
하지만 본색이 드러나면서 관객은 웃음을 거두게 된다. 제비는 수은의 핸드백을 들고 튀고, 고시중은 집 나간 아내를 찾고 있다는 사연을 술집 아가씨에게 들키고 만다. 수은은 돈 많은 손님에게 짓밟히고...
늦은 봄밤, 도시의 야경이 화려한 달동네 놀이터. 불과 하룻밤이지만 이들은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상처를 주기도 하면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작품이 난리 블루스에서 인생의 의미까지 짚어보게 하는 데는 윤광진 연출의 정통 리얼리즘 구현에 있다고 본다. 필자는 윤광진 연출의 작품을 많이 보지는 못했지만 차분하면서도 장면의 밀도가 깊음을 느껴왔다. 특히 이 작품에서는 작가가 의도한 캐릭터의 정서를 배우들의 호흡으로 섬세하게 풀어냈다.
‘블루 초코 블루스’에서 윤광진 연출의 의도를 든든하게 받쳐준 지원군은 이태섭의 무대미술이었다. 대극장 무대를 전담했던 그가 소극장 무대 전체를 비닐로 씌우고 긴 의자 몇 개로 심플한 무대를 선보였다.
이태섭 디자이너는 텅 빈 무대 중앙에 목재 시소를 설치했다. 오르고 내리는 이 시소가 등장 인물들의 인생유전(人生流轉)의 흐름을 가늠해주는 신의 한 수였다고 필자는 보았다.
이 연극의 진짜 묘미는 배우들의 찐 연기를 보는 것이다.
필자가 첫 문장에 ”그래 이 맛이야! 이런 게 연극이지!!“ 라고 쓴 것은 배우들이 웃기는 연기를 하다가도 심연을 자극하는 진정성 있는 감정 연기로 관객의 가슴을 치게 하기 때문이다.
제비 역 김종칠 배우의 왕년의 화려한 이력 저변에 깔려 있는 짙은 우수, 고시중 역 최민혁 배우의 내칠 수 없는 끌림 속에 묻어나는 아픔, 젊지만 산전수전 겪은 술집 작부 역 박승희 배우의 삭히지 않은 날것에서 나오는 톡 쏘는 맛이 가슴에 제대로 꽂힐 때 전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김종칠 배우는 심재찬 연출의 ‘만선’에서 평범한 역을 맡았으나 단연 돋보이는 연기로 주목을 모았다. 심영민 연출의 ‘내 웨딩케이크는 누가 먹어버렸나?’에서는 가부장적 외곬 성격을 누그려 뜨리는 밉지 않은 캐릭터로 관객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늘 그의 잠재력과 진면목을 다 캐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었는데 권영준 작, 윤광진 연출의 이번 무대에서 연기파 배우로서의 그의 재기(才氣)를 한껏 뿜어냈다.
춤과 노래는 물론 허세 가득한 너스레와 제비로서의 철학(?)을 현란한 화술한 능란한 몸놀림으로 연기해, 왕년의 유랑극단 배우 같은 기질을 드러내 보였다.
고시중 역 최민혁 배우는 김성노 연출 ‘영월행 일기’에서 처음 접했는데 권영진 윤광진 콤비의 ‘나, 옥분뎐’, ‘꽃님이발관’ 등에서 큰 역을 해낸 공연제작센터 배우다. 그는 극 초반에 사법고시에 연속 실패 후 가출한 찌질한 모습이었는데, 제비 형님을 추앙하며 대들기도 하고, 술집 아가씨 정주자를 위로해 주는 등 매력적인 모습으로 변해간다.
그가 가출한 아내를 찾아 나섰다고 고백하는 연기에서 필자는 숨이 콱 막히는 체험을 했다.
수은(정주자) 역 박승희 배우는 술 취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모습부터 리얼했는데, 두 남자를 상대하며 자신의 소신을 밝히는 야무지고 당돌한 캐릭터로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특히 육두문자로 내뱉는 욕설 연기는 일품이었다. 그러면서도 연민을 안겨주는 여성스러운 여린 감성도 동시에 보여주었다.
‘블루 초코 블루스’는 제목부터 유니크하다. 왁자지껄 유쾌한 것 같지만 심금을 울리는 묵직한 한 방을 지닌, 달콤쌉싸름한 아우라로 우리 인생의 정곡을 찌르는 연극적인 연극이다.
배우들의 연기가 익어갈수록 연극의 맛도 깊어지리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