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어왕' 무대에 울려 퍼진 조용필의 '허공'...고선웅 연출의 한국판 '리어왕외전'
[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 셰익스피어 비극 '리어왕'의 한국 버전, 리어왕 외전(外傳) - 리어왕 역 이영석 배우, 조용필의 '허공' 불러...기발한 발상 집단 연기로 풀어내 - 극단 마방진 20주년 기념공연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장충동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3월 20일 개막, 4월 12일까지 공연하는 고선웅 각색 연출의 '리어왕외전'을 3월 29일 관람했다. 배우 중심의 현장 아우라가 빵빵한 고선웅 표 ‘라이브 연극’을 휴일 오후 부담 없이 즐겼다.
극단 마방진 20주년 기념공연으로 배우들의 에너지는 여전히 파워풀했으나 포스터에 내건 ‘오락적 막장비극’은 표어만큼 강렬하지는 않았다. 이는 고선웅 연출이 셰익스피어의 고전 비극 '리어왕'을 비틀고 이야기와 볼거리를 한국식으로 확장시키면서도 원작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는 의미다. 기대보다는 덜 오락적이고 덜 막장이었다는 느낌이 들긴 했으나 셰익스피어가 보면 일대 파격이 아닐 수 없다.
외전(外傳)이란 본편이 메인 이야기라면 인물이나 사건을 추가해 따로 풀어낸 번외(番外)편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적인 문호 셰익스피어, 그중에도 4대 비극에 꼽히는 '리어왕'의 외전을 한다는 것은 웬만한 배짱과 창의력 없이는 어려운데 고선웅 연출은 그 어떤 버전보다도 개성적이고 버라이어티한 대형무대를 만들어냈다.
고선웅 리어왕 외전의 가장 큰 특징은 ‘코러스’ 활용이었다.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시작된 코러스는 작품의 의미를 확장하고 관객의 이해를 돕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코러스들은 장면을 연결하고 노래와 움직임으로 극의 흐름을 조정하기도 했다.
이번 무대에서는 남녀 혼성 코러스들이 집단 움직임으로 극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으면서, 상황마다 필요한 캐릭터들을 순발력 있게 해내는 멀티 연기까지 해내 극을 한층 풍성하게 했다.
두 번째는 고선웅식 한국적 풍자와 유머, 기발한 장면 연출이다.
앞서 원작의 이야기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했지만, 이 외전은 배우들의 말투와 풍자를 섞어 한국식으로 비틀었다. 가족관계, 인간적 욕망, 권력의 종말은 동서가 다를 게 없다지만 그것을 우리의 정서와 유머로 풀어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고선웅 연출은 배우들을 전천후로 활용하여 생생한 현장을 만들어냈을 뿐 아니라 다양한 볼거리를 창출해 비극 속에서도 웃음이 나오게 했다.
원형극장의 한쪽을 막은 벽면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 극의 배경은 물론 유행가 가사까지 띄우는 등 다목적으로 활용했다. 평소 육성으로 대사를 하다가 노래하거나 강조하고 싶은 대사들은 마이크를 사용하여 소리를 확성, 쇼 같은 분위기도 보여주었다.
조용필의 히트곡 '허공'(박건호 작사, 김희갑 작곡)의 멜로디가 배경음악으로 흐르기도 하고 리어왕 역을 맡은 이영석 배우가 마이크들 들고 직접 부르기도 하는 등 이 연극의 배경음악은 '허공'이다.
조용필의 '허공'은 그 가사와 멜로디가 '리어왕'의 주제와도 맞닿은 부분이 있기도 하지만, 이 노래 하나로 이 외전은 한국판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꿈이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아쉬움 남아... (중략) 허공 속에 묻어야만 될 슬픈 옛 이야기...”
고선웅 연출은 셰익스피어의 비극 '리어왕'을 해체해 마방진의 숙련된 배우 중심의 라이브로 재창작해냈다. 원작의 비극성을 유지하면서도 한국적, 유머와 과장과 스피디한 속도감으로 분위기를 전복시켜 웃다가도 씁쓸한 뒷맛을 안겨주었다.
마방진 배우들은 집단적인 움직임과 합창, 리듬감 있는 장면 전환으로 인간 군상의 여러 이야기를 펼쳐냈다. 여기에 고선웅 연출은 왕의 분신 같은 왕고와 느림과 여유의 상징인 거북이 등의 캐릭터를 설정하여 한숨 돌려 객관적 시각에서 극을 비춰내기도 했다.
왕이 리어카를 끌고 끊임없이 무대를 돈다든가, 큰사위 올버니가 양심을 회복한 후 오체투지하는 장면 연출 등은 기발했다.
'리어왕외전'은 배우들의 개인기보다는 집단연기에 중점을 두었다.
이날 왕 역은 관록의 이영석 배우가, 글로스터 역은 듬직한 유병훈 배우가 맡았다. 큰딸 거너릴 강지원, 둘째 딸 리이건 양서빈, 셋째 딸 코딜리아 이지현, 큰사위 올버니 한윤구, 둘째 사위 콘월 김남표 배우였다.
글로스터의 큰아들 에드거 역 조영규, 서자 에드먼드 역 견민성 배우였다. 리어왕의 충신 켄트 공작은 김윤태 배우가, 고너릴의 집사 오스왈드는 유희찬, 그리고 왕고 역은 이성원, 거북이 역은 조유라 배우가 맡았다. 조영민 김하리 김원중 박도영 이유진 이석중 등 코러스와 멀티 배우들의 활약이 컸다.
중진 연기파 이영석 배우는 외전의 리어왕 역으로는 딱이었다. 여러 연극에서 개성파 왕 역을 했을 뿐 아니라 매체에서도 노역 연기가 일품인 이영석 배우는 그 어떤 리어보다도 리얼하면서도 노인티가 나지 않는 활력을 보여주었다. 특히 '허공'을 열창하는 모습이 인상에 남았다.
글로스터 역 유병훈 배우는 듬직한 체구와 굵은 목소리 톤으로 무게 있는 연기를 펼쳤다. 콘월에게 눈알이 뽑혀 앞을 못 보는 연기를 실감 나게 해냈다.
충신 켄트 역의 김윤태 배우는 '내 웨딩케이크는 누가 먹어버렸나'에서 조주경 배우와 멋진 듀엣 연기를 펼쳐 필자가 주목해 왔는데, 이번 작품에서 왕에게 직언하다가 추방당하나 변장하여 끝까지 충성하는 캐릭터를 절도 있고 차분하게 해내 존재감을 드러냈다.
아마도 국립극장 하늘극장을 가장 잘 활용하는 연출가는 고선웅 아닐까 생각한다.
오래전 탈북민들의 생존기를 그린 '탈출, 날숨의 시간'을 이 원형극장에서 본 적이 있는데, 고선웅 연출은 배우들의 동선을 플로워에서 스탠드 객석까지 연결시켜 끊임없이 뛰게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번에도 플로워에 4면으로 등퇴장 할 수 있는 대형무대를 설치, 그 주변과 함께 넓게 공간을 활용했다. 라스트에 그 대형무대를 공중으로 들어 올리는 스펙터클 장면은 여러 의미를 상상케 하는 이 공연 피날레의 압권이었다.
커튼콜 후 스크린에 자막이 떴다.
“효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