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평 - 새로운 서평] 눈을 감고 느끼는 색깔여행 外
- [비평연대] 김상화·이솔림·김수연의 500자 서평
젊은 문화비평가와 출판전문가들의 커뮤니티인 '비평연대'에서는 숏폼 콘텐츠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500자 내외의 '매우 짧은 연대 서평'의 형식을 고안했습니다. 2030세대 지식인 특유의 빛나는 감각으로 제시되는 다양한 책들을 통해 지식의 최전선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편집자주]
■ 눈을 감고 느끼는 색깔여행 (메네나 코틴 지음, 로사나 파리아 그림, 유 아가다 옮김, 고래이야기, 2020)
어린이 그림책은 물성이 다양하다. 병풍처럼 늘어나는 아코디언북, 그림이 움직이는 포티큘러북, 접힌 부분을 들추며 보는 플랩북, 3차원 이미지가 튀어나오는 팝업북, 손전등을 켜고 보는 그림자북, 3D 영상이 펼쳐지는 AR북, 헝겊으로 만들어진 촉각북 등…. 종류도 모양도 각양각색이다. 모두 오감을 자극해 아이들의 인지 능력과 창의력을 발달시키기 위해서다.
'눈을 감고 느끼는 색깔여행'도 그런 그림책 중 하나다. 분류하자면 촉각책이다. 하지만 다른 촉각책들과 차별화되는 이 책만의 특이점이 있다. 바로 촉감으로 '색깔'을 말하려 한다는 것. 이 책이 "눈을 감고" 읽는 책인 이유다. 읽을 때 눈을 감아야 하니, 책에 쓰인 색은 흑과 백뿐이다.
첫 장을 펼치면 새까만 바탕 위, 흰 글자로 책의 화자 토마스가 말을 건다. "내가 어떻게 색깔을 느끼는지 들어볼래?" 그렇게 토마스가 표현하는 색깔 여행이 시작된다. "빨간색은 딸기처럼 새콤하고 수박처럼 달콤해. 그런데 넘어져 무릎에서 피가 날 때처럼 아픈 느낌이기도 해." 토마스의 말이 끝나자 이어지는 반대쪽 면의 그림은 투명한 딸기다. 딸기가 '투명한' 이유는 그림이 투명 잉크, 즉 에폭시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독자는 눈을 감고 종이 위로 돌출된 에폭시 부분을 손끝으로 만져 나간다. 더듬더듬 투명한 딸기를 손으로 만지는 사이, 독자는 토마스가 말하는 색깔의 '모양'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색을 상상으로 채워 나갈 수 있다.
토마스의 말은 그 위에 점자로도 찍혀 있다. 그 점자 역시 에폭시로 인쇄되어 만져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책이 아니다. 비시각장애인이 '시각에의 의존'으로부터 해방되길 바라며 만들어진 책이다. 시각에만 의존할 때 우리의 상상력이 어떤 한계에 부딪힐 수 있는지 경고하는 그림책이기도 하다.
북촌과 동탄에 가면 '어둠속의 대화'라는 체험형 전시가 있다. 시각 없이 다른 모든 오감을 열고 전시를 '관람'이 아닌, '감각'하도록 꾸렸다. 이 책은 그 전시를 책으로 만든 것과 같다. 북촌과 동탄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집 근처에 어린이도서관이 있다면 빌려 볼 수 있다. 세상을 보는 해상도를 높이고 싶은 독자라면 한 번쯤 읽어 보기를. 아니, 감각해 보기를 권한다. (김상화 / 출판편집자·비평연대)
■ 새들이 전하는 짧은 철학(필리프 J. 뒤부아, 엘리즈 루소 지음, 박효은 옮김, 북스톤, 2026)
겨울을 나는 동안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다는 걸 계절이 바뀌니 알게 된다. 터지듯 피어난 꽃과 한층 가벼워진 발걸음을 보고 있자면 겨울의 권태를 얼른 떨쳐내야 할 것 같아 조급해진다. 봄은 좀처럼 미룰 수 없는 계절이다. 부러 찾지 않으면 황급히 떠나버린다.
떨어지는 꽃잎에 덩달아 부산스러워진 마음을 책 표지의 동그란 눈이 가만히 바라본다. 살짝 비튼 고개가 무슨 일이냐고 묻는 것만 같다.
조류학자와 작가인 두 저자는 세계를 건너며 새를 만났다. 새들은 좀처럼 망설이거나 후회하지 않는다. 계절에 맞춰 이동하고, 때가 되면 집을 짓고, 매일 부지런히 먹이를 찾는다. 그 과업을 너무도 묵묵히 해내 삶에 통달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권태와 피로감은 죽는 날까지 달고 살 수밖에 없는 것일까 아득해질 때, 표지의 동그란 눈을 다시 본다. 그 작은 새의 날갯짓을, 그로부터 이어질 매일의 작은 일들을 떠올리면 멀어지던 마음이 자리를 찾는다. (이솔림 / 출판편집자·비평연대)
■ 우리는 아직 무엇이든 될 수 있다(김진영 지음, 휴머니스트, 2022)
책을 구매하는 행위는 단순 소비를 넘어, 독자의 상황과 글이 만나는 타이밍이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이 책이 그렇다. 갭이어를 보낸 직장인들의 인터뷰를 엮은 책으로, 쉼을 수동적 휴식에서 능동적 재정비의 시간으로 치환한다.
이 책의 강점은 내용과 물성의 연결에 있다. 도전적인 레이아웃과 충분한 여백은 독자가 천천히 일과 쉼의 경계를 사유하게 하며, 빽빽한 것들에 길들여진 현대인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살아진다는 감각’을 선사한다. 멈춤은 도태되는 것이 아닌 나를 재정비하는 시간임을 일깨운다.
불도저처럼 달리다 보면 제 힘에 고꾸라지는 순간이 온다. 이 때 앞서 경험한 이들이 성공적으로 통과했다는 사실은, 미래가 아닌 지금을 바라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결국 이 책은 번아웃과 퇴사의 기로에 선 현대인에게 각자의 속도를 찾도록 안내하는 가이드북이라 할 수 있겠다. 나만의 속도로 살 용기가 필요하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김수연 / 출판마케터·비평연대)